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후에 버려야할 10가지]
첫째, 사랑했던 기억
둘째, 다시올꺼라는 기대
셋째, 내가 아니면 안될꺼라는 자만
넷째, 친구로라도 함께하고픈 욕심
다섯째,날 오랫동안 기억해주길 바라는 이기심
여섯째,다른사람 만나지 않길 바라는 희망
일곱째,함께하며 해주지못한 것들에대한 후회
여덞째,우연을 바라는 집착
아홉째,나없이는 불행하길 바라는 바보같은 생각
열번재,그리고…아직까지도 널 사랑하는 내마음…
2장
이별후 찾아오는 병- ‘이별 증후군’
좀비처럼 추욱 늘어진 몸을 이끌고 욕실로 직행하는 여진은 욕조 한 가득 더운 물을 받아 놓고 피곤에 쌓여 있는 몸을 뉘었다. 전신을 휘감는 따스함이 꽁꽁 얼어있던 마음까지 녹이는 듯했다. 한결 기분은 나아졌다. 가슴 속에 엉켜있던 먹구름 또한 잠시나마 걷히는 듯했다.
하지만-
“하아...”
가슴 저만치서 툭 하면 올라 오는 이놈의 습관적인 한숨은 또다시 여진을 괴롭히려 든다. 물기가 가득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비집고 흘러 내리는 눈물이 손바닥을 스민다.
주책이지.. 적지도 않은 27살에 사랑에 배신 당했다고 이런 청승이나 떨고 있다니.
우스워. 서여진 너 진짜 우습다. 27년 동안 백진우 한 사람만 사랑했던 건 아니잖아. 백진우 말고도 사랑은 했었잖아. 그런데 그때의 헤어짐도 지금처럼 아팠었니? 아니잖아. 그땐, 그렇구나. 사랑이 떠나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잘 버텼잖아.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 왜 이렇게 지지리 궁상 청승을 떨고 있는건데.. 왜 백진우 아니면 이 세상 살고 싶지도 않다며 자살까지 하려 했던건데..
하긴, 그땐 어렸지. 어린 사랑이었지. 그땐 멋모르게 사랑을 했고, 성급했고, 성급했기에 금방 식었었지. 그렇다면 지금은? 백진우 그 남자와는 미래라도 약속했던 것인가?
그랬다. 백진우라면 서여진의 미래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진우라면 아침 밥도 군말 없이 차려줄 수 있었고,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냄새나는 양말도 기꺼이 빨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제의 배신을 맛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컷던 것일까? 그래서 이리도 가슴이 먹먹한 것일까?
‘사랑한다’는 그 말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헤어지자’ 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것이 남녀사이의 인연이라고 하던데 정말 백진우와는 이걸로 끝난것일까?
아직까지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다. 믿어야만 하는 이 현실이 싫다.
수증기가 잔뜩 서린 거울을 닦아낸 여진은 그 안에 있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초췌한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자 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초라하다. 언제부터 사랑에 절절대는 여자가 되어버렸는지. 자존심하나는 대한민국 그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거라 나름대로 자부했던 당당한 서여진은 어디로 간 것인지.
차디찬 욕실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 앉아버린 여진은 목놓아 울어버린다.
욕실 밖에선 왜 그러냐며 문을 두드리는 동생 여은이의 노크소리도 무시하고 세상 끝난 사람마냥 엉엉 울어버렸다.
한참을 울고 있던 여진은 어느정도 기분이 가라앉았는지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욕실을 나왔다.
“초상이라도 났어? 외박하고 왔으면 조용히 씻고 잠이나 처 잘 것이지 뭐 잘났다고 화장실에서 울고 불고 난리래? 동네사람들 다 깨울라고 작정한거야?”
식탁의자에 한쪽 다리를 척하니 올려놓고 아침밥을 먹고 있던 여은이 톡톡 쏘아댔지만 탈진상태인 여진은 싸울 힘조차 없는지라 대답 대신 방문만 쾅 닫아버렸다.
“쯔쯧. 저것도 언니라고.. 야 서여진, 너 오늘 입고 간 옷 깨끗이 빨아놔. 그거 세탁해야하는거 알지? 세탁 안해놓기만 해봐라. 다신 내 옷에 손도 못대게 할거야. 들었어? 야 서여진!!”
“알았거든. 좀 조용히하고 밥이나 먹어줄래?”
방문만 빠끔히 열고 딱 힘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여진 때문에 더 이상은 따질수가 없는 여은은 목구멍에 딱 막힌 밥을 꿀꺽 삼켰다.
“재 왜 저래? 배신이라도 당했나? 안 어울리게 아침부터 분위기 잡고... 야, 서여진 밥 차려놨으니까 이따 먹어. 나 일하러 간다. 참, 오후에 아빠가 집으로 오래. 난 퇴근하고 갈테니까 언니야도 시간 맞혀서 와. 괜히 또 잔소리 듣지 말고..”
여은이의 말을 듣기나 했는지 무기력에 빠진 여진은 물방울이 뚝뚝 흐르는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않고 침대로 올라가 머리 끝까지 이불을 치켜올렸다.
잠이라도 자야겠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악몽의 시간에서 잠시나마 해방이 될거 같다.
그런데 어찌된일인지, 몸과 마음은 피곤해 죽겠는데도, 눈꺼플은 천근만근 무거워 죽겠는데도 잠은 오지 않는다. 머리속은 어지러워 죽겠는데, 그 어지러운 머리속에서 자꾸 백진우와 함께한 추억들이 오래된 영화의 한장면처럼 한장씩 한장씩 떠오른다.
-만난지 100일째였나? 둘이 손을 잡고 청계천을 걸었어. 광화문을 시작해서 종로까지 걸었으니 내 평생 하루종일 걸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을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다리는 아프지 않았어.물론 그 다음날 근육통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말이야.
-크리스마스엔 눈이 참 많이 왔었는데.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우리는 그 함박눈을 맞으며 눈싸움도 하고 러브스토리주인공 알리 맥그로우와 라이언 오닐처럼 눈 밭을 뒹굴렀어. 유치했지만 그땐 참 행복했는데. 내 평생 가장 아름다웠던 크리스마스였을거야.
-그때가 언제였지? 컴퓨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고생해서 써둔 시나리오가 다 날아갔던적이 있었어. 괜히 진우한테 화풀이를 했는데 화 한번 안내고 내 투정 다 받아주고 돈 없는 백수 여자친구한테 글 잘써서 나중에 꼭 갚으라며 노트북까지 사주던 사람이였어. 백진우는...
-2005년 12월 31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다음에도 이 자리에서 함께 이 종소리를 듣자고 약속했어. 그때까지 변하지 말자고.. 우리 사랑 백년만년 변하지 말자고 그렇게 약속했어. 그 약속을 철썩같이 믿고 있던 내가 등신이였지만.
사랑이 떠나고난 자리에는 그와 함께한 추억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사랑을 하기 전까지 그 추억을 먹고 산다. 사랑하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 개뼉다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랑이 남기고간 추억이 아름답다고? 그래 퍽이나 아름답지. 그런데, 때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도 있다고.. 지금이 바로 그때고.. 제발 사라져라. 내 머릿속에서,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라.제발! 제발!!
할수만 있다면 하드를 포맷하듯이 백진우와 함게한 추억이란 폴더를 싸그리 포맷시켜버리고 싶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일초만에 사라져버리는 포맷장치가 뇌속에장착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진은 그리 생각했다.
거실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던 여은이 조용한걸 보니 출근을 한 모양이다.
더이상 여진을 방해할 사람은 이 집안에 아무도 없다. 잔소리쟁이 동생 영은도 사라졌다.
이불속에 숨어있던 여진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노래 CD를 급하게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신나는 음악CD를 집어 오디오에 넣고 재생버튼을 누르고 볼륨을 최대한 크게 틀었다. 신나는 헤비메탈음악이 방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곧이어 책상위에 어지럽혀진 책들과 쓰다만 시나리오의 종이들을 정신없이 치우기 시작하는 여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들도 다 꺼냈다. 걸레도 빨아와 책장이며 바닥까지 쉴새없이 쓸고 닦아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때까지 쓸고 닦고, 지저분하기만 했던 방안이 말끔해질때까지 멈추지 않고 청소를 하던 여진이 이번엔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햇살 속에 배깔고 늘어지게 자고 있는 강아지 띨구를 깨워 욕실로 끌고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채 잠에서 깬 띨구는 주인이 이끄는 대로 힘없이 따라 들어가 어제 여은이가 목욕씻겼음에도 또 목욕을 해야만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채 털을 터는 띨구를 보자, 갑자기 설움이 복받히는 이유는 뭘까?
여진은 띨구를 끌어안았다.
“으흑. 띨구야. 띨구야. 이 누나 백진우 그 개새끼한테 차였어. 글쎄 불여시랑 바람이 났데. 으흑. 띨구야. 이 누나 어떡하냐. 띨구야. 속상해. 속상해 죽겠다. 니가 고년놈들 궁댕이좀 꽉 물어줄래,응? 띨구야..”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말 못하는 짐승 띨구는 그 얇디얇은 혓바닥으로 여진의 볼을 핥아주며 꼬랑지를 흔들어주었다. 이순간 여진에게 가장 힘을 주는건 이 말못하는 맑은 영혼 띨구 뿐이었다.
띨구를 다 씻기고 나자 그제서야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다니..가지가지한다, 정말. 그래도 먹어야지. 백진우그 자식한테 차였다고 밥까지 굶으면 나만 더 비참해지지. 암, 이럴때 일수록 먹어야지. 먹어야 살지.
여진은 양푼 가득 밥을 푼후,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온갖 반찬들과 씨뻘건고추장을 듬뿍 넣은 뒤 밥을 비볐다. 하얀 밥알이 맛깔스럽게 변하자 수저로 푸욱 떠서 한입 가득 밀어 넣은뒤 꾹꾹 씹는 여진. 채 씹지도 않은 음식물을 식도로 넘기고 또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었다. 목이 메이면 물을 마셨고, 다시 꾸역꾸역 밀어넣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은 가라앉지 않았고, 밥솥을 텅텅 비워낸뒤에야 여진은 점심식사를 마쳤다. 물론, 10분도 안돼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걸 토해내는 수고를 했지만 말이다.
밥을 먹고 실성한 사람마냥 방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다 시계를 보니 1시. 딴에는 많은 일은 한거 같은데 시간은 좀체 가지 않는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만이 방안의 적막을 깨우고 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여진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해두었던 책들을 다시 다 꺼내놨다.
뭐라도 해야지 이 무료한 시간이 지나갈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띨구를 다시 목욕시킬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뭐, 띨구 역시 주인의 지랄같은 성격을 알았는지 어디에 숨었는지 도통찾을 수가 없었다.
책들을 하나씩 정리해가는 여진.
작가 공부를 하기위해 하나둘씩 사두었던 책들이 어느새 책장 빼곡히 차 있었다.
“사놓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돈지랄이다. 돈지랄. 이거 다 팔아버릴까?”
어차피 보지도 않는책 헌책방에 팔아서 엿이나 바꿔먹자며 혼잣말로 중얼거고 있던 여진의 손에 들어온 책 한권.
“어...린..왕자?”
책 제목을 소리내어 읽던 여진은 갑자기 온몸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생일날 백진우가 사준 책이기 때문이다.
<나를 길들여줘... 가령 오후 4시네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무슨 말이야?>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명대사. 어때? 멋지지?>
<치. 어쩐지 백진우 답지 않다했어.>
<그럼 이건 어때? 네가 몇 시에 오던 난 항상 그자리에 있을거야. 네가 올때까지…. 급하게 오진마. 천천히 와도 난 그자리에서 항상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아하하. 너 유치해. 진짜 유치해.아하하하하>
재수없게도 여진의 손에 들린 책은 잠시나마 잊고 있던 백진우와의 추억을 떠올리게만들었고, 그 책을 보는 순간 다시 옛 기억에 휩싸인 여진의 머릿속에 단 한가지의 생각이 박히게되었다.
백진우 그남자를 이대로 놓칠 수 없다. 실수했다. 그날 그렇게 보내는게 아니였는데. 다시한번 생각해보라고.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이대로 끝나버리는거냐고. 바람한번 핀거 까짓것 용서해주겠다고. 남자들 실수로 바람 한번 필수 있는거라고. 난 쿨한 여자니까 용서해준다고. 그리 말할것을 지금에서야 후회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아직기회가 있다면 붙잡자. 돌려놓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보자. 너 아니면 나 죽겠으니, 나 죽는꼴 보기 싫으면 다시 돌아와라. 그년 버리고 나한테 다시 돌아와라. 구차해도 좋다. 자존심 없는 여자라도 좋다. 그딴 자존심, 사랑앞에선 개딱지보다 못한거니까. 2년동안 성인인 너랑 나 안해본짓 없이 다해본사이고, 너도 알다시피 난 너가 첫남자이다. 나의 첫 순결을 뺏아갔으니 당연히 책임지는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냐 협박이라도 해볼참이다.
그것도 안된다면 당장 그 불여시 잡아다가 삼자대면이라도 해서 백진우의 모든 비리를 까발려놓을것이다.
그것도 안통한다면 이것만큼은 서여진의 자존심의 마지막이라 차마 할 용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백진우가 돌아만 와준다면 그 백여시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어볼참이다. 보내달라고. 이사람..
백진우라는 남자 내가 2년동안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바보같은 내가 , 연애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내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걸 알게해준 사람이라고 무릎 꿇고 눈물로 하소연이라도 해볼참이다. 그래야지 살수 있을거 같았다. 그래야지 숨을 쉴수 있을것같았다. 그래야지, 이 지긋한 방청소를 그만둘수 있을거 같았다.
우선, 백진우부터 만나자. 백진우부터 만나서 매달려보자. 나도 어디한번 삼류드라마에 나오는 비극적인 여주인공 되어보자, 나 싫다고 떠난 남자 바짓가랑이 붙들고 안돌아온다면 “부셔버리겠다”고 두눈 시퍼렇게 뜨고 협박이라도 해보자. 그래야 후회가 없을거 같았다.
여진은 나갈 채비를 했다. 무조건 백진우에게 잘 보여야 한다. 백진우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거 같은 여리여리한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했던가? 그래, 서여진 지금부터 백진우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보는거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청바지에 흰색면티를 즐겨입던 털털하기만 한 여진은 지금이라도 백진우의 마음에 들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선 여은이의 방에 침입하여 여은이가 제일 아끼던 50만원짜리 고가의 분홍색원피스를 꺼냈다. 여진이가 이 옷을 몰래 입은걸 알면 아마 여은이의 잔소리가 3일내내 이어지겠지만 당장은 여진이 살고봐야했으니 그건 차후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무조건 분홍색원피스를 입어야했다. 며칠전에 여은이 이옷을 입었을때 분홍천사처럼보였으니까.
분홍색원피스를 입고난 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를 풀어헤쳤다. 어깨를 덮은 긴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질하고 나니 좀전과는 다른 서여진이 거울에 비쳤다. 역시 옷이 날개라더니 50만원짜리 원피스가 한몫 단단히 한다.
이만하면 백진우도 생각을 바꾸겠지. 어리석은 서여진은 자신의 겉모습만 바뀌면 백진우가 돌아올거라 단단히 착각했나보다. 그러니 평소엔 택시비가 아까워 곧 죽어도 버스를 고집하는 여진이 오늘은 마음이 급했는지 택시에 올라타고 백진우가 있는 회사로 향했겠지.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왜 서여진은 이리도 백진우에게 목을 메는가. 그 고귀한 자존심이 땅바닥으로 추락하면서까지 왜 백진우를 붙잡으려고 하는지 집고 넘어가보자.
백진우를 잠깐 설명하지만, 그는 꽤 근사한 남자다.
27살의 동갑내기임에도 때론 오빠처럼 때론 아빠처럼 늘 여진을 보듬어주던 남자였다. 성격이 원체 다정다감하고 친절해서 화 한번 내지 않았던 남자였다. 서글서글한 눈으로 항상 웃어주던 남자. 칠칠맞고, 다소 수다스러운 서여진을 늘 챙겨주는 남자. 한마디로 젠틀남! 그래서 여진은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여진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랬게 여진은 백진우가 돌아올거라 믿고 있었다.아니, 어쩌면 서여진은 믿었던 백진우에게 버림받았다는게 억울해서 그를 잡으려 하는지 모른다. 믿었던 사람에게서의 일방적인 이별통보는 멀쩡한 사람도 집착의 길로 인도하니까.
-성신건설-
백진우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다.
핸드폰으로 몇번이나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진의 전화를 피하는지 받지 않는다. 음성도 몇번씩이나 남겼다. 할말이 있으니 잠깐만 보자고.. 지금 너의 회사 앞이라고.. 나올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지만, 십분이 지나고, 삼십분이 지나도 백진우에겐 연락이 없었다. 하물며 문자한 통 없었다.
한시간이 지나고 나자 조바심이 생겼고, 일분, 이분이 시간이 계속 흐르자 조금씩 화가 머리끝까지치밀어오른다. 당장 그가 일하는 사무실로 뛰쳐들어가 내 말이 말같지도 않냐며 뒤엎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나마 있던 정까지 떨어질까봐 꾹꾹 참았다.
다시한번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때, 성실건설직원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회사밖으로 나왔고, 여진은 그 직원에게 다가갔다.
“저기 죄송한데, 백진우 대리님께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서여진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잠깐만 나와달라고.. 이사람이 핸드폰을 받지 않네요. 나올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꼭좀 전해주세요.”
직원은 흔쾌히 허락했고, 담배를 다 태운 뒤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을수가.
그 직원은 입사한지 얼마 안된 새내기라 백진우 대리가 누군지 몰랐다. 만약 알았더라면 오늘 아침 일찍 현장에 나가서 사무실들어오지 않는다고 전해줬을터인데.
새내기 직원은 사무실에들어와서야 백진우가 현장에 나갔던것을 알았고, 다시 여진에게 전해주려고 나갈때 부장이 새내기 직원에게 프린트를 복사해오라 지시를 내렸다. 호랑이 부장이 무서웠던 새내기 직원은 프린트 복사에 바빠 여진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벌써 세시간째다. 그 직원, 성실하게 생긴게 분명 진우에게 말을 전해주었을 텐데 세시간이 지나도록 백진우는 나오지 않았다.
이만하면 답이 된걸까? 백진우의 대답은 이건가?
회사 앞까지 찾아온 나에게… 세시간동안 기다린 나에게 넌 이런식으로 답을 해주는구나.
바보같은 난 무엇을 기대하고 온 것인가..
빛이 절반쯤 꺼진 눈으로 터덜터덜 걷는 여진의 뒷모습이 쓸쓸하기 그지 없다.
이별 그 후의 행동들-
좀비처럼 추욱 처진 몸을 더운 욕조 속 담궈서 피로 풀기. 쓸데없는 방청소를 한답시고, 온 살림들을 꺼내어 닦고 , 쓸며 마음 비우기. 그와의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어보며 눈물 흘리기. 만나주지 않을 사람의 집앞이나, 회사앞에서 주구장창 기다려보기. 하지만 돌아오는건 실망과, 한숨, 절망.
네가지는 이미 다 해보았다. 그리고 여진은 실연후 꼭 해야만 하는 일, 다섯번째를 하기위해 미용실로 향했다.
왜 사람들은 실연후 머리카락을 자를까 그동안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왜 실연을 당했는데 머리카락에 분풀이를 하는것인가. 허나, 이제는 이해할거 같았다. 왜 실연후 머리카락을 자르는지.
긴머리를 좋아했던 그남자를 위해 기꺼이 하루에 한번 머리를 감아야하는 수고와, 방안에 긴 머리카락들이 돌아다녀야하는 불상사와, 가끔 헝클어진 머리 때문에 귀신으로 오해받으면서도 그 남자를 위해 귀찮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의 긴 머리카락에 환상을 갖았고, 백진우 역시 긴머리를 좋아하던 속물중의 속물이었다. 그랬기에 여진은 백진우를 만나는 동안 단 한번도 머리에 손을 대지 않았고, 어느새 그녀의 머리는 어깨를 덮고 있었다. 이젠 머리를 길어야만하는 이유가 없어졌다. 이 귀찮은 긴 머리카락을 보여줄 사람이 없으니까.
이제 다 잘라내리.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순간, 하나씩 잊어버리리.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리.
홀.로.서.기
내 시간, 나만의 자유시간을 가져보는거야. 둘이 아닌 하나. 솔로의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는거야. 좋잖아. 저녁식사로 뭘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서 좋고, 휴일엔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그에게 잘 보이기위해 억지로 화장하지 않아서 좋고, 옷때문에 동생이랑 싸우지 않아서 좋고.. 얼마나 좋아? 안그래?
“단발로 잘라주세요.. 사정봐주지 말고 확~ 잘라버리세요.”
20분후.
어깨를 덮었던 머리는 귀밑까지 짧아져있었다.한결 가볍다. 목뒤가 시렵긴 했지만 그래도 가볍다. 이래서 이별후 머리를 자르나 보다. 마음도 가볍고, 기분탓인지 모르지만 머리가 잘려나간만큼 추억도 조금은 사라진거 같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분 탓이다. 머리를 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은 실연후 머리카락 자르는 것과 이별은 별개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날밤, 여진은 친구들을 불러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2차로 노래방까지 가서 이별의 노래를 2절까지 부르며 또다시 청승을 떨고 있었으니까.
지독히도 가슴아픈 이별 그후, 바보같은 행동들을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여진은 그렇게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달이 흘렀다.
그 한달의 시간동안참 많이도 아팠다. 심한 고열에 시달리며 몇칠을 앓아 누웠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될정도로 잠만 잤었다. 씻지도 않았다. 여은이가 돈을 쥐어주며 제발 목욕탕이라도 갔다오라 했지만 여진은 만사가 귀찮았다.
그렇게 잠만 자다가 이젠 불면증에 시달려 하루종일 뜬눈으로 밤을 지세운날도 많았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우울증 초기 증상인가보다. 코미디프로를 봐도 웃음대신 눈물이 나온다. 가끔씩 친구들이 기분풀어준다고 여진을 불러내 놀아줘도 그때뿐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었다.
그렇게 한달의 시간이 물흐르듯 흘러가자, 여진은 어느순간부터 이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으로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인가, 정신이 확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서 미뤘던 학원을 다시 다니게 되었고,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에게까지 연락을 해서 약속을 만들었다. 오지 않을전화를 기다리는게 싫어 핸드폰 번호도 바꿔버렸다.
모든것이 예전처럼 돌아가는듯했다. 가끔씩 사람들 틈에 껴도 혼자가 된것만 같은 외로움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럴때마다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떠들었다.
“누가 그랬지? 시간이 약이라고.. 그말 정말 맞나봐. 시간이 지날수록 빛바래듯이 그렇게 사라져가..”
백진우에게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고 자살하려고 한강대교를 찾았을때, 그곳에서 만난 남자.
그가 그랬다. 시간이 약이라고. 사랑에 버림 받아도 그래도 산다고...
그땐 그런 충고따위는 필요없다고 잘라 말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말이 맞았다. 한달전에는 죽을거 같았는데, 그래도 난 살아있고, 그래서 이렇게 웃고 떠들고 있다. 여진은 이젠 얼굴도 희미해져가는 이름모를 그 남자의 그 말이 가끔씩 생각나곤 했다.
“그래, 서여진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우선 잠시 접어두었던 시나리오부터 써보는거야. 그리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거야. 모든걸 다 비우고, 한달간 푹 쉬다오면 그땐 정말 새로운 서여진으로 태어나는거야. 아자아자 화이팅! 할수 있다 서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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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늑대 목도리 따윈 필요 없다. 남자 사귈 시간에 시나리오나 써서 대박 터트리자!]
매직으로 쓴 큼지막한 글씨를 자랑스럽게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여진은, 그 종이를 눈에 가장 잘 뛰는 벽에 붙여놓았다.
2006년 서여진의 대담한 목표다.
2주 동안 무조건 40분짜리 단막극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시킬 것이다. 공모전에 8월 달이니까 3개월 동안 미친 듯이 쓰다보면 공모전까진 좋은 시나리오 하나는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 비록 사랑은 잃었지만 누군가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시간을 얻었다. 그 자유의 시간을 마음껏 만끽하며, 이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투자하겠노라 그리 결심한 여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의를 다졌다. 그녀의 눈동자엔 열정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서여진. 할 수 있다. 너는 할 수 있어. 아이 캔 두 잇!!!
여진은 근 2달 동안 닫아두었던 노트북의 전원을 키고, 향이 좋은 모카커피를 음미하며 메모해둔 시놉시스를 눈으로 읽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바탕화면을 보는 순간, 여진의 표정은 싸하게 굳어버렸다. 하마터면 향 좋은 모카커피가 든 머그 컵도 놓칠 뻔 했다. 바탕화면 가득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여진과 백진우의 다정한 사진이 깔려 있던 것이다. 맥박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동시 여진은 노트북을 탁 닫아버렸다.
백진우가 선물로 주었던 모든 것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지 알았는데 아직까지 백진우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어 여진을 괴롭히고 있었다. 비씬 노트북이긴 하지만, 백진우가 사준것이기에 버려야한다. 안그러면 노트북을 쓸때마다 백진우가 생각날테니까. 여진은 까치발을 들고 장롱 꼭대기에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나중에 고물상에 팔아먹어야지. 그래도 고맙구나. 덕분에 커플링 팔아서 친구들한테 한턱 거하게 쐈고, 선물로 받은 책들은 도서관에 기부해서 칭찬받았으니, 이젠 노트북 팔고 요즘 새로 나온 컴퓨터 살란다.
메케한 담배연기가 코끝을 찌르는 동네 피씨방을 찾은 여진은 캔 커피를 들고 자리를 찾아앉았다.
옆자리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요즘 유행하는 카트라이터 게임을 하느라 바쁘다. 조그마한 궁둥이를 요리조리 씰룩대며 가상운전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자 픽 웃음이 난다.
컴퓨터 부팅이 되자 메모장을 켜고 필기해둔 시놉시스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캔 커피가 비어갈 무렵, 여진은 뻣뻣하게 굳은 목을 운동시켰다.
옆에서 게임하고 있던 아이는 어느새 자리를 비웠고, 그 자리엔 아저씨가 담배연기를 뻐끔뻐끔 내뿜어내며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옆자리에 사람이 바뀐 것도 모르고 집중을 하고 있었다니. 여진은 자신의 놀라운 집중력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곧 에티켓도 모르고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아저씨로 인해 이맛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지하실이라 그런지 환기도 안되고, 스멀스멀 코끝으로 들어오는 담배연기 때문에 숨쉬기 조차 힘들었다. 콜록콜록 마른기침을 하여 눈치를 줘 봐도 이 아저씨, 배짱 좋게 “앗싸~ 쓰리고~” 라고 외칠 뿐 이다. 힐끔 모니터를 보니 대박 나게 생겼다. 어차피 난 내 할일 다하고 집에 가려던 참에 괜히 한소리 해서 쓰리고에 오광까지 한 아저씨의 기분을 망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던데, 성격까지 좋아진 모양이다.
다 써둔 시놉시스를 메일로 보내고 집으로가기 위해 오랜만에 메일 함을 열었던 여진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근 한 달 동안 아무리 관리를 안했다 치더라도 200건이 넘은 스펨메일들이 메일 함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원~스펨 메일을 차단시키든가해야지. 어쭈, 오빠 오늘밤 한가해? 놀구들 있네. 난 언니거든? 뭐, 멋진 늑대 항시 대기라는 스펨메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만..’
일일이 스펨메일을 지우던 여진은 막 삭제버튼을 누르려던 마우스를 멈추었다.
메일 제목은 이러했다. [LO비젼에서 역량 있는 시나리오 작가를 구합니다.]
몇달전에 여진의 엄마가 도대체 언제까지 놀고 먹을거냐며, 시나리오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공장에가서 돈이나 벌어오라고 핀잔을 주었고, 그게 서러웠던 여진이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자신의 이력서를 올려놓았던 적이 있었다. 이력서라봤자 경력과, 자격증이 텅비어있는 초라하기 그지 없는 이력서라 과연 이걸보고 누가 고용하겠나 싶어 기대도 안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메일이 온것이다. 그것도 시나리오 작가를 구한다는 놀라운 소식이니, 여진은 흥분을 안할수가 없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만큼이나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꾹꾹 누르며, 크게 심호흡을 하며 메일 클릭 했다.
[저희 회사는 나날이 활성화되는 모바일 다양한 성인영화제작으로 인하여 역량있는 시나리오 작가와 남녀 배우를 모집합니다.]
인삿말부터 거창하게 시작되는 메일이었다. 너무나 가슴이 벅차올라 메일을 세세히 읽을수조차 없던 여진은 우선 LO비젼의 연락처부터 핸드폰에 저장시켰고, 담배냄새 가득한 피씨방을 서둘러 나왔다.
하늘이 날 버리지 않으신 모양이다. 드디어,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황금같은 기회가 생기다니..
서여진 앞날에 쨍하고 해뜰 날이 다가왔고, 서여진의 굴곡심한 인생의 비포장도로에 드디어 매끈한 아스팔트가 깔리려는 모양이다.
만세 삼창을 부르며 껑충껑충 뛰는 여진은 어린아이 마냥 신이 난다. 작가라니.. 꿈에도 그리던 작가라니...
5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오늘처럼 상쾌하긴 처음이다. 그동안 쌓였던 그 모든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5월의 바람과 함께 날아가는듯하다.
‘우선 시나리오를 써서 번돈으로 컴퓨터를 사고 여행도 가는거야. 그리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려야지. 얄미운 여은이 옷은 더이상 빌려입지 않게 예쁜 옷도 사는거야.’
상상만해도 어깨춤이 덩실덩실~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행복한 상상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여진은 떨리는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저장해두었던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잠시 후 굵직한 남자 분이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 여진이라고 합니다. 다른게 아니라 오늘에서야 시나리오 작가를 구한다는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기회가 흔치 않기에 상당히 친절한 말투로 또박또박 말하는 여진은 예를 갖추었다. 메일 보낸지가 언젠데 지금와서야 연락을 하는거냐고, 이미 시나리오 작가를 구했다고 한다면 큰 낭패였다. 하지만, 다행이도 시나리오 작가는 아직 구하지 못한 모양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꽤 반갑게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꽤 급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그렇고, 지금 면접 보러 올수 있죠? 한번 찾아와봐요. 전화로 얘기하는것보단 얼굴보고 얘기하는게 더 낫잖아. 여기가 어디냐면은, 가만 있어보자, 삼성역에서 8번 출구로 나와서 한 100m쯤 걸어오면 진주 오피스텔이 보일거야. 거기서 엘레베이터 타고 쭉~ 쭉 올라와. 8층에 내려서 우측을 보면 크게 LO비젼이라고 써있거든. 잘 찾아올수 있겠지? 못찾으면 다시 전화해. 데릴러 갈테니까. 알았지?]
“저기..”
[궁금한건 이따 만나서 얘기하자고.. 5시까지 늦지 말고 와. 전화비 많이 나오니까, 끊읍시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우는 남자의 목소리는 한마디로 딱총맞은 촉새와도 같았다. 아무리 급하다 치더라도 상대방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말만 해버리는 딱총 맞은 촉새는 5시까지 오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끊겨진 핸드폰을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여진은 괜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어떤 장르의 시나리오를 원하느냐. 멜로? 가족극? 미스테리? 아님 추리? 난 멜로나 가족극을 쓰고 싶다. 뭐, 회사측에서 멜로나 가족극이 싫다면 다른거라도 쓸 용의는 있다. 면접을 보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 예전에 써둔 30분짜리 단막극 대본이 있는데 가져가야 하나. 시나리오 한편당 보수는 어떻게 되느냐. 프리랜서로 일하는거냐, 아님 정규직인가. 전화로 묻고 싶은게 수십가지인데, 일단 찾아오라는 딱총맞은 촉새 때문에 건진거란곤 LO비젼이 위치한 장소와 반말과 존댓말을 적절하게 섞어쓰는 기분나쁜 말투 뿐이었다. 웬지모를 석연찮은 느낌이 전신을 휘감는다. 딱총맞은 촉새의 그 입담하나로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무너지자 여진은 슬리퍼신은 발로 바닥에 깔린 돌맹이만 화풀이겸 툭툭찼다.
그래도 어찌하랴~ 일단 찾아가보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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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으면 꼬리말을 달아주세요..ㅜ_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