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 독단의 무력적인 쿠데타’이지만 혁명의 한 가운데 있었던 존 리드의 글에서는 볼셰비키가 결코 무례하거나 야만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적어도 케렌스키와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적위군은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사상의 차이 때문에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없었다. 존 리드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병사에 의해 죽음을 당할 뻔한 순간, 다른 병사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중대한 범죄죠.”란 말은 그의 생명을 구했다. 또 다른 수병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동지. 우리는 혁명적 규율을 지켜야만 합니다. 몇몇 반혁명주의자가 트럭에 올라타서 ‘우리에게는 통행증이 필요 없어요’하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세요. 이 동지들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병사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혁명은 일정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단순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일은 큰 오산이 될 수 있다. 또한 볼셰비키가 그 짧은 시간 동안 민중의 지지를 받는 다수파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과정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볼셰비키는 그 이름만 ‘다수파’를 의미할 뿐 실제 다수파는 멘셰비키였다. 그리고 혁명 전 봉기를 감행하기 위한 소비에트 중앙회의에서 지식인들 중 레닌과 트로츠키만이 봉기를 지지하였고 대다수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봉기가 부결되자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한사람이 분노에 떨며 거칠게 말했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를 대표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는 봉기에 찬성합니다. 여러분은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소비에트가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면, 우리와의 관계는 끝날 것입니다!” 몇몇 병사들이 그에 합류하고 결국 무장 봉기를 감행하자는 주장은 통과됐다. 이를 통해서 보았을 때도 러시아 혁명이 단순히 엘리트 정당의 독단적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장봉기가 감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후에 노동자와 병사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변동 속에는 탁월한 지도력을 보이는 영웅이 존재하지만 직접 피를 흘리고, 생계의 고통을 감수하는 존재는 무엇보다 민중들이다. 우리나라는 존경할 만한 영웅이 많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영웅에 비해 민중들의 삶이 턱없이 미미하게 그려지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처럼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정치적 목적으로 재조명된 영웅도 있지만 정치적 스펙트럼에 의해 재단되고 삭제되어 버린 인물들도 많다. 또한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영웅 중심으로 구성된 책들이 대부분이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이렇게 삭제되어버린 민중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페트로그라드에 모인 군중들은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자기 주관이 없고 우매하며 약한’ 군중들이 아니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외치는 ‘선동가’이며 끊임없이 사상에 관해 토론을 벌이는 적극적인 참여자들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거리의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논쟁하는 군중들의 모습에서 이 같은 자발적 참여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 과정은 또한 광장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만하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나라는 사상에 대해 논쟁을 벌일만한 마땅한 토론의 장소가 없었고 금지됐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상적 논쟁이란 비공개적이고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 광장과 곳곳의 술집들은 군중들, 특히 노동자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고 혁명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문화가 토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러시아 혁명에서 그려지고 있는 노동자들과 농민의 모습은 조정래 씨의 소설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에 등장하는 그것과 흡사하다는 느낌이다. 그 원인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억압받고 수탈 받는 데 분노하여 저항 운동에 뛰어드는 모습이나 술에 취하여 울분을 토하는 모습 등은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웅이 아닌 일반 대중을 주인공으로 한 러시아 혁명에 관한 소설이 쓰인다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 혁명은 1917년 11월 7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살피기 위해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러시아 혁명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레닌의 사상에 대한 고찰과 혁명 이전 노동자들의 의식 구조에 대한 고찰이다. 레닌의 사상은 마르크스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아니었고 러시아의 현실에 맞게 변용한 것이었다. 즉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국민의 대부분이 산업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는 고도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 국가에서 발생한다고 본 반면, 레닌은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보다 용이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이론적 논거를 제시하였다. 비록 레닌의 사상이 마르크스의 그것을 당시 상황에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변용하였다는 비판도 많지만 부르주아지에 대해 반감을 갖고 변혁을 꿈꾸는 민중들에게는 레닌의 논리가 더 구미를 당겼을 것이다. 한편, 존 리드는 미국의 언론인이었지만 급진파 지도자이기도 하였고 혁명적 정치를 옹호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책 전반에 걸쳐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의 활동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 자신도 서문을 통해 혁명 과정 내에서 중립적인 눈을 유지할 수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존 리드가 묘사하는 레닌의 모습은 이렇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중략)… 그의 외모는 대중의 우상이 될 만큼 인상적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역사상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지도자에 꼽힐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중략)… 그는 심오한 사상을 단순한 언어로 설명하거나 구체적 상황을 명쾌하게 분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명민함과 함께 지적인 대담함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언론인으로서 객관적인 보도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비추어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가 좀 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면 귀족들과 반혁명 장군들, 멘셰비키, 케렌스키와 사회혁명당 등의 의견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고 그의 글이 정치적 스펙트럼을 달리 하는 사람들에게도 실증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존 리드가 비교적 편향된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존 리드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돌며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을 기록하였고, 위험한 지역에서도 그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스몰니에서 발행한 통행증 덕분이었다. 통행증을 보여주는 순간 적의를 보였던 병사들도 ‘동지’를 외치며 반겨주었고 또한 그들로부터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간혹 글을 모르는 병사들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통행증과 미국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원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비록 존 리드가 객관적인 입장을 다소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종이 한 장에 의해 생사를 넘나들 수 있는 혼란의 상황에서 취재를 계속했었기 때문에 이 책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가장 훌륭한 르포문학’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듯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그 밑바탕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노동자의 지지를 얻어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만약 인구의 85%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 농민·노동자의 자발적인 의지가 없었다면 혁명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이들이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러시아가 근대 산업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여 직업이 분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로 단결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현대사회는 다양한 직업과 계층으로 분화되어 있어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뭉치기가 힘들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상황으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더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친미, 친북에서부터 반미, 반공까지 다양한 정치적 신조들이 혼재하고 ‘빨갱이’ 운운하며 대립이 끊이지 않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최근의 ‘맥아더 동상’ 문제가 그렇고 ‘강정구 교수’ 문제가 그렇다. ‘강정구 교수’ 문제를 실제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라고 인식하는 체감상의 인플레도 사실 대립을 조장하지 않으면 그 존립이 위태로운 세력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든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미디어에 의해, 혹은 기존 정치 세력에 의해 호도된 정보만을 믿지 말고 개인 각자가 역사를 바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잘못된 사실로 잘못된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일만큼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위험한 일은 없다. 서로 가치 판단이 다르다는 것은 관용을 베풀고 인정해주어야 할 일이지만 잘못된 사실은 바로잡아야 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똘레랑스의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