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의 신나던 한 때가 지난 저녁,
유리는 곯아떨어진 민혁을 바라보며 툭툭 손에 쥔 펜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곧 유려한 필체로 노트 위로 장문의 글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200x년 x월 x일. 한국 문학의 재능을 다시금 확인 하다. 라는 제목으로 씌여진 글은 그렇게 수장의 노트를 채운 후에야 멈췄다.
“으드드드드- 아웅. 잘 잤다.”
온 몸의 근육이 풀려 이완되는 기분 좋은 느낌.
한껏 기지개를 켠 민혁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정말 오랜 만에 신나게 놀았다. 놀이기구도, 맛있는 음식도 좋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간 하루가 또 있었을 까?
민혁은 옆에 기대어 잠든 유리를 보며,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 나왔다.
“그렇게 조심 할 거면 일찍 하던가. 아빠 바보. 이미 기지개 켤때 다 깼네요.”
“아... 미안미안. 혼자 자는 게 익숙해서 미안해.”
“으구 됐네요. 아침 먹어야지. 아줌마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내가 할까?”
부스스한 머리를 추스르며 말하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이 머리를 콩 쥐어박으며 말했다.
“나도 됐네요. 간단한 아침이라면 내가 차려 줄 테니까. 씻고 옷 먼저 갈아입으세요.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are you ok?”
“ok. 그럼 앞으로 아침밥은 매일 아빠가 하는 거다. 알았지?”
“아... 그게 그렇게 되나? 하하하하”
날카로운 유리의 지적에 민혁은 웃음을 터트리며 주방을 향했다. 며칠 함께 하진 않았지만, 눈높이를 낮출 필요 없는 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아이러니다. 독신 입양이 아이가 아닌 본인 위한 일이라고 반대했던 그가 아이를 입양한 것도 그렇고, 법이 개선되고 일이 이렇게 저질러지고 나서 독신 입양 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 또한 그렇다.
“뭐, 건축도 미술도 수학도 모두 아이러니라고들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된 거지. 그래. 서로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끝. 더 생각 할 필요는 없는 거야. 아자 아자! 박민혁. 잡생각은 뒤로 하고 아침상이 먼저다 아자!”
짝짝!
볼을 두드리며 기운을 돋는 민혁의 얼굴이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니까. 아침식사는 탄수화물, 단백질, 비타민이 풍부하되 지방이 적은 음식이 좋으니 뭐가 좋을까? 닭 가슴살? 소고기?”
민혁은 주방 한 켠에 놓인 요리 책을 읽으며 활짝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가정부로 계신 아주머니의 부지런함 때문인지, 아니면 주방을 자주 찾는 유리의 깔끔함 때문인지 커다란 냉장고 안은 깔끔하게 잘 정돈 되어 있었다.
“닭 가슴살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요리는 셀러드. 하지만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없으니 이건 패스하고, 소고기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요리. 소고기 국. ok. 일단 이걸로 하나 낙찰.”
손에 쥔 책과 냉장고 안의 재료들을 번가라 보던 민혁의 손에 잘 숙성 된 소고기가 쥐어졌다. 불의의 사고로 일찍부터 가족들과 떨어지게 된 이후 기면증에 들어 잠들었을 때를 제외 하고는 손에서 요리를 놓아 본적이 없다.
한식이면 한식, 중식이면 중식, 양식이면 양식.
못하는 요리가 없는 준비 된 요리사 민혁이다.
“먼저 고기는 차가운 물에 담궈 핏기를 빼고 푹 삶고, 무는 나박썰기 파는 어슷썰기로 준비해 둔 다음 이렇게 물이 끓으면 고기를 건져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준다.”
요리 책을 읽으며 기분 좋게 아침을 준비하는 얼굴로 웃음이 넘쳤다.
누군가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한껏 솜씨를 내어 요리를 준비하는 민혁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호오- 아빠 제법 요리 잘하네? 근데 그거 간은 제대로 한 거야? 다진 마늘, 진간장, 후추, 참기름을 넣고 잘 버무리지 않으면 비리거나 맛이 엉길지도 몰라.”
“응? 아아- 당연히 잘 했지. 내가 누군데. 움하하하! 그런데 유리 너 이거 소고기 무국 끓일 줄 아는 거야?”
“응. 당연하잖아. 아빠가 손에 쥐고 있는 책. 그거 내건데? 일전의 아빠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물론 시간이 없어서 그랬던 거였지만.”
“아? 그랬어?”
민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선 유리를 바라보며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이 작은 꼬마는 무엇을 생각하며 요리 책을 보고 요리를 배웠을까?
보글보글 끓어가는 육수의 맛있는 소리도 잊은 채 민혁은 그렇게 눈앞의 유리에게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아빠! 고기랑 무! 지금 안 넣으면 육수 다 말라서 먹을 것도 없겠다. 으휴! 정말 칭찬을 해줄 수 가 없다니까.”
“아, 미안미안. 우리 유리가 너-무 예뻐서 아빠가 깜빡했네. 금방 맛있는 아침 차려 줄 테니까. 저기 가서 티비라도 보면서 기다려. 그렇게 계속 보고 있으면 또 아빠 유리의 미모에 빠져서 실수 할지도 몰라.”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라도 않지. 아빠 바보 메~롱!”
귀여운 얼굴로 혀를 쏙 내밀고는 후다닥 도망치는 유리를 보며 민혁은 준비해둔 재료들을 육수 위로 밀어 넣었다.
누군가를 위한 아침식사와 귀여운 딸 그리고... 얼마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의 따듯함.
민혁은 커다랗게 거실을 울리는 뽀뽀뽀의 아침 체조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 좋은 아침식사 준비를 마쳤다.
맛있게 차려진 아침상이 비워진 식탁 위, 민혁은 물로 목을 축이는 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침도 맛있게 먹었겠다. 우리 이쁜 딸 오늘은 뭘 할까요?”
“음... 일단은 설거지.”
유리는 늘어선 식기들을 들어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깨끗하게 비운 밥그릇과 국그릇을 싱크대 위로 옮기는 것이다.
“아, 됐어 됐어. 아빠가 할 테니까. 유리는 가서 쉬고 있어.”
“그건 안 될 말이네요. 아빠가 그랬잖아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라고, 이런 건 어릴 때 몸에 익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고생한다고 했으니까. 이건 내일 내가 할게.”
“아... 그렇게 되나? 그런데 키가 싱크대 크기에 맞지 않아 힘들 텐데...”
“이 바보 아빠야. 가전제품은 쓰라고 있는 거네요. 베에-”
유리는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민혁의 엉덩이를 툭 차고는 손에 쥔 식기들을 식기 세척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키가 작은 유리의 손에도 닿을 만큼 낮게 자리 잡고 있는 식기 세척기는 항상 그녀가 이 일을 해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거참... 유리야 하나 궁금한 게 있는 데 요즘 초등학생들은 다 유리처럼 딱 부러지고 주관이 뚜렷해? 흠... 내 나이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음- 그럼 아마도 아빠 어렸을 때와 같을 걸? 내가 누구 딸인데 남들과 똑같겠어. 히히- 안 그래?”
“하하! 그래 그래, 내 딸이 남들과 똑같을 리가 없지. 으이구 이쁜 우리 딸. 이리와 봐요. 꼭 안아주게.”
“헤헤- 정말?”
유리는 활짝 팔 벌려 웃는 민혁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좋은 아침, 행복한 일상을 느끼는 것은 민혁뿐만이 아니다.
누구보다 외롭고 힘들었던 소녀.
민혁의 품에 안긴 유리 역시 이런 아침과 하루를 꿈에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 딸 뭐 하고 싶은 건 없어? 놀이 공원 또 갈까?”
“응? 아니아니, 그건 이제 됐어. 아빠가 좋은 것도 매일 하면 질린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건 권 아저씨가 약속한데로 한 달에 한번. 아빠와 함께하는 하루에 가자.”
“하하. 그래 그럼 놀이 공원은 다음 달에 가기로 하고 우리애기 오늘은 뭐 할까?”
웃으며 묻는 민혁의 물음에 유리가 도톰한 입술을 두들이며 말했다.
“음... 그럼 그림! 그림 그리자 아빠!”
“...그림?”
“응! 방학 숙제이기도 하고, 또 아빠랑 같이 그려보고 싶기도 하고. 히히! 유리그림 잘~ 그린다구. 유리가 아빠 그려줄게.”
“오! 정말? 아빠 멋지게 그려주는 거야?”
“응! 응!”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의 얼굴가득 웃음이 걸렸다.
귀엽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민혁은 품에 안은 유리의 통통한 두 볼에 얼굴을 부비며 흔쾌히 말했다.
“그래- 그림이다 그림! 크레파스랑 스케치북은 있어?”
“당연하지! 그거 없는 애가 어디 있어. 잠깐만 기다려봐 아빠 금방 가지고 올게!”
“응, 넘어질지 모르니까 너무 뛰지 말고 천천히.”
“응!”
품에서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다닥 뛰어가는 유리의 모습에 민혁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도 좋을까?
달려 나가는 유리의 뒷모습에서 보이는 조급함에 왠지 모를 미안함이 들었다. 그간 이런 사소한 일 하나 해주지 못한 것일까? 행복하게 웃는 유리의 모습에 겹쳐지는 옛 모습에 민혁은 가슴 한켠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찾았다! 아빠 아빠! 여기 아빠것도 있어 이리 와봐 빨리!”
창고용 방이 되어버린 구석방에서 기쁨에 찬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찾았기에 저리도 기쁘게 소리치는 것일까?
민혁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유리가 부르는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뭔데 그렇게 기쁘게 부르는 거야? 내꺼라니 뭘 찾았는데?”
“이거이거! 이거 아빠꺼 맞지 응? 그치?”
빼꼼 방안으로 고개를 내미는 민혁의 모습에 유리가 흥분해 소리쳤다.
쾌쾌한 먼지가 가득한 창고 방의 구석.
민혁은 유리의 조그만 손이 가리키고 있는 캔버스와 화구를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내게 맞긴 한데... 내꺼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내 기억에는 없는 물건이라...”
“그래도 아빠 꺼 맞잖아. 아빠도 나랑 그림 같이 그리면 안 돼? 나는 아빠 그리고 아빠는 나 그리고 응? 그러면 안 돼?”
“아 저 그게...”
민혁은 싫다고 말하면 울 것만 같은 유리의 표정에 압도되어 말을 늘였다. 아이들은 눈빛도 무기라고 하더니 딱 맞는 말이다.
저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의 시선을 어떻게 외면 할 수 있을까.
눈빛에 거절치 못한 풀죽은 목소리가 민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후... 그래 알았어. 그 대신 이상하고 못나게 그려졌다고 화내면 안 돼. 아빠는 그 캔버스를 본 적도 붓을 잡아 본적도 없으니까.”
“응! 안 그럴게. 아빠는 분명 잘 그릴 테니까. 헤헤-”
해맑게 웃는 유리의 웃음에 민혁의 입 꼬리가 어색하게 말아 올라갔다.
처음 보는 캔버스와 화구들...
무슨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캔버스와 화구를 챙기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 위 글은 글쟁이의 개인 홈페이지인 forpsi.cafe24.com 에서 먼저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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