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이름 헷갈리지 마세요. 연락 없이 맘대로 가도 안 돼요."
22일 오전 9시40분 을지로입구역 부근의 지하철 배송 업체 '조은사람들' 사무실에선 회사 대표 임석권(48)씨가 20여 명의 노인을 상대로 주의 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들 중 희끗희끗한 머리에 인상이 온화한 민희원(67)씨가 있었다. 지하철 배송일을 한 지 8개월째다. 오전 10시 민씨의 일이 시작됐다. 명동의 의류매장에서 옷을 받아 중계역 의류점에 전달하는 것이다. 그의 발걸음은 무척 빨랐다.
낮 12시40분. 1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향했다. 한강을 건널 때쯤 민씨의 옛날 얘기가 시작됐다. "라면회사에 나무젓가락을 대는 사업을 했지. 돈도 좀 만졌는데 어음 한번 잘못 돌렸다 부도가 났어. 빚쟁이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렸지." 이자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1995년 미술관 관리원으로 취직했다. 62세에 관리원을 그만두고 경비 용역 회사에 취직해 3년간 건축자재 창고 등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다. 65세를 넘기면서 경비를 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하철 배달이었다.
"지하철 배달을 하겠다는 노인 10명 중 절반이 한 달을 넘기지 못해. 건강이 안 따르거나 체면 때문이지. 한 번만 체면 벗어던지면 그 다음부터는 쉬운데."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도착했지만 배달 장소에 착오가 생겨 20분을 헤맸다. 옷을 받을 수선 집은 구로디지털단지 역 부근에 있었다. 을지로입구역과 여의나루역을 거쳐 구로의 수선 집으로 와 옷을 찾았다. 오후 6시30분. 롯데 노원점으로 다시 가야 한다. 얼마나 버는지 궁금했다. 한 달 월급은 75만원. 올해 64세인 아내도 여섯 살 난 손자가 유치원에 간 사이 다른 아이를 돌봐주고 25만원을 번다고 한다. 부부는 함께 30만원을 저축하고 나머지는 용돈 등으로 쓴다. "자식들에게 손 벌릴 일이 없고 손자.손녀에게 장난감도 사줄 수 있으니 된 거지."
노원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42분. 민씨가 뛰기 시작했다. 폐점 시간인 오후 8시까지 배달을 끝내야 해서다. 노원점 5층 닥스 매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50분. 평소보다 한 시간이 늦었다. 일을 마친 안도감 때문일까. 그의 모습이 지쳐 보였다. 4호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헤어지며 언제까지 일을 할 것인지 물었다. "걸어다닐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어. 집에만 있으면 이상하게 아프거든." 이날 배달한 의류는 9점, 수금한 돈은 5만원, 거쳐간 지하철역은 121곳이었다.
◆ 특별취재팀=송상훈 팀장, 정철근.김정수.김영훈.권근영 사회부문 기자, 염태정.김원배 경제부문 기자, 김은하 탐사기획부문 기자, 조용철 사진부문 부장, 변선구 사진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