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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

김태옥 |2006.08.11 00:01
조회 48 |추천 0

‘창세기’에 표착했다는 기록

 멀리 서북쪽 맞은편 솟은 대아라랏 산(그 뒤에 높이 3,896m의 소아라랏 산이 보임)을 바라보면서, 4500년 전 어떻게 축구장 길이보다 더 큰 배(성경의 기록으로는 길이 13, 너비 22., 높이 13.)가 만들어졌으며, 또 어떻게 여기까지 떠밀려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방주를 탐사한 역사적 전말을 돌이켜보면, ‘방주’ 화석의 발견도 의문을 풀어줄 수 없다. 왜냐하면 유사한 ‘발견설’이 백출했기 때문이다.

 기원 초 아르메니아 수도자 하고피안이 방주를 찾아 세 번째로 이 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은 사람이 올라와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2천여년 동안 아라랏 산은 성역으로 간주되어 입산이 금지되었다. 1829년 간 큰 독일인 파로트가 금기를 깨고 산꼭대기에 올랐으나 방주는 찾지 못했다. 1883년에는 지진 피해를 조사하던 터키 관리들이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내린 빙하 속에서 검은 나무 구조물을 발견했는데, 안에 높이 쯤 되는 칸막이가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발견자의 말일 뿐, 사진 등 입증자료가 없어 유야무야되어 버렸다.

 이후 1, 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 조종사들의 목격담에 따라 방주의 실체가 재론되기 시작했다. 1916년 러시아 항공 분견대의 로스코비카 중위는 시험 비행 중 산 남쪽 기슭의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둥그스름한 지붕에 덮인, 묘하게 생긴 배’ 한 척을 발견한다. 그는 대장과 현장을 확인한 뒤 로마노프 황제에게 보고했다. 뒤이어 황제는 2개 중대와 탐험대를 파견해 한 달 만에 몇 백 개 칸막이가 달린 소나무 배를 발견해 크기도 재고 사진도 찍었다. 이듬해 황제에게 사진과 보고서를 보냈으나 그해 일어난 러시아 10월 혁명 와중에 없어졌다고 한다.

 2차 대전 때도 소련 공군의 마스케린 소좌가 소문만 떠도는 기록을 확인하려고 부하를 보내 정찰을 했다. 그 결과 얼어붙은 호숫가에 반쯤 파묻힌 채 거의 화석으로 변한 길이 120여m의 배를 발견했다. 한편, 미국 전술비행 중대의 슈잉하머 소위도 산 위를 돌다 ’낙타등과 같이 생긴 산등성이‘(대·소 아라랏산 사이) 밑에서 너비 12m에 달하는, 평저선 모양의 네모난 배를 발견했으나, 빠르게 지나치는 바람에 사진은 찍지 못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슬람에선 주디산에 있다고 믿어

 2차 대전 뒤 방주 탐사는 더욱 열기를 띠었다. 55년 프랑스 탐험가 나비라는 아라랏 산에 올라 해발 4000m 지점의 얼음 구덩이에서 검은 역청이 칠해진 1. 길이의 나뭇조각을 가져왔다. 연대 측정이 엇갈리는 가운데 나비라는 1974년 란 책을 펴냈다. 같은 해 미국 자원탐사기술위성이 산 위 740km 상공에서 어렴풋한 물체를 찍었는데, 크기나 모양이 방주와 같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대해 자주 비행 측정을 해온 터키 정부는 화산암 침식으로 우연히 배 모양을 나타낸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최근 미국 한 일간지는 디지털글로브사가 2003년 찍은 위성 사진을 공개하면서, 높이 4663m의 산 허리에서 발견한 인공 구조물이 길이, 너비 비율에서 방주와 같다는 점 등을 들어 방주 가능성이 높다는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을 전했다. 이밖에 최근 이란 테헤란 서북쪽 엘부르즈 산 정상 부근의 고도 4000m 지점에서 방주로 추정되는 나무 배를 발견했다는 미국 성서 연구단체의 발표도 있었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



첨부파일 : 방주(3393)_0400x0375.sw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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