#7. 그들의 그녀.
은지가 모처럼 쉬기로 한날 그녀의 눈에 모처럼 분주하게만 보이는 나윤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오늘이 첫 대본연습이라 나윤의 마음이 한껏 들뜨는 모양이었다.
“오늘이니?”
“어? 어. 내가 너무 시끄럽게 왔다 갔다 했구나. 미안 더 자.”
“피~ 됐어. 매일 일찍 일어나니까 별로 피곤하지도 않아. 아으~ 그나저나 조단씨는 좀 어떤 것 같아?”
“뭐 그 사람이야. 담담하겠지.”
나윤의 대답에 은지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담 배우보다 더 초조한 나윤의 표정은 뭐란 말인가. 하긴 저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나조차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군.
“같이 가줄까?”
“어? 정말? 에이 아니 됐어.”
“에잇 뭐야. 나도 모처럼 잘난 배우들 좀 보겠다는 데.......”
나윤의 대답이 어떻든 간에 그들의 첫 출근을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녀도 서둘러 준비를 했다. 그런데 서둘러 준비를 한 그녀들 보다 조단이 벌써부터 차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으로 나윤이 심호흡을 깊게 한 후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
“그런데 상대배우는 누구야?”
“해수”
“어라? 해수? 정말? 그 도도쟁이가?”
“네.”
차를 출발시키던 태완이 나윤을 대신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역시 나윤의 말대로 그는 초조한 모습은커녕 오히려 무척 단아한 인상을 풍겼다. 거기다 코발트빛의 눈을 돋보이게 하는 그의 차가운 얼굴윤곽이 오월의 아침 햇빛을 받아 더욱 조각처럼 빛나 보이게 했다.
은지는 문득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또 다른 호기심이 생겼다. 며칠 전 한석을 음료수 CF촬영장에서 만났다. 그날 한석과 촬영을 하던 그녀는 잠시 쉬는 시간을 통해 들었던 녀석의 뜻밖의 말에 무척 놀랐었다.
“누나가 나 좀 도와주세요.”
“?”
“나, 강 나윤 그녀. 좋아하는 거 알죠?”
그녀는 한석의 갑작스런 고백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랬냐? 그런데 언제부터 나윤이가 너의 그녀였냐?”
그래서 그녀는 녀석에게 괜한 심술을 부렸다. 사실 섹시 미에 가까운 자신보다 백치미에 가까운 나윤을 좋아하는 남자들의 취향에 심술이 났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2살이나 어린 한석이 나윤을 좋아 한다는 고백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물론 연하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뭐 연하는 남자도 아닌가? 하지만, 녀석의 갑작스런 말에 놀라지 않는 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한석. 본명 한 재석 25살. 잘나가는 배우. 그것도 그냥 잘나가는 배우가 아니라 아시아에서 한석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그의 위치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런 그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는 자신의 작고 여리기만 한 친구 강 나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만난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버린 그녀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느 날 나윤은 미래를 포기한 자신의 인생에 마치 스펀지처럼 한석을 흡수해 버렸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명목 하에 그를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을 친구이상으로 따르고, 마음을 써주는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빈자리를 그들에게 내주려고했다. 특히 나윤을 자신의 그녀라고 부르는 한석에 대한 애정은 눈물겹기까지 했었으니까.
그런 녀석이 이제는 나윤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건 연기하는 눈빛이 아니야.’
녀석의 눈이 모든 걸 말해주듯 강하게 빛을 낸다. 은지는 그런 녀석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뭔가 단단한 결심을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말해봐. 나윤이가 언제부터 너의 그녀였는지.”
“항상. 늘. 언제나. 그녀는 언제나 나의 그녀였어요.”
“유치한 놈. 이 사실을 너의 그녀도 알고 있니?”
한석의 말에 다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시며, 은지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물론.”
“그래? 그렇담 내가 도울 일이 있기나 하냐?”
그녀는 한석의 대답에 갑자기 친구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비밀 따위 만들지 않겠다던 오래전 나윤의 말을 떠올리며, 심장에 비수가 꽂인 듯 심한 배신감에 다 마셔버린 종이컵을 무의식적으로 거칠게 구겨버렸다.
“날 밀어 냈어요.”
“?”
한석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하마터면 상처받은 녀석에게 말할 뻔 했다. 만약 그렇게 말했더라면 이 녀석 무척 화가 나서 앞뒤 가리지도 않고, 그녀를 저 아래 빌딩 밑으로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은지는 아찔하기만 한 고층 밑을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지었다.
“그래....... 서 내가 너희들 사이에서 무얼 해야 되는데....... 네 스스로 그녀를 좋아 했으니까. 그녀의 마음을 붙잡는 것도 네 몫이야. 난 끼워 넣지 마.”
“누나 정말 이러기야. 누나가 날도와 주지 않으면 아마 김 이사가 나윤에게 청혼할 지도 모르는데도?”
“!”
은지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는 자신을 느꼈다. ‘치사한 놈’ 녀석의 눈치가 그녀의 마음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한석의 입에서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게 짜증스럽기만 했다. 설령 그 모든 게 한석의 말대로 된다 한들 그녀는 김 이사의 마음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비록 그를 죽을 만큼 사랑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게 내가 널 도와야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나쁜 놈아!”
그녀는 자신을 올가미에 가두려는 못된 한석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다시 촬영장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녀의 뒤에서 한석의 깊은 한숨이 거센 바람 소리처럼 그녀를 신경 쓰이게 지만 그러나 정작 신경 쓰이는 건 석재가 나윤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한석이 놈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나윤만 그 사실을 모를 뿐.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그들이 촬영장에 도착한 순간 나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서둘러 도착한 회의실엔 태완의 상대 배역으로 지명해 놓은 해수와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지 않았던 한석이 그들이 오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버젓이 자릴 잡고 앉아있었다.
“그럼 다들 모인건가? 그런데 거기 송 은지 씨는 왜 온 겁니까?”
은지는 자신을 지목하며, 못마땅한 듯 말하는 김 이사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한석과 해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비록 그들의 일과 무관한 사람일 지라도 왠지 오늘 만큼은 저 무심한 남자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볼 때 한석씨야 말로 우리완 별개의 사람 아닌가요?”
한석은 나윤의 가시 도친 말투에 아직도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석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그녀에게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말하려했다. 그러자 김 이사가 조용히 그를 말렸다. 처음부터 김 이사가 이 모든 걸 계획했으니 그 마무리도 아마 자신이 지겠다는 거겠지만, 왠지 자신의 문제를 김 이사가 해결하려는 모양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한석 씨는 앞으로 우리와 일을 함께 할 거요.”
“뭐라고요? 김 이사님 저한테 그런 말 하신 적 없잖아요.”
“이봐요. 강 작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한테도 엄연히 배우를 결정할 권한은 있어.”
“누 누가 뭐래요? 하지만 이건.”
석재는 생각보다 심하게 당황하는 그녀의 표정을 재미나게 바라보았다.
“알긴 아는 거요. 난 가끔 당신이 내가 이회사의 대 주주란 걸 잊어버리는 거 같아서 말이야. 내심 불안했지.”
“그 그건 죄송해요. 그럴 뜻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우리가 영화에 참여하길 바라는 배우를 다 모셔온 것 같은데 이런 자리에서 까지 우리가 서로 왈가왈부한다는 건 너무 결례라고 생각하지 않나? 정 할말이 있으면 조용히 내방으로 찾아오라고, 강 나윤 작가님 난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나윤은 김 이사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석을 부른 건지 김 이사의 불순한 의도를 생각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도 몹시 화가 난 모습으로 태완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한석을 이번 영화에서 뺄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그를 볼 수 없었다.
“굳이 한석을 뺄 이유를 말해봐.”
그녀가 도움을 청할 사람은 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은지가 그녀의 생각을 강하게 막고 나섰다.
“이유? 그건 하여튼 너도 시나리오를 봐서 알겠지만, 그 애가 할 역할은 그 어디에도 없어. 그런데 어떻게 한석이가 우리랑 같이 영화를 한다는 거야. 거기다 그놈은 우릴 버리고 D&D로 가버린 놈이라고”
“그게 다야?”
“뭐?”
“아니 내가 볼 땐 그건 이유가 아니라 변명 같아서”
나윤은 은지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답답하게도 마땅히 그녀에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김 기수.”
“뭐?”
“김 기수 역 그 애주면 되잖아. 내가 볼 때 한석이 놈 너무 지고지순한 역할만 해 와서 이제는 좀 강한 역할을 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역할이 없다는 건 너의 핑계야.”
나윤은 은지의 말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뜨끔거리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은지의 말에 더 이상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나 보다. 결국 모든 게 꼬이고 말텐데....... 사실 김 기수 역은 한석을 위해 만들어낸 그녀 생애 최고의 악역이었다. 지금은 너무나 따뜻하기만 한 녀석의 성품을 예전에 그녀가 알던 삐뚤어지고, 차가운 정이 그리웠던 그 시절의 한석으로 되돌려 보고 싶은 그녀안의 악녀근성이 김 기수라는 역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너의 느낌을 믿어봐. 틀림없이 한석이 놈 다시 태어날 거야. 그것도 멋진 놈으로 너도 은근히 그걸 바란 거 아니야.”
“!”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에서 그들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그렇게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모든 감정을 소중하게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어느덧 영화의 홍보가 무르익어 가고, 생각보다 썩 연기를 잘하는 태완의 모습에 나윤은 자신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눈으로 실감했다. 게다가 덤으로 한석의 차가운 시선까지 매일매일 느껴야 했다.
“컷! 잠시 휴식입니다.”
나윤은 태완이 잠깐의 휴식시간을 빌미로 그녀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오는 걸 반겼다. 그녀는 그를 위해 얼음물을 준비해 주었고,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매달려 있는 땀을 닦아 주기 위해서 작은 키를 높여 망설이지 않고, 까치발을 높이 들었다. 그들은 어느새 잘 어울리는 매니저와 배우가 되어있었다.
“고마워.”
“고맙긴요. 내가 할 일인걸요.”
“그래서 더 고마워. 날 위한 당신의 수고가. 아마 저기서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한석에게도 똑같이 했겠지만, 어쨌든 난 지금의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좋아.”
나윤은 태완의 뜻밖의 말들에 은근슬쩍 한석을 돌아보았다. 정말 그의 말대로 한석이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어찌나 매섭게 바라보고 있던지 그녀의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촬영이 시작되고서부터 녀석은 늘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런 녀석의 시선을 일부러 모르는 척 넘기고 있었지만, 왠지 자꾸만 그녀의 가슴에 부담스럽게 쌓여만 갔다.
나윤은 애써 한석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그녀의 손에서 떠나갔으니까. 더 이상 한석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촬영이나 열심히 하시죠. 배우님”
“넵!”
“자. 다시 촬영 시작합니다. 태완씨 다음동작은 이렇게 좀 강하게 해줘요. 그리고 해수씨는 좀더 느긋한 모습으로 오케이 그럼 시작합니다.”
10분여의 꿀맛 같은 휴식시간이 지나고 태완은 또다시 바쁘게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들의 촬영은 해가 지고 나서도 참을 더 지나서야 끝낼 수 있었다. 피곤한 몸으로 촬영을 마친 그의 앞으로 해수가 조용히 다가섰다.
“저....... 혹시 시간 있으세요?”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해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해수의 뒤로 저 멀리 나윤의 얼굴이 근심어린 모습으로 그의 눈에 담겨져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그냥 태완씨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
그는 해수를 찬찬히 바라봤다. 가녀린 몸만큼이나 색 기 어린 눈빛이 남자를 자신의 영역 안에 얼마든지 마음대로 가둘 수 있는 그런 여자로 보였다. 그의 뇌리에 해수의 모습은 인생자체가 연극인 여자로만 보였다. 그런 여자가 자신과 친해지고 싶다니 태완은 빈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의 웃음을 그녀가 오해하고 말았다.
“그럼, 저랑 데이트 하는 거죠.”
“난 지금 몹시 피곤합니다. 중요한 일 아니면 다음에 보지요.”
태완은 끈적한 말투로 자신의 팔에 두른 해수의 팔을 무정하게 걷어 내며, 그녀의 유혹을 차갑게 거절했다. 그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절실한 건 자신에게 유혹의 손길을 보내는 여자보다는 저 멀리서 초조한 얼굴로 또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 그녀였다.
“내가 그렇게 매력 없나요?”
해수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눈빛이 예사롭지 않는 그가 그녀를 만나러 온 날. 그날부터 줄 곳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을 깨는 그의 행동은 해수를 자존심 상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머물길 바라는 그의 차갑지만 탐나도록 아름다운 눈동자는 늘 다른 여자에게 머물고 있었다. 자존심 감한 그녀가 오로지 그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려놓을 수 있는 순간은 그와 촬영하는 순간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오늘도 그가 자신을 봐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허투로 돌아가 버렸다.
“내가 매력 없냐구요.”
“영화계에서 인정하는 매력적인 여자를 감히 내가 매력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까요?”
그의 말에 해수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태완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유혹하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나보다 저기 강 나윤 작가님을 더 좋아하는 거죠?”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해수는 그 사실이 자존심 상하도록 싫었다. 설마 했던 그의 표정. 이제는 완벽하게 들어 내놓고 그녀를 좋아하는 눈빛을 보였다.
“당신은 저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나 보죠?”
해수는 비겁할 정도로 남자를 자극하고 싶었다. 그게 그녀가 이 세계에서 배운 남자를 마음껏 원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은 언제나 늘 제대로 통했다.
“무슨 말이지?”
역시 그는 그녀의 술수에 척척 감겨왔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가 올인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저절로 못된 생각을 굳혔다.
“만약, 우리가 서로 좋아 하는 척 하면 우리가 만든 영화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그는 여자의 음모를 몰랐다. 그래서 더욱이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내가 저 여자를 좋아 하는 거랑 무슨 상관있지?”
“대단히 많이 상관있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영화가 성공을 해야 희열을 느낄 테니까. 지금도 우리가 다정한 모습으로 있는 건 상관하지 않잖아요. 오히려 저기 저 남자만 신경 쓰일 테니까.”
해수는 일부러 한석을 끌어들였다. 그라면 충분히 태완을 사로잡기 위해 쓸 좋은 먹잇감이 되어 줄 테니까. 아마도 충분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아세요?”
“?”
“그들은 아주 오래된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죠.”
그녀는 태완의 귀에 마지막으로 충격적인 말을 남겨놓은 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해수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그의 주먹이 강하게 꼭 쥐어졌다.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그녀가 한석에게 향했던 시선을 그에게 서서히 돌렸다.
“그만 가지.”
태완은 저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의 그녀를 보자 더욱 화가 났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스스로 그녀에게 자꾸만 빠져드는 것일 뿐이었다.
“젠장.”
그가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나윤은 그의 어깨에 자신의 두 손을 올려놓으며,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맛 사지 해주기 위해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 그 순간 그가 경직된 몸으로 그녀의 손을 거칠게 때어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한두 번 그의 어깨를 주물러 준 것도 아닌데 그가 보이는 태도에 그녀는 이상 하리 만치 서운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굳은 인상이 무척 신경 쓰였다.
“왜 그래요. 많이 피곤해요?”
“그냥.”
“그런데 왜 이제 왔어요. 촬영은 아까 끝났는데.”
“스텝들이랑 얘기 좀 한다고, 그렇게 궁금하면 좀 오지 그랬어.”
“내가 당신처럼 한가한 사람인가요. 당신 다음 스케줄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다고요. 그런데 많이 피곤한 가 봐요.”
그녀가 땀으로 얼룩진 태완의 얼굴을 티슈로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윤은 늘 남에 걱정만 하고 사는 사람처럼 자신의 피곤한 몸을 잘도 혹사시킨다. 예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일로 모든 걸 잊고 즐기며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일 하루 쉬면 안 될까?”
“어? 어. 이런 어쩌죠.”
그는 나윤의 표정만 봐도 안 된다는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가 아닌 그녀를 위해서 하루쯤 쉬고 싶었다.
“안된다는 말은 하지 마. 당신이라면 할 수 있잖아.”
나윤은 내일 스케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 촬영스케줄은 없지만, 어렵게 잡은 인터뷰 스케줄을 미루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보름동안 강행군을 한 그를 위해 단 하루를 뺄 수 없다는 생각은 그녀를 단호하게 만들었다.
“할 수 없네요. 내일 난 김 이사님한테 죽도록 쓴 소리 듣고, 당신은 쉬는 수밖에 에고 내가 이래서 매니저 안하려고 했는데.......”
그는 자신 때문에 휴가를 얻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단지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그녀를 하루라도 맘 편하게 쉬게 해주려했을 뿐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매니저로 그녀를 선택한 것을 조금쯤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담 그만둬. 나도 당신이 나 때문에 잔소리 듣는 거 싫으니까.”
그녀를 향한 차갑기만 한 태완의 태도가 어쩐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무슨 안좋은 말이라도 들었어요?"
“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나?”
“네? 아니요. 난 그저 당신이 피곤한 것 같아서.”
“난 괜찮아.”
나윤은 빌라에 도착 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의 행동에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그를 쉬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김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이사님 내일 스케줄 잠시 미뤄야겠어요.”
그녀의 말에 김 이사가 호통부터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히 넘어가 주었다. 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하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잡았다.
어제 그가 바라던대로 모처럼 촬영을 쉬게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태완의 호출에 나윤은 부리나케 그의 집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는 청반바지를 멋스럽게 입고, 그 위에 하얀 반소매티를 입은 채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헉헉........ 무 무슨 일이에요.”
태완은 급하게 올라와 숨을 고르는 그녀를 보며,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그녀가 자신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와 준다는 사실이 생소할 만큼 너무나 행복했다.
“이거 좀 봐달라고”
태완은 내일 촬영이 있을 분량의 시나리오를 흔들어 보이며, 그녀를 자신의 옆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가 고민하는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해수와의 러브신이 있는 부분에서 어떻게 하면 더욱 실감날지 영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난 또 뭐라고, 고작 그것 때문에 겨우 쉬고 있는 나를 불렀단 말이에요?”
“고작이라니......... 이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 아닌가?”
“하긴. 어디 봐요.”
태완이 형광 팬으로 밑줄까지 그어 놓은 부분을 바라보던 나윤은 할말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태완의 따가운 시선과 어색하게 마주쳤다.
“이게 뭐요. 나보고 어쩌라고,”
“대역 좀 해달란 거지. 혼자서는 영 감이 살지 않아서 말이야.”
태완은 그녀를 놀려먹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관연 한 처자를 이런 낯 뜨거운 애정 씬에 불러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뻔뻔스런 얼굴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말들이 하찮은 변명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가 한숨쉬듯 말했다.
“내 내일 해수랑 해요.”
“왜? 난 당신이랑 하고 싶은데?”
“장난하지 말아요. 난 이런 거 못 한다구요.”
태완은 자신이 써놓은 글에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귀엽게 바라봤다. 그리고 웃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천진한 그녀의 얼굴에 마구, 마구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웃고 말았다. 그의 웃음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녀의 빈약한 몸을 위해 그의 냉장고를 가차 없이 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시원한 오렌지를 한가득 꺼내들었다.
조용히 대본연습을 하던 그가 그녀를 강렬하게 바라본다. 그의 냉장고 안을 가득 차지하고 있던 새콤달콤한 오렌지를 입안가득 게걸스레 머물고 있던 그녀는 그런 태완의 눈길에 조심스레 엉망이 되었을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오렌지 먹는 거 첨 봐요? 사람 무안하게.......”
나윤은 어제부터 자신의 헛헛한 뱃속을 채울 틈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런 경력도 없는 그를 이리저리 따라다니며 홍보한다는 건 무척 힘들고 고단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어제도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느라 스텝들이 권하는 어떠한 것도 입에 댈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가 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나마 오렌지를 맛있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나윤은 태완의 강렬한 눈빛에 달콤한 오렌지 향의 유혹에 못 이겨, 너무나 게걸스레 오렌지를 먹어대던 자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너무나 창피했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모습을 쭉 지켜봤다는 게 싫을 뿐이었다.
“이리 좀 와봐!”
그가 그녀를 자신의 옆으로 성급하게 불러 들였다.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서는 그녀를 그가 참을 성 없이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당긴다. 그리고 더 이상 다른 어떤 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그녀의 입술은 태완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강렬한 향으로 그를 자극하고, 또 입술 끝에 묻어 있는 향긋한 오렌지 맛이 그를 달뜨게 했다. 오렌지향이 나는 그녀의 입술이 기분 좋게 그의 혀끝에 맴돌며, 자연스레 감겼다.
그가 나윤의 입술을 마치 그녀가 먹던 오렌지를 먹듯 게걸스레 탐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던 걸 멈추고 태완의 입술을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행동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냥 태완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거침없이 올라와 그녀를 참을 수 없는 열정으로 가득 채워나갔다. 숨을 몰아쉬며, 숨 가쁘게 그녀를 다그치는 그의 거침없는 동작에 나윤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신음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나눴다. 적어도 그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디까지 갔을지 몰랐을 것이다.
“내 내일 봐요.”
태완이 그녀를 붙잡을 세도 없이 그녀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태완은 알았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자리잡아가고 있는지를 더 이상 그녀를 향한 마음을 자로 재듯 거침없이 자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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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요홋~
벌써 7편째 올립니다.
기분도 좋고 날씨도 좋고, 마치.......
집나간 며느리도 제발로 찾아 들어올것 같은 그런 기분을 아실런쥐.... ㅡㅡ'''
저조차도 즐겨보았던 나윤과 태완의 키스씬을 즐독하시며,
따끈한 리플과 푸짐한 추천 날려주시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