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1. 수영역사(水泳歷史) SWIMMING HISTORY

박장호 |2006.07.21 08:49
조회 144 |추천 0


수영역사(水泳歷史) SWIMMING HISTORY 팔과 다리의 움직임 및 몸의 자연적인 부력(浮力)을 이용하여 물을 체치고 나가는 레크레이션이자 스포츠, 수영은 전신운동으로 인기가 높고 특히 치료효과가 탁월하여 신체장애자들에게 적합한 운동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인명 구조의 목적으로 배우기도 한다. [역사] 고고학적 유물을 살펴보면 이미 BC 2500년 이집트에서, 그 후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 수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수영은 군사교육의 일부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교육과 함게 남자들을 위한 기초교육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동양에서는 수영이 늦어도 1세기에는 시작되었으리라는 것을 , 그 당시 일본에서 수영경기가 벌어졌다는 증거를 보아도 할 수 있다. 17C에는 칙령으로 학교에서의 수영교육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조직화된 수영시합은 19세기 일본이 서구에서 문호를 개방하기 이전에 열렸다. 문자사용 이전에 해양민족들은 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울 무렵부터 수영을 가르쳤다. 그리스에서 가끔 수영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 유명한 권투선수는 훈련의 일환으로 수영을 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목욕탕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수영장을 건설했다. BC1세기 경에는 마에케나스가 최초의 온수(溫水)수영장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앵글로색슨족의 영웅인 베어울프가 완전무장을 하고 수영을 하면서 적을 무찔렀음을 자랑하는 서사시와, 전설 속의 인물인 레안드로스가 그의 연인인 헬로를 만나기 위해 헬레스폰트까지 헤엄쳤다는 전설이 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수영이 행해지지 않았는데, 이는 수영이 전염병을 일으키고 퍼뜨린다는 공포 때문이었을 것으로 일부 권위자들은 설명한다. 17세기 말에는 영국의 해변휴양지에서 물치료(water therapy)와 관련하여 수영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어서야 레크리에이션 및 스포츠로서 수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37년 최초의 수영단체가 런던에서 청설되었을 때 런던에는 다이빙대를 갖춘 6개의 실내수영장이 있었다. 1846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세계최초의 수영대회가 440야드 코스에서 열렸으며 이후 대회는 해마다 개최되었다. 1869년에 창설된 메트로폴리탄 수영 클럽은 후에 영국 아마추어 수영을 관장하는 아마추어 수영협회가 되었다. 1882~89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전국적인 수영연맹이 결성되었다. 미국에서는 1888년에 창설된 아마추어 경기연맹에 의해 전국적으로 수영이 처음 스포츠로서 조직화되었다. 1890년대에는 뉴질랜드와 뉴사우스 웨일스에서 전국 규모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1909년 오스트레일리아 아마추어 수영협회와 국제 아마추어 수영연맹(FINA)이 창설되었다. 경영(競泳)은 1896년 근대 올림픽대회의 시작과 더불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국제적으로 부각되었다. 올림픽 대회 수영경기는 처음에는 남자선수들만이 참가했으나 1912년부터는 여자경기도 추가되었다. FINA가 창설되기 전에는 올림픽 대회에서 몇개의 별난 수영경기가 포함되었다. 1896년 대회에서 그리스의 피레에프스 항(港)에서 승선한 선원들의 100M 경기가 열렸고, 프랑스의 센강에서 열린 1900년 대회에서는 배의 돛대와 밧줄을 기어오르고 배 및으로 헤엄쳐가는 것을 포함한 200M 장애물 경기가 있었다. 1896~1904년에 열린 그 밖의 수영경기로는 4,000m, 1마일, 멀리뛰어들기 등이 있었다. 그러나 FINA가 경기를 주관하게 되면서 이런 괴상한 경기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FINA가 제정한 규칙에 따라 올림픽 대회 및 세계 경기대회의 경기거리는 점차 미터 단위로 측정하게 되었고 1969년에는 세계대회에서 야드 단위의 로 기록하는 것을 폐지하였다. FINA에서 공인한 영법(泳法)으로는 자유형(crawl), 배영(backstrock), 평영(breaststrock), 접영(butterfly strock) 등 4종류가 있다. 개인 혼계영(混繼泳)에서는 4종류의 영법이 모두 이용된다.(각 영법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함). 올림픽 대회와 세계대회에서 자주 우승을 하는 국가는 헝거라, 덴마크,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일본, 미국 등이다. [교육, 훈련] 최초의 교육프로그램은 19세0기 영국에서 운동 및 인명 구조의 목적으로 마련되었으며, 이프로그램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답습되었다. 미국에서는 인명구조를 목적으로 수영교육이 1916년 미국 적십자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중 각 군부대에서 실시한 수영교육프로그램은 수영을 보급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지역단체들과 학교들이 수영강습을 실시하는 일이 일반화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아주 아이들까지도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초기에는 연습시간마다 될 수 있는 한 많이 헤엄치는 단순한 방법이었으나,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인터벌 트레이닝과 반복 트레이닝으로 훈련방법이 바뀌었다. 인터벌 트레이닝은 휴식시간을 조절하면서 같은 거리를 여러번 헤엄치도록 구성되어 있다. 주로 지구력의 배양을 위한 슬로 인터벌 트레이닝의 경우는 휴식시간이 정해진 거리를 헤엄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짧고, 주로 스피드를 기르기 위한 패스트 인터벌 트레이닝의 경우는 심장 박동과 호흡의 거의 정상으로 회복횔 수 만큼 충분한 휴식을 준다. 국제대회의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50M 길이의 풀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된다. 훈련 성과와 경기력 향상에 도움을 준 또 다른 설비로는 수영장의 물결을 감소시켜주는 홈(wave-killing gutter), 선수들끼리 엉기는 것을 방지해주는 레인 표시, 수중에서의 스트로크를 연구하기 위한 수중 카메라, 선수들이 수영을 하면서 볼 수 있는 대형시계, 전자계시장치 등이 있다. 1972년부터 모든 세계기록은 1/100초 단위로 표시되고 있다. [영법] 초기에 사용된 영법은 횡영(siderstroke)과 평영이었다. 횡영의 경우는 처음에 두 팔을 모두 물에 담그는 영법이었으나, 19세기말로 접어들면서 양팔을 교대로 물 밖으로 내놓고 내뻗는 영법으로 바뀌었다. 경영에서는 자유형이 횡영을 대신하게 되었으나, 인명구조나 레크리에이션에서는 여전히 횡영이 이용되고 있다. 횡영을 할 때는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고 양팔을 교대로 젓는다. 다리 동작은 양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발끝을 세운 채 아래쪽 다리는 뒤쪽으로 위쪽다리는 앞쪽으로 천천히 벌리는 가위차기를 한다. 평영은 가장 오래된 영법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경영에서뿐만 아니라 레크리에이션과 인명구조에 이용된다. 이 영법은 물살이 센 곳에서 특히 효과적이다. 17세기 말에 이미 이 영법은 좌우 대칭적인 다리의 움직임과 함께 팔을 끌어당기는 동작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되었고, 이 동작이 개구리가 헤엄치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개구리차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얼굴을 수면에 대고 양팔은 항상 물 속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초기의 평영은 개구리차기가 끝나는 순간 미끄러져나가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경영 선수들은 그런 식으로 미끄러져나가는 것을 피했다. 초기에는 팔 동작을 시작할 때 호흡을 했으나 나중에는 팔동작이 거의 끝나는 순간 호흡을 했다. 경기에서만 이용되는 접영은 팔 동작에서 평영과 다르다. 접영에서는 팔을 수면 위에서 앞으로 움직인다. 이 영법은 1933년의 한 대회에서 헨리 마이어스가 선보임으로써 미국 수영관계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이어스는 자신의 영법이 그 당시 규정되어 있던 평영 규칙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당기간 논란을 거친후 접영은 인정받았다. 처음에는 평영의 개구리차기가 이용되었으나 다리를 상하로만 움직이는 돌핀킥으로 바뀌었다. 후에 접영 선수들은 1번의 팔 동작을 할 때마다 2, 3번째 스트로크마다 머리를 들어 호흡을 한다. 배영은 20세기 초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몸을 평평하고 유선형으로 유지하면서 수면에 반듯하게 누운 자세로 헤엄친다. 양팔을 번갈아서 머리 위로 뻗어 어깨선을 따라 똑바로 물 속으로 넣게 되는데, 이때 손바닥은 바깥쪽으로 향해서 새끼 손가락이 먼저 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물 속에 들어간 팔을 넓적다리가지 끌어당긴다. 이때 몸은 좌우로 약간씩 움직인다. 발차기는 원래 개구리차기였는데 후에 자유형에서와 같은 상하 발차기로 바뀌게 된다. 배영은 경기용 영법이지만 다른 영법으로 수영을 하다 휴식을 취할 때에도 배영을 이용할 수 있다. 이 경우 팔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발차기만으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자유형 경영에 이용되는 크롤 영법은 속도가 가장 빠른 영법이다. 또한 상당히 먼 거리를 헤엄칠 때에도 거의 예외없이 이 영법이 이용된다. 1893년경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 캐빌과 찰스 캐빌 형제가 1902년, 1903년에 각각 유럽과 미국에 이 영법을 보급했다. 그 영법에서 팔동작은 횡영의 구실 팔 동작과 같았지만 다리는 팔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2번씩 위아래로 차게 되어 있었다. 이를 처음 모방한 미국인들은 발차기를 2번더 추가했으며, 나중에는 발차기를 최고 6번까지 했다. 발차기의 방식도 여러 가지였다. 크롤 영법에서 몸은 수면에 평평하게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다리는 수면보다 약간 아래에 둔다. 한 팔을 끌어당기는 동작이 끝나기 직전에 다른 팔을 끌어당기기 시작할 시작할 수 있도록 팔을 번갈아 움직이기 때문에 몸은 계속해서 그쪽으로 돌리면서 호흡한다. 1896년부터 경영에서는 다른 영법보다 이 영법을 많이 이용하였다. [경영] 자유형은 100M, 200M, 400, 800M, 1,500M 이상의 수영경기는 장거리 수영으로 간주되며, FINA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대개의 장거리 경영은 24~59km의 거리에서 벌어지지만 조지호 마라톤(67KM) 이나 장거리 수영(80km)과 같이 코스가 더 긴 것들도 있다. 1954년 아마추어 및 프로 장거리 수영선수들이 국제장거리 수영연맹을 결성했고, 아무처어 선수와 프로 선수들 간의 불화를 겪고 난 뒤 세계 프로 장거리 수영연맹이 결성되었다. 1960년대에 세계 프로 장거리 수영연맹은 매년 개최되는 8개의 프로 장거리 수영대회를 공인했는데, 이들 수영대회에 가장 출전빈도가 높은 나라는 캐나다, 이집트,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미국 등이다. 영국 장거리 수영협회에서는 내수(內水: 하천, 호수, 만등)에서 벌어지는 16.5~35.4km의 장거리 수영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장거리 수영은 영국의 해협수영대회를 제외하고는 FINA가 관리하는 경영으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영국의 해협수영대회는 19세기 후반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영국의 매튜 웨브 대령은 1875년 최초로 영국의 도버에서 프랑스의 칼레까지 헤엄쳐 갔으며, 그의 기록은 21시간 45분이었다. 지도상으로 도버에서 칼레까지의 거리는 33km이지만 조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도버 해협을 헤엄쳐 건너는 실제 거리는 더 멀다. 웨브 대령이 도버 해협을 횡단한 지 36년만에 1911년에 영국인 T. W. 버거스가 2번째로 도버해협을 헤엄쳐 건넜다. 1926년 미국의 수영선수 거트루드 에이덜리는 네즈그리 곶을 출발하여 도버해협을 횡단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도버 해협을 횡단했으며, 남녀 모두에게 가장 빠른 14시간 39분의 기록을 세웠다. 그 이후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도버 해협횡단 수영대회가 열린다. 1955년에는 미국의 페니 딘이 7시간 40분의 기록을 세웠으며, 1980년대에는 12세의 어린이와 65세의 노인도 도버해협을 횡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많은 선수들은 수영 도중 잠깐 휴식을 취하고 해협을 횡단했다. [한국의 수영] 한국의 수영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거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볼 때 고려 신라에서는 무사들이 수영을 한 거으로 보인다. 열전 장보고조에 "정년(鄭年)이 수영에도 능하여 해중(海中) 50리를 헤엄쳤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898년 5월 14일에 발표된 무관학교 칙령 제 11, 17조에 수영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898년이전부터 수영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 8월2일에는 당시 조선체육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주최로 원산의 송도원에서 제1회 전조선수영대회이며 1958년 5월 24일부터 6월1일까지 열렸던 제3회 도쿄 아시아경기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1946년 3월에 동호인들이 조선수영경기연맹을 결성했으며 1948년에 대한수상경기연맹, 1966년 대한수영경기연맹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 1966년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 1967년 도쿄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에 참가했다. 1970년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처음으로 다이빙 종목의 숭재웅과 경영의 조오련이 400m와 1,500M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대회, 1973년 베오그라드 세계수영선수권대회, 1974년에는 제 7회 테헤란 아시안경기대회와 아시아 에이지 그룹 수영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1976년에 몬트리얼 올림픽 대회, 1977년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했으나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80년에는 제1회 아시아 초청수영선수권대회(인도)와 주니어 올림픽 대회(도쿄) 등에 출전했고, 1982년에는 제82년 제9회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최윤희가 여자 배영 100m, 1분06초 39, 200m 종목에서 2분21초96, 개인혼영 200m에서만 금메달을 획득하여 2관왕에 머물렀다. 그러나 일본, 중국의 강력한 상대들을 누른 것은 매우 의미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1989년 제3회 범태평양수영선수권대회(도쿄) 및 삿포르 아시아 에이지 선수권대회에 참가했으며 빈 국제수영선수권대회에서 김수진이 접영 200M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후 1990년 제11회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 배영 200M 종목에서 지상준이 금메달을 획득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