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여차례의 외침을 받으면서 역사상 단 한번도 온전한 독립국가로서 서 본적이 없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부강한 나라'에 대한 희망은 그 어느나라 국민보다 간절하다.
이러한 집단적인 염원은 임진왜란과 일제시대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의병들이 일어났던 것과 같이, '타국'과의 마찰이나 '경쟁'의 사안이 생길 때 마다 [애국주의]로 똘똘 뭉쳐져서 엄청난 힘을 발산시키기에 이르른다.
얼마전까지 월드컵 16강을 기원하면서 국민들이 보인 폭발적인 응원분위기 역시 그 하나의 모습이다.
문제는 한국적 [애국주의]는 비합리적인 감성에 휘말리는 경향이 있어서 '특정한 분야'에 국한하거나 '한번 불붙을 때는 겉잡을 수 없지만 식으면 아예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건강한 [애국주의]라고 할라치면 [일상생활에서 항상성]을 가지고 나라와 국민을 위한 그 마음을 [기초적인 실천]에서부터 이뤄야 할 것이지만, 한국인의 [애국주의]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
비근한 예로 2002년 한국이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세계의 조명을 받을 때는 '쓰레기 한장도 나오지 않는 깨끗한 응원문화'로 이목을 받았지만,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리면서 세계의 이목이 방향 전환을 하자 바로 응원문화가 도마위에 올랐다.
이는 88년 올림픽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올림픽 기간중에는 쓰레기 하나 거리에 보이지 않았지만, 올림픽 전후에는 쓰레기와 낙서가 천지를 뒤덮여서 오죽하면 '쓰레기강산'이라는 오명이 붙여질 정도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를 의식하고 열심히 하지만 그 시선이 거둬지면 그 책임감과 성실성이 힘을 잃는, 특이한 [애국주의]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리퀘스트'같이 감성적으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이웃과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국민성과도 연관되는 것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그러한 방송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방송을 통해서 감성을 자극 안해도 [논리적 이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정 비율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성]을 가지고 '정기적'인 후원과 봉사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보여주면서 눈물을 작극'해야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보여지는 것'만을 의식하고 '보는 것'만을 인식하는 [감성적 애국주의]를 가진 한국인들이 국내외적인 [위기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월드컵'에만 그리 열광할 수 밖에 없었음은 필연이었다.
이러한 [감성적 애국주의]가 불러일으킨 일방적인 '몰입'은 다른 분야로 흘러들어가야할 건전한 관심과 집중을 송두리째 빨아갔던 것이다.
'다른 분야로 흘러들어가야 할 건전한 관심'에 대한 지리멸렬한 설명은 생략하고 '월드컵 도중에 보여진 일방적인 몰입'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이었는지 우리는 특이한 경우 하나를 통해서 살펴보자.
우리 국민들은 그간 4년간 월드컵을 학수고대해왔다.
선수들의 멋진플레이를 접하면서 동시에 세계인들로부터 '한국인들 대단하다' '최고의 응원문화를 보여준다' '응원 끝나고 쓰레기도 잘 주워간다' '과히 환상적인 국민들이다'는 조명을 받으며 우쭐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월드컵이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토고와 프랑스와의 대전을 마치고, 스위스전에 임하는 국민들의 자세는 선수들의 그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이기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감성적 애국심] [자긍심] [과도한 경쟁의지] [집착]으로 혈안이 되어서 스위스의 경기에 몰입을 하던 국민들은 경기중에 미묘한 상황을 접하게 된다.
스위스 공격수가 한국의 수비라인 뒷부분으로 침투하는 순간, 부심이 업사이드 깃발을 들어올렸을 때 한국선수들은 당연히 경기가 중단될 줄 알고 어슬렁거렸지만, 주심은 경기를 진행시켰고 결국 결정적인 한 골이 들어간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여러방송사에서는 스위스 선수가 분명한 업사이드라며 한골을 도둑맞았음에 대해서 울분을 토로했다.
하지만 신문선 해설위원은 '업사이드 아니고 골이 맞다'면서 선수들이 경기에 몰입해서 만회골을 터트려야할 것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 [감성적 월드컵 애국주의]에 몰입하고 있던 한국민들의 반응은 특이한 것이었다.
자신이 믿는 바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따져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스스로 믿는바에만 매달려서 현실을 왜곡하는 한국민들의 특징 하나를 우리는 그 반응에서 접하게 된다.
사실 차두리의 주심 판정에 대한 '이건 사기입니다' 는 발언은 우리의 궁지에 몰려서 답답한 심정을 속 시원히 풀어주기는 했다. 하지만, '감정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것'과 '진실'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숙고했어야 한다.
그러나 (평소에 훈련이 안돼 있어서)그러한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볼 필요를 못느끼던 상당수의 국민들은 차두리 류의 시원스러운 표현이 주는 카타르시스에만 반응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업사이드 맞다'고 표현한 신문선위원은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신문선 해설위원의 잘못은 '국민들이 듣고싶어하는 말'이 아닌 전문가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설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그렇게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어서 월드컵 중계 중에 불명예 스럽게 중도하차게 되었다.
그렇담 신문선의 관점은 무엇이었던가?
1. 우선 현재의 FIFA 규정으로는 '주심'은 '부심'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부심이 업사이드 깃발을 올렸다고 하더라도 무시하고 경기를 진행시킬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2. 또한 업사이드 선을 넘었다고 해서 무조건 업사이드가 아니라, 주심의 '재량권'으로 적당히 넘어간 것은 봐 줄수도 있는 것이다.
3. 또한 오판할 수 있는 것도 심판의 고유 권한이다.
따라서 이 세가지의 것만 따져보더라도 '신문선위원'은 '냉철하게' 문제를 살핀 것이었다.
다만 스위스전의 심판이 그 '재량권'을 스위스에 유리하게 이용한 것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국제사회가 가진 자들에게만 유리하게만 국가위계가 편성되는 특성에 의한 편파성이지, 신문선위원의 해설 내용과는 전혀 하등의 관계가 없는 독립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편파성]은 월드컵 기간중에 축구에 대한 집중으로 국민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한미 FTA문제의 본질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나라의 문제에 [애국적 관심]을 가지면서 한미 FTA 등을 통해서 국제사회가 어떻게 '힘있는 자에 맞게 세계가 편성되지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접할 기회가 있는 이였다면 심판의 재량권 남용에 대한 명확한 관점(그럴수도 있구나)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과도하게 감성에 휩쓸려서 '듣고 싶어하지 않은 해설멘트'까지를 한 범벅으로 뭉뚱그려서 신문선 해설위원을 마녀사냥의 표적으로 삼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업사이드가 아닐 수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고, 신문선 해설위원의 냉철함을 지지하는 글들도 상당수 떠돌고 있지만, 중요한 순간에 국민의 [감성적 애국심]에 상처를 낸 신문선 해설위원이 과연 방송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민들이 논리적으로는 신문선을 받아들일지는 몰라도 상처받은 감성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애국'을 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의 감정이 지시하는 곳만을 충실히 찾아갈 일이 아니다. 감정과 욕구... 재미와 성취감만이 느껴지는 '애국'은 빈 껍질일 뿐이다.
논리와 이성이 바탕이되고 생활속의 실천이 동반되는 항성성을 가진 애국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2006년 6월의 하늘 아래 우리가 목청껏 왜쳤던 그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