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차 안에 있는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민영아."
"민영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동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야! 인마! 둘이 있는데 어때! 자식..."
불만이라는 듯 퉁명스럽게 동석이 말했다.
"앞으론 둘이 있을 때에도 민영이라고 부르지 마."
"왜 그러는데? 너 전에는 동민으로 불리는 것 보다 민영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잖아.
자신을 찾는 것 같다고..."
"지금은... 싫어. 동민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낯설어..."
동민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데뷔 후 동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이 민영이라는 자신
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오랜 친구이자 매니저인 동석에게는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동민
이 아닌 민영으로 부르라 했었다. 그렇게라도 잃어가는 자신을 찾고 싶어서였다. 처음 승희
와 대화 했을 때에도 자신을 그냥 보통 사람 이 민영으로 대하는 것이 좋아 승희를 잊지 못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허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승희 때문이었다. 처음
부터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연예인 차 동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예인이라면 누구나가 그렇듯 처음부터 내가 그 누구요
라고 하지 않듯이 아니 할 수 없듯이 동민 또한 그랬으니깐... 후회스러웠다. 자신의 코디자
리에 대해 말해 준 것이... 처음부터 동민이라는 이름을 꺼내지만 않았더라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일로 인해 인연에 끈을 맺는 일도 이렇게 가슴 답답해하며
고심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창 밖을 보고 있던 동민은 천천히 눈을 감아버렸다. 이런 동민
의 심정을 조금도 모르고 있는 동석은 눈을 감고 있는 동민의 모습이 일로 인해 지쳐 있는
것으로만 보였고 그런 친구의 모습이 안쓰러워 위로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익살스럽게
말을 했다.
"친구야! 우리 어제 술도 마셨고 하니 술로 인하여 허어해진 육신을 달래 주어야 되지 않겠
냐? 그래서 말인데 우리 괴기 먹으로 가자. 어?! 이 형은 올 만에 괴기가 땡긴다. 가자. 어?!
가자..아."
자신을 위로해 주고픈 동석에 마음은 느낄 수가 있었지만 지금에 동민의 심정으로는 아무것
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툭 내뱉듯 뱉어버렸다.
"미안하다. 그냥 가서 쉬고 싶다."
침묵이 흘렀다. 동민은 아무런 대꾸가 없자 이상하다는 생각에 동석을 돌아보았고 표정이
굳어있는 동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자신을 생각해 주며 마음 써 주고 있는 동석에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민은 좀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내 뱉은 말에 얼버무리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깐 내 말은... 어제 잠도 못자고... 너도 아침에 봤잖아... 좀 피곤하다. 밥은 그냥 들
어가서 대충 시켜 먹자... 어?! 친구야."
"아.. 맞다 . 그랬지?! 내가 그 생각을 못했다. 미안하다 야.. 그래 그럼 그냥 들어가서 쉬자."
그때서야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동민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듯 자신이 미안하다는 투로
말을 했고 동민은 그런 동석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민은 다시금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렇게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동민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랑이란게... 뭘까?"
"뭐?!"
얼핏 들었는지 동석이 대꾸했다.
"어?!"
"너 좀 전에 뭐라고 했잖아. 뭐라고 한거야?"
"어?! 내가?... 아니 아닌데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
동민은 당황스러움에 조심히 동석의 눈치를 보며 잡아뗐다.
"이상하네.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아냐 아무 말도 안했어."
"그래?! 이상하네."
다행히 동석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걸로 그냥 넘겨버렸다.
'휴... 자식 다른 쪽에선 둔하면서 귀 하나는 밝단 말이야...'
숙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동민은 편
안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침대에 그냥 벌러덩 누워버렸다. 역시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
았다. 저녁시간이 지났는데도 허기마저 느껴지지가 않았다. 잠시 그렇게 누워 있으니 방문
이 열리며 동석이 얼굴을 내밀었다. 동석은 대충 씻고 나왔는지 얼굴과 머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동민아. 뭐 먹을래? 쉴때 쉬더라도 밥은 먹고 쉬어야지."
"난 별론데... 난 상관 말고 너라도 뭣 좀 먹어. 너 아까 고기 먹고 싶다고 했지? 어.. 그럼
족발이라도 시켜서 먹어. 난 내가 알아서 할게 요즘 24시간 하는 식당들 많잖아."
"그래?! 그래도... 그래 알았어. 그럼 쉬어라."
동석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잠시 짓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문을 닫고 나갔다. 동민은 동석이
나간 뒤로도 한 동안 그렇게 천장만을 보며 누워있었다.
'이 민영. 너.. 여우 좋아하냐?... 아니... 근데 왜 그래. 몰라... 모르겠어. 나도 왜 그러는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그냥.. 그냥 자꾸 눈이 가.. 그리고 눈에서 안보이면 생각이 나...
그게 전분데...정말 그게 전부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동민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혹시... 이런 걸 사랑 이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야... 사랑을 하면 행복하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난.. 난..'
동민은 승희를 떠 올려 보았다. 그리고 승희로 인해 자신이 행복해 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웃는 걸 보면 그 자신도 웃게 되었
고 그녀가 힘이 없어 보이면 신경이 쓰였다.
'하..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건데...'
동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무거나 해야지 이대로 있다가는 머리
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자신에게 온 메일들을 확인하고는 전에 보았던 글들을 이어
서 보고 싶다는 마음에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런데 그 사이트는 승희를 알게 된 그 사이트
였고 거기까지는 동민도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사이트에 접속이 되자 밑 부분에 있는
친구란 글자가 깜빡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동민은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보았고 승희의 ID를 보게 되었다. 동민은 꿈적도 하지 않은 채
승희의 ID만을 보고 있었다.
'차 승희...'
동민은 승희를 떠올렸다. 가끔 자신을 비웃는 듯한 미소, 알게 모르게 불만 있어 보이는 시
선으로 자신을 보던 그녀의 눈빛, 동석을 대하는 것과는 다른 냉랭함, 아무리 생각을 해 보
아도 결론은 하나였다.
'여우는... 날 좋아하지 않아.'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동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날 좋아하지 않아...'
갑자기 오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외면한 여자는 단 한명도 없었는데...
자신이 손만 내 밀어도 그 손을 잡기 위해 날아들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굳이 자
신이 손 내밀지 않아도 자신에게 손 내미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그런데...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보다 더 잘난 여자들도 자신 앞에선 언제나
약한 척하며 자신의 눈에 들어보려고 안간힘을 써 되는데 오직 한 사람.. 오직 단 한 사람.
차 승희 라는 여자만이 자신을 외면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면 자신은 그런 그녀를 생각하며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 고심하고
있다는 것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오고 화가 났다. 아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승희! 두고 봐. 너도 나와 똑같이 만들어 주겠어. 만일.. 만일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것이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정말... 정말...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더 이상 생각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해도 그녀
또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 쉽게 말해 그녀를 유혹한다는 것 너무도 웃기는 일이었다.
천하에 차 동민이 만인이 알아주는 스타 차 동민이...
"훗"
동민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유치하다는 듯 혼자서 그렇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너무 선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정말 이것이 사랑이라면.. 우선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보는 거야. 그녀의 행동처럼 진짜로 나에겐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인지... 그런 다음에..
그런 다음에. 뭘 해도 하는 거야... 그래 어차피 결과는 두 가지 밖에 없으니깐... 상처...
아니면... 연인.'
"상처라... 훗"
자신에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단어...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삐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