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다. 이제 괜찮다. 너무 머리속에 박혀버려 도무지 꺼내질 것 같지 않던 기억도. 기억은 낡은 편지 종이 같기도 해서 수없이 꺼내보면 이젠 다 머리속에서 꺼내 볼 수도 없을만큼 너덜너덜해지는걸까. 편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사진처럼 머리속에 박혀버렸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쉼표하나, 띄어쓰기 하나, 까맣게 칠한 자국까지,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너는 바다 냄새가 났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산에서는 자꾸 바다냄새가 났다. 내가 산에서 바다 내음이 난다고 할 때마다 너는 계속 웃었지만 나는 ''너에게도 바다냄새가 나'' 하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은 내게는 사랑한다는 말과 같아서 입밖으로 내어버리면 현실이 되버릴 것 같았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끝까지 네게 바다 내음이 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여린 십대들이 다 그런 것처럼 사랑을 해보기도 전에 나는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겠지. 지독히도 외로운 날에는 꽃이 내게 말을 걸기도 하고,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 생각하는데도 눈물이 났다. 누구 손을 잡더라도 내 손은 알아보겠다던 너도 네가 아파할 때 파르르 떨리던 입술도 이젠 괜찮다. 유난히도 추운 날 혼자 버스를 기다려도 닮은 뒷모습에 깜짝깜짝 놀랄 ?에도 이젠 네가 안아주지 않아도. 그 모습이 네가 아니라도. 나는 이제 괜찮아졌다. 널 떠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늘 같은 자리에서 널 기다리곤 했던. 내가 네 곁에 없으면 그 자리를 볼 때마다 날 생각할거라고 결국 내게 돌아오고 말거라고 그렇게 덫을 놓았었는데. 덫에 걸린건 네가 아니라 나였나보다. 나는 그 자리를 지금도 늘 지나가고 늘 생각이 난다. 나는 그저 예전처럼 그 자리에 등을 기대고 섰고 너의 지각을 한번도 탓하지 않았지. 네가 떠나가버린 후에는 네가 아니라 너의 자국이 남았다. 네 자국이 남아버린 자리에는, 남자도 오고 친구도 오고 동물도 왔다. 너란 사람은 내게는 이제 단어가 되어버려 나는 오는 남자들에게 너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너2. 너3. 너4. 너5 가끔은 너2나 너3이 다시 명사가 되버려 너도 남자2 남자3이 되곤 했었다. 나는 하나도 미안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도 미안하지가 않다. 너는 이제 남자1도 아니고 남자2도 아니고 그냥 ''너'' 다. 그리고 너2 혹은 너3이 되었던 다른 남자들도 이제는 남자. 남자. 남자. 남자. 다. 어디 생각할 것이 너뿐일까. 노래해야하는 것이 사랑뿐일까. 좋은 남자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너1이나 너2가 아닌 물론 동물은 더더욱 아닌 정말 ''남자'' 가 올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혹시 나중에 네가 다른 이 2 다른이 3이 되더라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길빈다. 그리고 다음번에 만나면 꼭 말해줘야겠다. 너한테는 바다 냄새가 났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