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덕수궁미술관에서 문을 연 ‘롭스와 뭉크’전(展)은 ‘롭스와 뭉크: 남자와 여자’전이라는 제목으로 10월 22일까지 계속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벨기에의 트랜스페트롤 재단이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국내에 처음으로 이들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는 데 1차적인 의의가 있다. 19세기 벨기에의 풍자화가 펠리시앵 롭스(1833∼1898)와 20세기 초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판화 98점이 전시되는 이번 [룹스와 뭉크 서울전]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벨 에포크(1차대전 이전의 황금기)’ 시대의 낭만과 퇴폐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들임에도 전례없는 인기를 끌어 개막 나흘 만에 관객이 7,000여명이나 몰렸다.
‘롭스 & 뭉크’전은 세기말의 그늘을 상징하는 ‘사악한 여자들’을 만나는 자리다. 두 화가의 작품 중 전라의 창부, 의인화된 악마, 우수와 관능이 묻어나는 여인의 이미지를 담은 판화를 모았다. 두 사람의 작품에서는 다같이 세기말 유럽에 드리워졌던 그늘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를 사악한 존재로 본 두 판화가중 작품 ‘절규’로 유명한 뭉크와 달리 롭스의 이름은 낯설지만 유럽에서는 최근 재조명되는 작가다. 두 작가가 묘사한 여인상을 통해 당시 유럽화단을 휩쓸던 악마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이 큰 관심을 끄는 것 같다. 전시는 벨기에 출신의 풍자화가이자 판화가인 펠리시앙 롭스(Felicien Rops, 1833~1898)와 ‘절규’의 작가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판화들로 구성돼 있다.
두 화가중 롭스는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잡지삽화와 판화를 제작해 명성을 누리던 작가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다. 특히 보들레르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과 악마주의적 경향이 다분한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롭스는 여성을 통해 어리석음, 죽음에 의해 주도되는 세상을 풍자했다. 그는 여자를 남성의 가장 나쁜 적이며, 남성을 유혹해 지옥으로 빠뜨리는 악녀 ‘팜 파탈’로 보았다.
이러한 여성관은 아름다운 여인이 남자 꼭두각시 인형을 조롱하듯 바라보는 ‘꼭두각시를 든 부인’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매춘과 광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여성혐오적인 시선이 다분한 판화와 달리 롭스의 사생활은 매우 복잡했다고 하니 실제로 여성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롭스는 워낙 파격적이어서 논란이 분분하다가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다. 롭스의 ‘팜 파탈’은 당시 부르주아의 이중적인 삶의 상징으로 봐야 할 것이다. 눈을 가린 채 돼지의 인도를 받으면서 걸어가는 창녀를 그린 롭스의 대표작 ‘창부 정치가’ 등 전시되는 61점이 대부분 그렇다.
그에 반해 노르웨이 출신의 뭉크는 롭스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파멸과 죽음을 가져다 주는 존재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지만 롭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성들을 그렸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 새로운 여성상과 남성상이 극렬하게 대립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유럽에 살면서 ‘여성=죽음’인 뭉크의 개인사에 기존 질서를 위협하던 여성상이 덧입혀졌다. 여자가 머리를 숙이고 남자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댄 ‘흡혈귀’, 신사복을 갖춰 입은 남자들 사이를 거침없이 걸어가는 누드의 여자를 그린 ‘골목길’ 같은 작품에서 여성으로 대표되는 시대의 변화에 대한 작가의 공포가 전달된다.
격정에 사로잡힌 듯한 여성의 관능적인 모습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공포와 우수, 삶과 죽음의 희비를 포착했다. 뭉크의 대표작인 ‘마돈나 2’를 비롯해 모두 37점이 전시된다.
뭉크의 작품 속 여성들은 우울한 모습이다. 이번에 전시된 판화 37점을 보면 대표작 ‘마돈나’를 포함해 하나같이 어두운 배경에 얼굴도 퀭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작가 자신이 어두운 기억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 결핵으로 세상을 뜬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기억이 평생 정신적 외상으로 남았던 까닭이다. ‘병든 아이’는 누이의 죽음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롭스와 뭉크’전은 19세기 여성해방운동으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모던 걸’로 불리는 새로운 여성상이 나타나는 가운데 혼란을 느낀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를 ‘팜므 파탈’, 곧 치명적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의 이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전시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벨기에인 해리 루텐씨는 때로는 열정과 관심, 그리고 애정이 전문성을 압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몸소 보여주는 특별한 사례인 듯하여 전시회의 배경 등을 소개한다.
이번 룹스와 뭉크전이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전시회를 주선한 전시기획자의 특별한 이력과 남다른 한국 사랑 때문이다. 이 전시의 기획자 해리 루텐(65)은 전문 큐레이터가 아니라 그저 ‘그림을 너무 사랑하는’ 외국의 한 아마추어 수집가였다. 그는 대학을 1년밖에 못 다녀 고졸 학력이 전부이며, 전문 미술교육은 더더욱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평생 처음 해 본 큐레이터 일은 참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하지만 선박회사를 하든, 레스토랑을 하든, 전시를 기획하든 원칙은 똑같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일에 필요한 사람을 구하고, 열정을 쏟아 붓는 게 성공의 비결’이라는 점이지요.” 그는 성공에는 전문성보다 열정이 더 필요할 때도 있음을 에둘러 말했다.
▲ 루텐씨가 뭉크의 초상화 앞에 서서 작품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4~5월 롭스의 고향 벨기에에서 먼저 했던 이 전시회가 뭉크의 고향인 노르웨이에 앞서 서울에서 열린 것은 한국에 대한 기획자 루텐씨의 친밀감 때문이다. 그는 벨기에의 선박회사인 ‘트랜스페트롤 서비스’의 대표이다. 선박 강국인 한국은 선박회사를 경영하는 루텐씨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좋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번 전시회를 추진하게 됐다고 했다. 루텐씨는 한국을 아주 좋아한다. “좋은 게 있으면 친구랑 나누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니냐? 나의 참된 친구들은 한국에 많이 있다”고 자랑하며 미소지었다.
20년 전부터 그는 1년에 1~2회씩 한국을 찾는다. “한국 사람들의 낙천적 성격, 남을 대하는 아름다운 태도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한국에 오면 미술 전시도 잘 봐요.” 그는 특히 작년에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조각가 김종영의 전시가 좋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루텐씨는 순수한 그림 애호가이자 수집가였던 것이다.
순전히 취미로 기획한 전시이기에 입장 수익금은 한 푼도 챙겨 가지 않는다. “전시 기획은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평생 한 번이나 해 볼까 한 일이죠. 특히 미술관 전시를 할 만큼의 작품들을 끌어 모으는 데 꼬박 2년이 걸렸어요. 벨기에와 노르웨이의 소문난 개인 컬렉터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14명에게 빌렸지요. 비즈니스 저녁식사에서 어떤 사람이 뭉크 판화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 보는 그 사람한테 다가가서 빌려 달라 조르기도 했어요.” 꿈꾸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잇다고 했는가? 롭스와 뭉크를 찾아 헤매는 이 사업가의 소문을 듣고 노르웨이의 한 시립미술관은 이 전시의 핵심 작품인 뭉크의 판화 ‘마돈나’를 빌려주기도 했다.
1980년에 선박회사를 세워 일으킨 사업가이면서 벨기에의 사회복지재단인 ‘트랜스페트롤재단’ 회원이기도 하다. 그 재단은 그가 대표로 있는 선박회사가 지원하고 있어 일종의 메세나 성격을 띠는 재단이다. 이번 전시에 들어간 보험료·운송료 등을 모두 그 재단에서 후원받았다. 서울 전시 이후엔 뭉크의 고향 노르웨이에서 같은 작품으로 구성된 롭스와 뭉크전이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02)2022-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