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에게.
온 세상을 익혀 삼킬듯한 더위도, 그렇다고 살을 베어가는 듯한 추위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청춘의 열병(熱病)이오.
이 고약한 병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라, 그 증상은 어찌나 다양하며 또 얼마나 끈질긴지!
자고로 옛부터 이 병의 대표적인 증상들이라 하면, 첫사랑의 열병에 빠져 눈에 콩깍지라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침투하게 되는 상사병(相思病)이 있겠다, 또 혈기왕성한 심신을 주체하지 못하여 툭하면 고성방가하고 주정부리고 짜증을 내는 울화병(鬱火病)이 있겠다, 게다가 금덩이와 색(色)과 명예에 굶주리게 되는 기아(飢餓)가 있을 것이오.
이 밖에도 난감한 병이 참으로 많겠으나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를 '청춘의 3대 질병'이라 할 만 할 것이오.
내 알기로 그대도 지난 날 상사병에 빠져 기아에 허우적거리다가 급기야는 울화병까지 걸리고 말았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부디 쾌차하셨기를 바라오.
다행히도 오늘 날은 의학이 발달한 시대인지라, 이와 같은 고약한 병들에도 신통하게 먹히는 묘약들이 나왔다 하니 내 그대에게 짧게 소개해 주면 어떨까 하오.
먼저 이 '상사병'이라 하면 비단 팔팔한 청춘들 뿐 아니라 황혼의 청춘들마저도 심심치않게 감염되곤 하는 무서운 병이라, 옛부터 시인들은 이 병의 근원과 그 병자들을 달래고자 언어에 주술의 힘을 불어넣어 세레나데(serenade)인지 뭔지를 발달시켰음은 그대도 잘 아는 바일 것이오.
그러나 실은 그렇게 입 아픈 짓을 할 필요가 없었던들, 오늘 날은 커플매니저라는 신통한 직업이 생겨 젊은이들에게 '눈높이에 맞는' 사랑을 아름답게 꾸며주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애초에 상사병의 근원을 제거해버린 현명한 방법인지라. 자고로 상사병이라하면 자꾸만 상대방이 아른거려 마음 한구석이 지릿한 것이 증상이거늘, 오늘 날의 사랑법은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의 조건이 자꾸만 아른거리는 지라, 이는 애초에 조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신통하게도 해결되는 것이니 실로 놀라운 근대정신의 산물이라 하겠소.
우리와 함께 수학(受學)했던 콧대 높기로 소문난 S양도 이번에 그 자신이 늘 동경해 마지않던 43세의 졸부 M씨와 화촉을 밝힌다 하니 부디 결혼식에 참석하시어 진심으로 축하해 줍시다.
다음으로는 본인이 자주 걸리곤 하는 울화병.
이것이 또 어지간히 속썩이는 병인지라, 이 병의 증상이 심각해지면 길 가던 행인을 폭행하고, 공공기물을 파손하고, 가족들에게마저 지랄을 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자해하기에 이르니 실로 개화 이전에 살았던 사람 중 절반 이상은 이 병이 원인이 되어 하직(下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오.
본인도 툭하면 이 병을 달고 살아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는데, 오늘 날은 과연 인류 탄생 이래 가장 살기 좋은 시대라, 텔레비젼이니 컴퓨터니 하는 것들이 가정에서 나의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또한 외출하여서는 호프니 클럽이니 극장이니 하는 것들이 내 안에 감춰진 쾌락의 요소를 쪽집게처럼 집어내는지라, 오호 과연 현대인들은 늘상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셀카를 찍어 미니홈피에 올리곤 하니 아직도 울화병같은 원시병을 앓는 우인(愚人)은 세상에 나 뿐인 것 같소.
자, 마지막으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적인 기아(飢餓)가 있소.
이것은 비단 청춘만 시달리는 고통은 아니오나 우리네들 청춘의 시기에 느끼는 기아라 함은 좀 다른 구석이 있소이다.
'나는 오늘 삼시 세 끼를 다 챙겨먹었건만 혹 그대는 굶주림에 시달려 피골(皮骨)이 상접하지는 않았소?'
만약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저런 대화를 나눴다가는 주변인들로부터 무시당하기 십상일 것이오. 실제로 우리의 부모세대는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며 도시락반찬을 나눠주기도 하고 함께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며 우애를 과시하기도 했다는 데 아마도 "한강의 기적" 이후로 이런 모습은 쉽사리 찾아보기가 힘든 것 같소.
그런데 왜 아직도 청춘이란 사치스런 족속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오늘 날 청춘들이 굶주려하는 것은 주로 금덩이와 색(色)과 명예인지라. 사실 이것은 꼭 오늘의 젊은이들만 굶주려하는 것은 아니나 그대도 아시다시피 현재는 정도가 좀 심한 것 같소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현인(賢人)은 분수에 넘치는 재물은 탐하지 않는다'-이 말의 출처는 분명치 않으나, 내 기억으론 아마도 어설픈 글재주꾼이었던 송아무개가 아닌가 하오-라고 하였거늘 오늘에는 신데렐라의 후손들이 널리 퍼진지 오래라, 평범하고 소박한 청춘들마저도 18k금덩이나 다이아가 아니면 쪽이 팔리온다 하니 과연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개 발에 편자"라는 선인들의 말씀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오?
부끄럽지 않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남에게 덕을 베풀줄 알고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이는 모두에게 귀감이 되지만, 자신의 욕심 채우기에만 급급하여 이웃은 물론이요 부모의 피를 쪽쪽 빨아먹으며 금덩이로 사치하기를 좋아하는 청춘들의 병은 전염성까지 강하여 실로 요즘 유행하는 에이즈보다도 무서운 질병인 것 같소.
금덩이가 일반의 액세서리로 보편화되면서 이런 탐욕이 다소간은 잠잠해지는 듯 했으나, 최근에는 이른바 '문화특권'이란 것으로 그 바이러스가 진화하고 있다고 하니, 그대도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선인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라오.
다음으로 이 불쌍한 병자들이 색(色)에도 굶주려 있는 지라, 남녀를 불문하고 밤중에 조명이 번쩍번쩍한 곳에 모여 서로의 기아를 해결하기도 하고, 배가 고파 빵을 훔치듯 색이 고파 강간도 '쉽사리' 하며, 음식을 사고팔듯 "너 좀 고프니? 그럼 20만원 만 내. 한 번 대줄게."라고 흥정을 하니 더 이상은 망측스러워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하겠소. 최소한 자유로운 삶이라는 구실 아래 난잡한 성관계를 가지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고 외쳐보았으나 이는 저 서양의 맑스(K. Marx)의 유물론보다도 구식으로 취급받는지라, 나는 당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소.
이런 당당한 색을 즐기는 자들을 위하여, 최근에는 문명의 발달로 인해 제조된 단백질 인형과 바이브레이터가 유행예감이라 하오니, 그대 주변에 색에 굶주려 눈 밑에 암흑이 낀 자들이 있다면 이런 상품을 추천해 주는 것도 좋을 것이오.
명예에 대한 굶주림은 그나마 바람직한 욕구라 말할 수도 있으나, 적정한 선으로 생각하면 앞서 말한 금덩이나 색에 대한 굶주림도 바람직한 욕구라 할 수 있으니, 본인이 우려하는 것은 항상 '지나친' 욕심임을 알아주시기 바라오.
이 또한 지나치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해를 끼치는지라, 오늘 날 살기 좋은 현대사회는 자유경쟁사회로서 남을 억누르면 그만큼 보상을 받게 되어 있으니, 옆사람이 빈틈을 보이면 재빨리 들추어내는 게 공공연한 미덕이라 할 만 하오.
그리해야만 그 사람의 명예는 실추되고, 나의 명예는 빛나기 시작하니 말이오.
게다가 또 한 가지 권할만한 덕목은, 명예를 얻기 위해 자신의 상사나 스승에게 뇌물을 먹이는 것이오. 이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지혜로써, 뇌물을 먹일 능력이 없는 자는 이미 무능력한 청춘인지라, 안타깝지만 그 꿈을 포기하는 것을 조용히 권해줘야 하오.
본인의 덕이 부족하여 최근에는 더 좋은 치료제가 나왔는지 확인을 못했소만, 아마 이 정도면 질병의 초기에 그 싹을 잘라낼 수 있을 것이니,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소.
다만 걱정되는 것은, 자고로 약물이란 자주 복용할수록 인간이 원래 지니고 있던 면역력마저도 파괴하는지라, 나중에는 더 무시무시한 질병들이 그대의 젊고 활기찬 청춘을 좀먹지 않을까 하는 것이오.
그러니 다소 수고스럽더라도, 그대의 지혜와 인내를 짜내어서 근본적인 치료책을 강구하는 편이, 병을 앓고 있는 그대나 다가올 미래의 후손들에게 있어서나 실로 바람직한 모습이라 하겠소.
두서가 없이 써 내려간 장문(長文)이오만, 일찍부터 지혜가 충만하고 아량이 넓으신 그대는 본인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조만간 보낼 답신(答信)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정리하고 있을 것으로 믿소이다.
20대의 청춘으로서 심각한 열병을 앓고 계시단 소식을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이런 편지를 보내니, 다소나마 도움이 되어 그대가 묘책을 강구해냈기를 바라오.
날씨가 심히 무덥긴 무더운가 보오.
평소 문학(文學)에 대한 잡문(雜文)말고는 손도 대지 않던 본인이 이런 말도 안되는 편지를 끄적인 걸 보면 말이오. 껄껄.
그래도 청춘의 3대 질병에 대해 부실하나마 나의 소견을 정리한 것이니, 그대는 부디 이 편지를 서양에서 유행하는 "행운의 편지"처럼 널리 퍼트려, 청춘의 열병에 고생하는 청춘들이 병을 썩! 물리치도록 도움을 주기 바라오.
그럼 아직도 덕이 부족한 본인은 이만, 총총(悤悤).
서기 2006 年 8 月 12 日 土
- 문학을 한다고 떠들기 좋아하는, 22세의 청춘 송 군(君)으로부터.
글을 읽으신 분이면 누구나 짐작하시겠지만, 이 글의 문체는 당연히 1930년대 편지에서나 볼 법한 것을 흉내내어 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나의 의도는 현대사회에 비추어 볼 때 고지식해 보이는 사고방식을 더더욱 강조하기 위해 이런 문체를 사용한 것이다.
아무튼 날씨가 덥고 글은 안써지다 보니 이런 장난편지 쓰는 데 한 시간을 소비하는구나.
그래도 왠지 재미있는 걸...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