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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상인을 보고...

박광일 |2006.05.18 18:42
조회 60 |추천 0
오늘은 섹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을 각색한 마이클래드포드 감독의 베니 스 상인을 봤다. 전반적으로 원작을 잘 살리면서 그 당시 유대인의 실상을 잘 드러내 보 이고 유대인의 시각에서 원작을 재해석 측면이 눈에 띄었다. 이야기 줄 거리는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유대인 샤일록을 둘러싸고 있 는 그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 대해서 얘기해 볼가 한다. 영화에서 샤일 록을 사람들이 부를때 이름보다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유대인’의 사 회적 이름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십자가에 죽인 더 러운 민족이여 고리대를 통해서 돈만 탐닉한 나쁜 사람들이다. 토지소 유가 금지되어 있는 유대인들이 주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죄악시 되었 던 고리대금업자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 고 있다. (영화에서는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를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아니라 내레이션을 통해 역사적 배경을 설 명하고 있다.) 유대인 샤일록이 안토니오를 법정에 세우고 그에게 ‘분 노’하여 살 1파운드 요구하는 ‘잔인한 모습’만 비칠 뿐이지 왜 샤일록이 안토니오에게 ‘분노’했는지 그런 잔인한 요구를 했는지에 대해선 대다 수의 기독교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샤일록은 예수님을 죽인 무자비한 유대인들의 후손답게 ‘별일도 아닌’ 일 가지고 ‘잔인한 요구’만 하는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비칠 뿐이다. 소설에서 설 명하지 않은 샤일록의 분노의 이유는 영화에서 어느정도 설명하고 있 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부당한 모욕과 멸시를 받았다. 단지 ‘유대 인’이란 이유로 말이다. 그런 말같지도 않은 모욕을 받으면 대부분 사람 들이 샤일록처럼 ‘분노’하게 되고 모욕을 한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할 것 이다. 물론 샤일록의 살 1파운드의 요구는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샤일 록이 살아왔을 동안 당했던 수 많은 차별과 멸시등을 감안하면 동의는 하지 않지 만 이해는 될 대목이다. 그러나 샤일록의 부당한 요구는 ‘피 한방울’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행해지라는 판결로 집 행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재판 판결이 어느정도 상식적으로 이해되 고 명판결이지만 그 다음 판결은 ‘법의 이름’을 가진 기독교들의 잔혹 한 보복이었다. 피를 흘리면 살인에 처하고, 샤일록이 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의도적으로 살인을 했다는 죄까지 덧붙여서 샤일록의 재산을 베니스와 안토니오에게 귀속시키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판결을 한 다. 많은 사람들은 ‘명판결’에 기뻐하며 ‘피해자’ 샤일록은 주저앉고 자 기를 모욕한 ‘가해자’ 안토니오에게 용서를 구걸하게 된다. '피해자‘ 안 토니아는 ’가해자‘인 샤일록을 용서하면서 자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순 식간에 원고와 피고 뒤바뀐 베니스 재판장은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 자를 법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공간으로 바뀌게된다. 사회적 약자인 샤 일록은 법의 이름을 빌려서 사회적 강자가 보여준 모멸과 차별에 단 죄하고 저항하려고 했지만 역시 동서고금을 떠나서 법은 사회적 강자 의 편이었다. 법은 샤일록의 못된 일만 처벌하는 데 주력했지 샤일록 이 지금까지 안토니오에게 겪었던 수많은 모역과 차별 그리고 더 나아 가서 많은 사람들이 샤일록에게 행해졌던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는 어 떠한 이해도 반성도 없었다. 유대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 정 도로 치부했던 것이다. 사회적 약자인 샤일록은 사회적 강자인 안토니 아를 용서하지 안했다. 자기가 빌린 돈의 2배 또는 10배를 가져 와도 샤 일록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를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마음의 상처는 컸던 것이다. 그럼 점에서 돈만 아는 유대인 샤일록의 편견은 여지없이 깨진다. 그는 돈보다 자신의 명예를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자기를 죽일려고 했던 유대인 샤일록을 하느님 의 이름으로 쉽게 용서해 줬다. 그에게는 샤일록이 겪어야 할 차별의 상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의 자비의 모습 속에 숨겨져 있는 일상적인 차별은 곧 잔인한 분노를 낳게 되고 샤 일록의 부당한 요구를 낳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는 샤일록의 부당한 요구와 그에 대비한 안토니오의 자비로운 용서만 부각될 뿐이지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안토니오와 샤 일록의 관계에 내포되어 있는 사회구조적 차별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았다. 힘을 가진 강자가 보여준 알량한 자비의 모습이 힘이 없는 약자가 보여준 잔인한 분노보다 아름답지 못하고 감동적이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에서 유대인에게 경멸한 많은 사람 들에게 샤일록은 이렇게 절규한다. ‘나도 심장, 폐, 간장, 신장등이 있는 사람이고, 병이 걸리면 아플 수 있다. 너희 기독교인처럼 분노, 증오, 슬픔과 같은 감정이 있는 인간이다. 너희들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말이야’ 샤일록의 당연한 얘기는 기독교들인들은 샤일록이 유 대인이라는 편견 속에서 한귀로 흘러 보냈다. 유대인이란 원래 그래 식으로 유럽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유대인은 항상 차별 받는 존재였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해서 고 리대금업자와 상인 될 수밖에 없는 데도 돈만 안다고 욕을 얻어 먹고, 게토란 유대인 거주지 역 안에 갇혀 살았으며, 홀로코스트란 대재앙을 겪었다. 이 세상에 차별받는 존재는 유대인 만 아니다. 우리 한국사회 주변에도 너무 많은 '유대인'이 존재한다. 영화속에 샤일록이 자기 이름보다 힘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명명한 ‘유대인’이라고 불렀듯이 그들 또한 자기 존재보다 ‘000’란 강자가 명명했던 사회적 존재로 인식한다. 게토에 유대인에 갇혀 살았듯이 그들 또한 한국사회에 눈에 보이지 않은 게토에 의해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채 무능력자로 낙인 찍 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채 갇혀 살고 있다. 안토니오가 쉽게 샤일록을 용서했지만 샤일록 은 안토니아를 용서하지 못했듯이 우리 속에 유대인 또한 그들을 차별한 사람들을 쉽게 용서 하지 못한다. 그러나 차별한 사람들은 그들의 분노를 쉽게 용서한다. 그런데 정작 차별당하 고 있는 자의 분노가 자기 자신들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잘 모른다. 샤일록이 기독교인들에 게 했던 절규가 한국사회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 의 차별은 인식하고 문제인식을 가지면서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자신들이 차별하는 ‘제2의 유대인’들은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그래서 문제이다!!! 기독교와 유대인 등 종교, 민족적 차별을 떠나서 그 차별적인 사회 상황에 처하면 똑같은 인 간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분노를 광기라고 묘사한 섹스피어의 시각은 그 당시 영국인 의 시각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내재한 ‘제2의 유대인’들을 보는 우리의 사회 의 시각이기도 하다. 한걸음 나가서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 보편적 시각이기 도 하다. 베니스 상인에 나온 ‘유대인 샤일록’과 ‘기독교인 안토니오’ 두 이름에 빈 괄호를 쳐 놓 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한번 대입해 보자. 내가 한국사회에 어디에 속하는지 말이다. 유대 인 샤일록이냐 기독교 안토니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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