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矛盾_수심을 향하여

노윤미 |2006.06.10 06:55
조회 21 |추천 0


-prologue


천천히 잠겨 들어간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감싸인다.

손이 나를 눌러 내린다.

혹은 아래서부터 끌어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드럽고도 잔인한 손길.

잠시 멈춘 듯 한 착각 속에 감긴다.

착각이 아닌가?

알 수 없다.

눈앞이 희뿌옇게 물든다.

안개, 안개 속으로.

혹은 내 기억 한 켠에 있을지 모르는 따뜻한 곳-어쩌면 따뜻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으로 잠기어 간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그 때….


심장 박동 소리가 울린다.

내 심장 박동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늑한 느낌, 고요하고도 서글픈.

존재하려, 태어나려, 그리고 힘차게 울부짖기 위하여 열 달 동안 준비해야 했던, 그 곳인가.


존재와 존재치 않음의 갈림길.

그 기로에 선 것인가.



* * *



망상을 하는 내 손 끝에 단단한 것이 닿는다.

상념이 흩어진다.

망상도 흩어진다.

몇 번이나 왕복했던가-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아제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발을 디딘다.

그리고 조금은 억지스럽게.

두 발로 걸어야 함을 문득 다시 상기한다.

수영장의 물들이 서로 둥글게 뭉친다.

그리곤 내 몸 위를 흐른다.


밤에 보는 차창 밖의 풍경은 싸늘하고도 아늑하다.

내가 진실로 볼 수 있는 풍경.

단 하나의, 유일한 그 풍경.

아득하게 먼 곳을 바라본다.

잠시도 나에게 머무는 것은 없다.

단지 스쳐지나간다.

가로등도 스쳐지나간다.

하나, 둘, 셋, 넷….

세어본다.


웃기는 일이다.

사람들은 참 괴상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세야만 한다.

수치화 해야만 한다.

몇 센치, 몇 번, 몇 점, 몇 원….

그러나 내가 보기엔 ‘숫자’라는 것을 함부로 만들 사람은 없다.

아무도.

그 누구도.

단 한명도.



*



종이 울린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를 거쳐 이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순종을 배웠다.

종이 울린다.

다시 순종한다.

몇몇은 비웃듯 아랑곳 않고 있다.

고함 소리가 흩어진다.

창 밖은 파랗다.

분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머릿속을 서서히 복잡한 수식들로 메워간다.

손만이 그것을 힘겹게 따라 적고 있다.

바람이 햇살을 업고는 한 명 한 명을 간질인다.

40명의 채취와 체온이 고스란히 녹아든다.

바람은 사그라들고 만다.

더러는 키득거리며 그들만의 무엇을 나눈다.

알 수 없는 한가로움.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쉰다.

이제는 더 이상 달구어지지도 않는다.

숨 막히는 열기.

잠시 멈춘 듯한 착각이 찾아온다.

그 정지됨, 그 고요가 나를 밀어 낸다.

힘겹게 발버둥친다.

살기를 강구하는 목이 매인 사형수처럼.

다시 선생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화면이 흘러간다.

나는 밀려난 내 존재를 잊는다.

그리고 같이 흘러간다.


그 곳에는 단지 40개의 통조림이 존재할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같은 통 속에 같은 참치 살코기.

방부제가 듬뿍 들어간 상태로 구겨 넣어진다.

불량품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받아 삼킨다.



* * *



사람들은 그런데도 자기가 잘난 줄 안다.

그들은 자꾸만 수치화하고 자꾸만 수치로서 창조하려 한다.

시간을 줄여야지.

생산성이 너무 낮아.

이 수치 좀 봐.

월급 줄어드는 꼴 보고 싶어.

꾸역꾸역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만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꾸만 먹어치운다.

아무 것도 만들 줄 모르는 바보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시도 ‘수치’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이 스친다.

차창 밖 그 불빛에서, 왠지 모를 따가움이 느껴진다.



*



마지막 수업이 끝난다.

쫓겨나오듯 학교를 빠져나온다.

무언가 나를 누르는 기분이다.

아랑곳 않는다.

다시 나는 창문도 없는, 네모난 상자 속에 갇힌다.

낯설지 않은 풍경.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된다.

감각을 잃은 채 얼굴이 없는 얼굴.

모두 다 같다.

나도…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는 가면 뒤에 숨는다.

가면은 너무나 거대하다.

숨는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가면에 눌리어 나조차 잠식되어 버렸다.

그 표현이 옳을 것이다.

가면 밖의 세상, 가면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가면이 가리어 버린다.


수업시간에 딴 생각하지 마세요. 시험 얼마 안 남았는데.


가면은, 나도, 그 무엇도 다 가리고 있다.

모든 것이 감춰진 정적.

나는 그 속에 존재한다.

혹은 그 밖일지도 모른다.



* * *



뉴턴은 참 바보 같은 사람이다.

사과는 왜 꼭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가.

위로 날아가 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대로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가.

바보 같은 일이다.

꼭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사과더러 떨어질 운명이란 걸 꼭 말해줬어야 했는가.

어쩌면 뉴턴이 그렇게 말 해 버렸기 때문에 사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사과나무나 심겠다니.

잔인한 사람이다, 그는.


바보 같은 소리다.

말한다는 것은.

태초에 사람이 다세포 생물이 된 것도.

진화하여 언어를 위해, 말하기 위해 직립 보행을 택한 것조차도.

규정짓고 정의하는 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류는, 사람은 조상 대대로 어리석다.


버스가 흔들린다.

따가운 가로등 불빛도, 머릿속 상념도.

그 흔들림과 함께 멀미가 방문한다.

삐이-.

버스에서 내린다.



*



그렇게 나를 집어 삼킨 학원 문을 힘겹게 열어젖힌다.

수많은 무표정들이 어둠에 휩쓸려간다.

나도 휩쓸려 나온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 속으로 뛰어든다.

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무언으로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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