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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찾자

김성수 |2006.07.01 23:59
조회 42 |추천 2

지난 해 말 일본에서 발견된 김시민(1554~1592) 장군 공신교서를 되찾아 오기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진다.

 

 

진주문화사랑모임(회장 리영달)은 최근 시내 도로변에 "일본으로 간 우리 문화재 '김시민 장군 교서'는 진주시민의 품으로 와야 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고 모금운동에 나섰다.

 

이 단체는 오는 19일 오후 진주시내 차없는 거리에서 거리모금운동도 벌일 예정이다. 리영달 회장은 "공신교서 되찾기 모금운동은 문화방송 와 공동으로 벌이게 된다"면서 "2억원 정도가 필요한데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하게 되고 진주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자는 차원에서 적극 나서게 되었다"고 말했다. 리 회장은 "우리 문화유산 찾기운동을 벌이고 있는 제작팀과 7월15일 이전까지 우리나라로 되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협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는 2005년 11월 일본 동경의 경매물 도록에 사진이 실리면서 공개되었고, 교토대 김문경 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전문위원 등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공신교서는 선조가 1604년 진주성 싸움 등 공적을 치하하면서 노비와 토지 등을 하사한 내용의 기록서다. 가로 226cm, 세로 37.2cm 크기다. 비단 두루마리에 붓글씨로 "경상우도병마절제사 겸 진주목사 김시민을 선무 2등 공신으로 추증하고 부모·처자에게도 작위를 내리며 죄를 범해도 영원히 사면한다, 상으로 노비 9명, 밭 80결, 왕의 말 1필 등을 하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공신교서는 지난 해 11월 도쿄 고서점가에 경매로 나왔으며 한 일본인 고서적상이 1200만엔 안팎으로 낙찰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시민 장군은 어떤 사람인가.

 

임진왜란 당시 3대첩(三大捷) 중 하나인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 진주시에 있는 김시민 동상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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