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은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만 대본에 두고 있었을 뿐 머릿속은 온통 조금 뒤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들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조금 뒤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
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녀에게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하며 또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동민의 시선이
문 쪽으로 옮겨졌다. 조금 있으니 손잡이가 돌아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동민은 재빨리 대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트콤 연출자였다.
"조금 뒤에 촬영에 들어갈 겁니다. 준비 되는 대로 세트장으로 오세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동민은 곧 촬영에 들어간다는 연출자의 말에도 승희의 생각 때문에 초조함 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아...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동민은 조금씩 후회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동석과 승희였다.
"야! 빨리 준비해야겠다. 곧 촬영 들어간데..."
"어."
동민은 그때까지도 승희의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어서 그냥 대본을 보며 대답했다.
"동민 오빠 여기 의상이요."
승희가 가죽점퍼를 뺀 나머지 의상들을 동민에게 내 밀었다. 승희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동민은 그때서야 고개를 들어 승희의 얼굴을 보았다. 힘없이 나가던 모습과는 달이 생기가 돌아보였다.
그 모습에 동민은 어색하지만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 그래..."
동민은 의상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탈의실로 들어온 동민은 길게 한숨을 한번 쉬고는 옷들을 갈아 입었다.
바지를 갈아 입고 티를 갈아 입으려던 동민이 행동을 멈췄다. 목 티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게 무슨 짓이냐... 무슨 깜짝쇼 하는 것도 아니고...'
동민은 또다시 괜한 짓을 한 것 같다는 후회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동민의 머리에 조금 전 승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저 녀석 생기 있는 모습을 보니깐... 훗'
동민은 그렇게 혼자서 웃고는 옷에 화장품이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옷을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바지가
조금 튀는 것 같았지만 위에 옷이 햐얀색이라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승희는 가죽점퍼를 동민이 입을
수 있도록 들어 올려주었다.
'음... 역시...'
승희의 눈에 들어온 동민의 모습은 가죽점퍼의 느낌 때문인지 왠지 모를 터프함이 느껴졌다. 점퍼까지
입은 동민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지만 그래도 어색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자신이 모습을 살피고 있는 동민에게 승희가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모자를
씌워 주었다.
동민은 모자를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좀 어색해 보이지 않냐?"
동민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얘기했다.
"햐... 얼굴이 되니깐 뭘 입어도 받는다. 진작부터 그렇게 변화 좀 줄 것 그랬다. 음.. 좋아좋아. 딱이다.
딱! 아주 십대처럼 보인다."
동석이 동민의 모습을 훑어보며 얘기했다.
"야.. 그래도 왠지.. 아니다. 빨리 가자 모두들 기다리겠다."
동민은 어색하다는 말을 하려다가 옆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승희를 보고는 그냥 말을 돌려버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 동민의 모습을 보고 있던 승희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어색해하는 동민의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또 자신을 생각해 주는 동민의 마음에 고마움 때문이기도 했다.
세트장에 도착한 동민은 어색함 때문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다가 촬영에 들어갔고 그의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승희에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연기
몰입에 들어갔다.
"오케이."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렇게 오늘 촬영분에 있어 실내에서 찍는 신은 몇 신 찍지도 않고 끝이 났다.
이제부터는 실외에서 찍는 신만 남았다. 그런데
"저 감독님. 지금 밖에 비가 오는데요."
한 스텝이 와서 얘기했다. 감독의 표정은 난감함으로 바뀌었다.
"아.. 음.. 저 동민군 내일 오후에 스케줄이 많이 있나?"
감독이 동민에게 물어왔다.
"예?! 에.. 아마.. 잠시만 요."
동민은 감독의 물음에 확실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동민이 알고 있는 스케줄은 드라마 촬영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다른 날 같았으면 그날 스케줄과 다음날에 스케줄까지는 동석에게 물어서
알고 있었던 동민이었는데 어제의 일 때문에 동석이 또다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꼭 해야 할 말 외에는 동석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있던 중이라 내일 스케줄에 대해선 확실히 모르고 있는
동민이었다.
동민은 동석을 찾았다. 조금 멀지 않는 곳에서 동민을 보고 있던 동석은 동민이 자신을 부르는 듯한 시선으로
보자 동민이 있는 곳으로 왔다.
"동석아. 내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내일?! 어... 드라마 촬영 밖에는 없는데. 왜?"
"그래?! 잠시만."
"내일 오후부터는 비워 있는데요."
동민이 감독에게 대답했다.
"그거 다행이군 비 때문에 오늘 촬영을 내일로 미뤄야 될 것 같거든."
"네... 어쩔 수 없지요."
"그래. 그럼... 우리 다 같이 어디 가서 한잔하지? 우리들도 회식을 한번 해야 하는데 여태 시간이 나지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거든. 어차피 오늘 촬영은 못하니깐 시간이 난김에 회식 겸 동민군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같이 가서 한잔 하자고 어때? 시간 괜찮나?"
동민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우 감독의 말대로 오랜만에 만난 것이라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네... 저희가 끼어도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동민은 감독에게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동석을 돌아보았다. 동석 또한 한 동안 일에 쫓겨 술자리다운 자리를
같지 못하고 있던 터이라 은근히 반기는 눈빛으로 동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민과 동석 승희는 시트콤 촬영 팀과 함께 방송국 근처에 있는 한식집으로 향했다.
"동민군. 오늘 완전히 다른 사람 같던데?! 진작부터 그렇게 변화도 좀 주고 그러지 그랬어?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 우리 시트콤으로 동민군의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되서. 하하하"
감독이 동민에게 술 잔을 내밀며 말했다. 동민은 감독의 말에 조금 쑥스러움을 느끼며 건배를 하고는 말없이
그냥 마셨다.
"정말이에요. 오늘 동민씨 너무 멋있었어요. 모자 쓴 모습도 오늘 처음 본 것 같은데 어쩜 그렇게 모자가 잘
어울려요?!"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여배우가 동민을 향해 웃으며 작지 않은 소리로 얘기했다.
그때쯤 되니 동민도 어떠한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고 있었다. 그때
"어! 미진씨!"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이루고자 한 일들 다 이루어 지시길 바랍니다.
금년 한해에는 항상 밝은
날들만 있으시길 바라면서...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