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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사람

채현욱 |2006.05.26 22:23
조회 115 |추천 0
    수연(水然) 스님 ! 그는 정다운 도반이요, 선지식이었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입으로 말하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그런 사람이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그는 사소한 일로써 나를 감동케 했던 것이다.

수연 스님 ! 그는 말이 없었다. 항시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를 1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잊혀지지 않는 얼굴(象) 이다.

1959년 겨울, 나는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혼자 안거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래야 삼동(三冬) 안거 중에 먹을 식량과 땔나무, 그리고 약간의 김장이었다. 모시고있던 은사 효봉선사가 그 해 겨울 네팔에서 열리는 세계 불교도 대회에 참석차 떠나셨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력 시월 초순 하동(河東) 악양(岳陽)이라는 농가에 가서 탁발을 했다. 한 닷새 한 걸로 겨울철 양식이 되기에는 넉넉했었다.

탁발을 끝내고 돌아오니 텅 비어 있어야 할 암자에 저녁 연기가 피오 오르고 있었다.

걸망을 내려 놓고 부엌으로 가보았다. 낯선 스님이 한 분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나그네 스님은 누덕누덕 기운 옷에 해맑은 얼굴,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합장을 했다. 기운 옷에 해 맑은 얼굴,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합장을 했다.

그때 그와 나는 결연(結緣)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맺어질 수 있는 모양이다. 피차가 출가한 사문(沙門)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리산으로 겨울을 나러 왔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반가웠다. 혼자서 안거하기란 자유로울 것 가지만, 정진하는 데는 장애가 많다. 더구나 출가가 연천(年淺)한 그 때의 나로서는 혼자 지내 다가는 잘못 게을러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월 보름 동안거(冬安居)에 접어드는 결제일(結制日)에 우리는 몇 가지 일을 두고 합의를 해야만 했었다. 그는 모든 일을 내 뜻에 따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진하는 데는 주객이 있을 수 없다. 단둘이 지내는 생활일지라도 둘의 뜻이 하나로 묶어야만 원만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전혀 자기 뜻을 세우지 않았다. 그대로 수순(隨順)하겠다는 것이다. 육신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모자랐지만, 출가는 그가 한 해 더 빨랐다. 그는 학교 교육은 많이 받은 것 같지 않았으나 천성이 차분한 인품이었다.

고향이 어디이며 어째서 출가했는지 서로가 묻지 않는 것이 승가(僧家)의 예절임을 아는 우리들은 지나온 자취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언행이나 억양으로 미루어 고향과 출신지를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나처럼 호남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소화 기능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나는 공양주(供養主 ; 밥짓는 소임)을 하고 그는 국과 찬을 만드는 채공(菜供)을 보기로 했다. 국을 끓이고 찬을 만드는 그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시원치 않은 감일지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감로미(甘露味)가 되었다. 나는 법당과 정랑의 청소를 하고 그는 큰방과 부엌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한 끼만 먹고 참선만을 하기로 했었다.

그 때 우리는 초발심한 풋내기 사문들이라 계율에 대해서는 시퍼랬고 바깥일에 팔림이 없이 정진만을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 해 겨울 안거를 우리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아무런 장애 없이 순일 하게 안거를 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듬해 정월 보름은 안거가 끝나는 해제일(解制日). 해제가 되면 함께 행각을 떠나 여기저기 절 구경을 다니자고 우리는 그 해제일을 앞두고 마냥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해제 전날부터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찬물로 목욕한 여독인가 했더니, 열이 오르고 구미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자꾸만 오한이 드는 것이었다. 해제는 되었어도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산에서 앓으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사문은 성할 때도 늘 혼자지만 앓게 되면 그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감촉된다.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에 의료기관도 없다. 그저 앓을 만큼 앓다가 낫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철저하게 무소유였다. 밤이면 헛소리를 친다는 내 머리 맡에서 그는 줄곧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끓여 오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갈아주느라고 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잠깐 아래 마을에 다녀오겠다고 나가더니 한낮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기울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쑤어둔 죽을 저녁까지 먹었다. 나는 몹시 궁금했다.

밤 열 시 가까이 되어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 새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의 손에는 약사발이 들려 있었다.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약을 마시라는 것이다.

이때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의 헌신적인 정성에 나는 어린애처럼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 암자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래야 40여 리 밖에 있는 구례 읍이다. 그 무렵의 교통수단이라고는 구례 장날에만 장꾼을 싣고 다니는 트럭이 있었을 뿐. 그러니까 그날은 장날도 아니었다.

그는 장장 80리 길을 걸어서 다녀온 것이다. 서로가 돈 한푼 없는 처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구례까지 걸어가 탁발을 하였으리라. 그 돈으로 약을 지어온 것이다. 머나먼 밤길을 걸어와 약을 달였던 것이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나는 평생 처음 온 심신으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도반의 정(情)이 어떤 것인지도 비로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법정스님 [무소유]中 "잊을 수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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