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유진이 돈을 구해왔다. 항상 그러했듯이 유진은 하나 뿐인 언니에게 천근같이 무거운 입을 겨우 열어 "이번이 마직막일꺼야." 라고 자신조차 불확실한 부탁을 했을 것이다.
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양친이 모두 떠나버린 현재 자신밖에는 유진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또 받아들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을 것이다.
"처형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윤수는 도저히 직접 인사를 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렇게 유진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돈을 건네는 유진의 얼굴에 이번만은 꼭 실패하지 말아달라는 당부가 어리고 있는 듯 했다.
창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뒤늦게 합류하는 윤수에게는 조금은 낯설고 서먹했지만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항상 의지해 온 강선배가 함께여서 윤수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처음 함께 자리한 윤수가 어색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한 강선배가 다른 동료들 을 윤수 앞으로 불러세웠다. 그리 많지 않은 윤수를 제외한 5명의 창업 동료가 각자의 소개를 간단히 했다.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한 사람, 윤수와의 첫대면에 담담한 무표정을 보이고 있는 그가 사장직을 수행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김태민 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악수를 건네온 사장은 한국전산원에서 전산팀장을 지내고 얼마전 개인사정으로 퇴사를 했다고 했다. 아무도 김사장의 개인사정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지만 왠지 윤수는 왠지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김사장의 제의로 강선배는 세일에서의 경력을 살려 서비스분야를 맡기로 했고 윤수는 홍보와 판매분야를 그리고 김사장 본인 새로운 사업기획을 맡기로 했다. 2000년 5월 1일 회사는 정식 창업을 했고 윤수는 다시 한번 새로운 각오를 불태우고 있었다.
윤수는 회사 홍보에 전력을 다했다. 몇 천부가 되는 전단지를 일일이 거리에 나가 오가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인터넷을 검색해 수도권내 모든 부동산 목록을 뽑아 개업인사와 회사상품소개 DM을 발송했다. 야간에는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을 위해 밤을 세워가며 홈피 내용과 상품 표현에 대해 골몰했다. 틈나는대로 아파트 단지를 돌며 주차된 차량에 명함과 스티커를 꽂아두기도 했고 중소형 회사를 돌아다니며 회사와 상품소개도 게을지 하지 않았다.
피땀어린 윤수의 노력으로 인한 첫번째 결실이 나타났다.
"여보세요. 컴퓨터 회사지요."
점잖은 남자의 음성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무엇을 도와들릴까요."
전화를 받는 강선배의 목소리에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윤수는 강선배의 활기찬 목소리에 반드시라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통화가 끝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강선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모두들 숨을 죽이며 주목하고 있었다.
"첫거래 축하합니다."
강선배의 미소속에 안도와 환호가 함께 묻어났다. 모든 직원들은 첫거래에 함성을 드높였고 예상보다 빠른 반응에 놀라워했다.
"윤수씨 정말 수고했습니다. 모두들 너무나 수고가 많았습니다."
김사장이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앞으로 나섰다.
윤수는 그동안 발품을 팔며 뛰어다녔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에 고무되었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꼴통에서 우등생으로
진수의 도움을 받은 후 나는 무섭게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지나간 방황의 시기를 참회하고 갱생한 수도사의 얼굴을 하고서는 책속의 모든 지식을 놓치지않고 담아두어야 햔다는 의지가 온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처럼 한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달 모의고사가 끝난 후 성적표를 나누어 주던 담임에 얼굴에 무슨 조작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득 품은 표정을 보고 나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 다음 시험에서도 담임의 같은 표정을 발견하고 나는 이것이 진정한 복수라고 짐짓 혼자 대견스러워 했다. 진수는 변해버린 나를 두고 입버릇처럼 무섭다고 말했고 정말로 내가 두려워서였는지 서서히 내 곁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진수가 멀어져가는 만큼 나는 그동안의 꼴통 정윤수에서 인정받는 우등생 정윤수로 변해갔고 진수와 그동안 어울렸던 꼴통부대(담임이 항상 그렇게 불렀던)가 떠난자리에 나를 벌레 보듯하던 담임의 새로운 신뢰와 새로운 상위 그룹의 친구들이 하나 둘 자리를 메워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우월감을 맛보았고 그들의 특권이 얼마나 달콤한가를 세포 하나 하나에 길들이고 있었다. 가끔씩 문득 떠오르는 예전의 모멸감이 나를 진저리치게 만들때면 마치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진공청소기처럼 책속의 지식들을 빨아들여 모멸감을 밀쳐내곤 했다.
학년이 마무리 지어지는 무렵 담임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출석부 모서리로 나를 내려치며 모욕주었던 담임이 아니라 이제는 우등생이 된 정윤수에 합당한 억양과 품격을 갖추어 부드럽고 다정한 담임선생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정윤수 그동안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그래서 내가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아마 잘되기만 하면 큰 도움이 될거다. 학년을 마치면서 각반에서 한명씩 장학생을 추천하기로 했는데 나는 널 추천하기로 했다. 가정형편도 그렇고 성적도 그렇고 우리반에서는 윤수가 가장 적임자인것 같거든, 물론 추천했다고 다 장학생이 되는건 아니고 다시 심사를 하겠지만 윤수 정도면 반드시 뽑힐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알고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해야한다."
담임은 예전 나에게 주었던 모멸감은 다 잊고 화해라도 하자는 듯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그건 온전히 나 혼자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는 담임의 손을 잡으며 '예 잊어드리지요.'라고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담임에 대한 복수에 성공했다라 여기며 스스로 승리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예전의 정윤수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전 회사의 부도로 의기소침하던 정윤수는 이미 없었다. 새로운 성공을 위해서 매진하는 정윤수만이 존재 할 뿐이었다. 윤수는 스스로를 독려하며 뿌듯해 했다. 과거 꼴통에서 우등생으로 변모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