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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

주성준 |2006.08.20 23:50
조회 98 |추천 1
•예술이란 무엇인가 ? 한문의 의미상으로는 ‘재능을 심는다’라고 해석된다. 즉 문득 깨닫고 점차로 수행한다는 돈오점수에 의해서 깨달음에 가기 위한 수행의 수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조시대 양반이나 선비들 이외에 모든 예능인들을 ‘쟁이’라고 천시하고 박대해 왔기에 우리나라는 과학이라는 신의 기적을 이룰 수 없었고, 결국 탈레스의 자연철학에서 멀어져서 자연을 경외하지 않는 인본주의 소피소트들인 서양인들에 의해 우리의 정신과 사상을 물질 만능주의인 현대 과학이 이끌어오게 되었다. 그 결과 문화적, 물질적 공해와 과학적 경제축적을 근간으로 한 새로운 제국주의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약소국들은 겉만 멀정한 자국문화의 소멸과 함께 식민지 아닌 식민지로 살고 있다. 예술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예도(藝道)에 있고 본다. 술(術)은 도(道)가 없이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술이라고 한다. 이것은 문화전반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하며 우리는 생활속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방편으로서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취지는 결코 크고 화려하고 형식과 겉만 거대한 현대포스트 모더니즘적 독특한 발상에 있지 않다. 신기하기는 하겠지만 기형아들이 사람들이 보기에 신기하듯이 현대 미술은 이런 근대의 독특한 개성과 괴기적 발상을 추구하는 서양예술철학을 근간으로 가식적인 유전돌연변이인 기형적 아름다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아주 조그마한 데에 있는 국지적 문화에서 꽃피어왔던 그 약소국들의 전통적 진실한 아름다움은 제국주의적인 종교적, 문화적 횡포에 의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지금 세계적인 예술제에 당선 출품되는 작품들은 대개가 그 거대한 스케일로서 혹은 신기한 독특한 발상만으로서 끝장을 보려고 한다. 그것도 예술의 범주에 들기는 하겠지만 예술과 창조주의 근원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고 공모전들은 그들의 스타일을 만들어서 시대와 지방색을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들을 사장시켜 버린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교수들이 자기가 만든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거나 자기에게 레슨을 배우고 연주를 하는 학생을 뽑듯이 그것은 예술의 취지자체를 무너뜨리는 독들이다. 그런 것들은 상이나 타서 옆집 아줌마에게 자랑을 일삼는 아마추어에게나 줘버려라. 우리는 뜻 있는 동지들의 힘을 합쳐 우리만의 전인 교육이 담긴 학교, 전국적인 축제와 전시, 지방색이 담긴 현대적 독특한 문화를 만드는 모임을 가져야만 한다. 예술의 서양 언어는 ‘art’라고 한다. 영문 본 성경구절에도 ‘lord’(신)을 our father art in heaven 이라는 구절로 표현했듯이, 창조적인 사랑의 마음에서 그 의지가 육체란 도구로 표현되는 것이 예술이다. 그 말단 적인 결과물보다 어떤 마음으로 창조를 했느냐가 중요하다. 미움과 원한이 담긴 증오의 맘이나 공포나 파괴의 내부 속성을 표현하기도 하고 만물을 살리는 사랑의 표현이 담긴 예술작품들도 있다. 이 모두 다 표현의 재료로 쓸 수 있으나 은유와 비유를 통해 가는 승화의 정착점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선’도 창조되고 ‘악’도 이 예술적 기술로서 창조 될 수 있다. 사실 art는 모든 생산적 창조적 활동은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행위 예술가라고 볼 수 있고 선, 악을 재료로 실생활에서 여러 가지를 만들어내고 표현할 수 있다. 불가에서는 행선(行禪)이라고 하고 힌두이즘에서는 칼마요가라고 하기도 한다. 그 직업적인 기술을 근본으로 자신의 근원을 느끼고 배워 가는것은 곧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즉, 그 자신의 기술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달을 만져볼 수 있는 결과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이 진정한 이 사회를 예술적으로 발전시키고 개개인의 영성과 생의 의미를 발전시키는 예술의 길, 즉 ‘예도(藝道)’이다. 가장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사랑이 담긴 창조적 작업을 하는 이는 자신의 직장에서 찾아야 하며 바로 그 곳이 그의 작업실이고 ‘아뜰리에’이며 행위자체가 예술로 승화되어야만 정치문화계가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 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나 산속에서의 명상만을 통해서는 이제 이 복잡한 사회를 절대 개혁할 수 없다. •괴로운 눈물 흘렀지만 주님과 나와 함께 라면 그립고 아름다운 내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수백만 송이 사랑은 피고... 이러한 유행가 가사 중의 한 구절에도 진리가 담겨있으나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지극히 평범한 곳에서조차도 성(聖)스러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우주의 창조 원리는 남녀 즉, 음양의 창조 원리에서부터 나오고 그 창조는 사랑에서 씨앗이 잉태되어 창조가 시작된다. 그러나 무지한 서양의 원죄론은 이 사랑을 죄로 인식하고 있다. 영적인 사랑, 육체적인 사랑 모두 소중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래방이나 모임에서 자주 부르고 듣는 내용이지만 노래방에서 흔히 부르는 이러한 남녀 상열지사의 노래들이 가지는 의미를 깊게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중요성을 모르고 벼락부자가 되어 돈이 많으면 돈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졸부가 되듯이 사막에 가보아야만 물의 귀중함을 알 듯이, 그들은 그냥 주어진 주님의 사랑의 창조물, 시, 노래 그림들을 매일 즐기면서도 그 예술성과 사람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어렵게 교회나 신전에 가서 찾으려는 변태의 속성들이 있는 것이다. 그 작사가들은 시인들이 많고 그들은 새로운 창조극의 사랑이 담긴 싯구를 창조하며 창조주와 가장 비슷한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 한 부류이다. 자기도 모르게 우주의 원리를 그 무엇보다도 솔직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성스러운 성가로써 읇고 있는 것이다. 모든 유행가에서 님이나 당신, 너를 주님으로 바꾼다면 정말로 힘이 넘치고 재미있는 따분하지도 않은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찬송가가 되고 독경이 될 것이다. 보는 시각만 바꾸고 채널하나만 돌리면 새로운 깨달음이 너에게로 쏟아질 것이나 사람은 주어지는 것만 받아서 하는 입시교육식의 노예적 습관에 물들어 있다. 남녀의 육체적 사랑을 통해 정신적 사랑을 알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주적 사랑을 알게 하는 데에는 너무나 신비스런 자연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 인간이 남녀 없이 ‘무성생식’을 한다면 사랑은 없고 과학만이 존재할 것이며 결국 인류는 멸종할 것이다. 내가 성전을 세울 때는 모든 유행가에 주님을 넣어서 찬송하리라. 신을 찬양함이 보통의 교인들이 생각하듯이 거룩하고 신성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여인, 남정네를 생각하는 애틋한 노래에 주님의 창조원리와 그의 한 부분을 사랑하게 하는 오묘한 원리가 있고 이를 통해 이웃으로 사랑을 넓혀지는 것이나 사람들이 만든 귀한 악세서리와 그 분위기, 모두가 성스럽다고 말하는 유행하는 글귀에 최면 되지 말고 그 속을 편견 없이 무조건적 추종심을 배제하고 들여다 보라. 그 글들이 성인들이 직접 쓴 것이 아니며 수세기에 걸쳐 인간의 손에 의해 낱말이 늘고 줄어서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찬송은 주위에 널려져 있으나 너희들의 신성하고 위대한 것만을 보려는 색안경이 그것들의 진정한 색깔을 볼 수 없게 만들고 단순한 사랑의 의미를 종교적 광신으로 이끌고 있음을 보라. 항상 주변의 사소한 것조차도 주의 입장에 서서 새롭게 생각하고 고귀하게 받아 들이라. 모든 사람은 내면에 주님의 방을 가진 주의 화신들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가장한 성스러움만을 추구하는 귀신에 들리지 말라. 언제나 깨어 있으라. 모든 것을 버리라. 천국과 영생마저도...... 그리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네게 스스로 찾아오리라. • “결혼하자” 보다는 “같이 살자” 형식적인 결혼과 같이 사는 동거의 차이는 없다. 그러나 수백명의 결혼식에 찾아온 증인을 동원해 상대방을 그들의 시선과 정부의 서로의 육체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제’로 묶는 인위적 문서가 있다는 것과 서로를 믿기에 문서계약, 증인도 없이, 아이를 수단으로 비겁하게 서로를 얽매이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자연을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무엇이 자연인지 조차도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믿음 없이 돈과 집안 지위에 팔려간 사랑이 얼마나 가겠는가 ?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40%에 이른다. 서로가 거의 50%에 달하는 확률을 가진 실패와 고통을 떠않고 결혼식에 참석한 증인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욕먹을 짓을 왜 하는가 ? 그러나 서로를 그저 믿고 문서라는 것과 증인이라는 것을 이용하는 ‘아이’를 매개체 로 감옥처럼 살아야 하는가 ? 서로의 의심과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최소한 그 증인들에게 이혼녀 혹은 재혼이라는 손가락질 당하는 50%의 확률을 줄일 수 있다. 나머지 50%도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 중에 2~30%는 이혼을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낳아놓은 아이 때문에 맘이 약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들게 사는 경우가 많다. 억지로 주위의 시선들과 양가부모의 체면, 여러 사람들의 시선, 또는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 불쌍하기 때문에 지옥 같은 결혼 생활에 숨어살지 않아도 된다. 에너지 상관이론 법칙에 따르자면 이러한 스트레스나 고통의 에너지는 같은 곳에 사는 다른 이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마치 전자파처럼., 독일을 비롯한 선진 서양인들이 결혼이라는 의식, 즉 자연에서 떠난 인위적인 문서나 식을 버리고 남들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호박씨까는 언어 문화 같은 남의 사생활 얘기는 잘하지 않는 문화를 가지고 평생동거하며 동지로서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다. 세상의 다양한 문화를 듣고 본 것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180■바뀌기도 한다. 주위의 여인들을 둘러보면 자기가 결혼생활이 힘들면서도 보상심리에서인지 즐겁게 살고 있는 자유 연애하는 친구를 욕하는 정신병자들을 많이 봐 왔을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들으라, 듣는 자에게 덕이 있다고 한다. 혼자 지옥에 가지, 왜 친구까지 걸고 들어가려 하는가 ? 너 자신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라. 자신에게 진중하고 솔직하라. 자기 종교만 자기 생각만을 아집 하는 이들에겐 무관심으로 대하는 것이 편하다. 미움보다 무관심이 더한 ‘벌’이다. 때가 되면 알 것이요, 모르면 다음 생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혼란한 시대가 아닌 우리가 말하는 개벽이나 인도의 전설중에 지구의 마지막 재앙이라는 칼리유가, 서양의 아마겟돈이라는 전쟁 이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구상의 인구 중에 가장 네게 맞는 천생연분의 짝을 혼인때가 되면 필연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결혼에 실패도 없을 것이며, 어떤 우연적인 인위적인 잘못이 있어도 그때엔 대부분의 모든 이들의 맘에 사랑과 자비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기에 고대의 유대인들처럼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엔 악이 박물관에 희귀한 전시물과 같이 극소수만이 존재할 것이다. 악(惡)이란 상대성이 없으면 선(善)도 없고 태극 음양의 우주원리자체가 깨지면서 기쁨도 없어지기 때문인데, 이는 그 상대적인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선천과 후천은 선악의 퍼센테이지가 바꾸는 것뿐이다. 지금은 선이 희귀하기에 선을 가장한 악인들의 세상이지만 그 시대엔 희귀한 악을 가장한 선인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마치 연극에서 희귀한 역을 맡고 싶어하듯이... 그때를 많은 선지자 성인들이 예언했지만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마야인들의 역학에서 2012년에 지구 최후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기도하고 ‘포톤벨트’라는 책을 쓴 수행자는 2012년을 전후로 태양계가 우주적이고 영적인 인류의 심판을 가져오는 에너지장에 돌입한다고 얘기하나 그 또한 나와는 무관하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설사 내가 죽더라도 내가 아닌 육체가 죽을 뿐이니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물론 그 지식들이 도움은 되겠지만 썩어가는 고름덩어리인 육체의 수명 집착하여 벌벌 떨면서 사는 기회주의자가 아닌 내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3살 먹은 어린이한테 배울점만 있을까 ? 꼴값떨고 있네 ! 여기엔 나이순에 계급주의에 찌들은 유교주의자들이 말하는 권력적 아부와 치사한 논리가 내부에 숨겨져 있다. 예수가 어린이의 영혼을 영접함은 나를 영접함과 같다고 간절히 얘기했다. 예수의 영성이 곧 순수한 어린이와 동격이라는 말인데 왜 어린이를 무시하는가, 태어날 때 가져온 것도 아니고 죽어서 가져갈 수도 없는 쓸데없는 피의 전쟁과 투쟁의 도구인 지식의 우위를 앞세우는가. 나이와 경전 속의 지식으로서 천사를 겁주고 없신 여기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문자에 최면 되고 저급 신령이나 천사들에게 신들린 바보들이 많다. 석가도 반야경에서 ‘지식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라고 했듯이 천상의 신들도 내려와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듯이 그들의 근원으로 돌아간 순수, 단순성은 배울 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 보다 차라리 배우지 않는게 더 그 본원의 순수함을 지킬수 있을수도 있다. 인간전체의 영혼을 어린이처럼 진실하고 단순하게 바꾼다면 전쟁도 기아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순수한 영혼이 아닌 어린이가 우연히 내뱉은 말이나 행동 속에서 일부분의 지식이나 힌트만을 얻으려고 한다. 세 살짜리 어린이가 방언하고 통곡하거나 희귀한 짓거리를 해야 하는가 ? 예수는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행과 말의 뜻도 모르면서 말하는 관념에 물든 사람은 되지 말라. 무엇을 듣고 보던지 간에, 글씨로 쓰여지고 설교나 강의에 의한 기존의 지식과 아집, 관념을 허물고 항상 새롭게 시작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자기 안의 주님을 찾는 수도이고 나의 말을 한마디하는 창조주의 논리를 따르는 창조적인 철학의 시작이다. 이 세상엔 너를 배제한다면 네가 의지할 그 누구도 존채치 않으며 신(神)도 없다. 시작과 끝은 언제나 너 혼자다. 모든 것을 담은 조그만 한물방울에 비친 세상의 거대함의 하나일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 정신(正神)으로 섬겨져 왔던 천지신명들은 모습은 다르지만 서양에서의 천사의 역할을 해왔고 그들은 세계 문화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 나라와 민족의 신앙에 맞게 둔갑해서 인간을 위해 일해왔고 정의를 위해 싸워왔다. 그러나 인간의 무지는 성령이 썼다고 말하나 실은 그들의 형체와 이름에 매달려 형체 없는 신(神)과 보살들의 둔갑의 원리나 인간을 위한 사랑의 열정을 도무지 이해 못하고 있다. 물론 상극의 원리에 의해 생긴 ‘마’들이나 삿된 귀신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 싸잡아서 ‘사탄’으로 몰아 붙이면 안된다. 어찌 보면 이러한 악마들도 우리의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교관이고 완성을 위한 도구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는 기도 이 속에는 자기는 발전하고 싶지 않고 그냥 시험도 안치고 놀겠다는 안일함이 숨어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예수의 어린이 영접이론’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고도 볼 수 있다. 3살 전후 어렸을 때 저 세상으로 돌아간 순수한 영혼의 동자신(천사, 신명)을 받아서 일어날 나쁜일도 알려주거나 생활에서의 피해가 없게 해주고 인간에게 조언을 많이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 일부 선무당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서 이들을 욕되게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왜 예수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어린이에게 그러한 권위와 가치를 두었겠는가 ? 백지처럼 순결하고 깨끗한 것은 꽉 차서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경지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아주 지혜와 지식이 가득한 나머지 그런 것들의 경계를 뛰어넘은 지식의 강을 건너 지식으로 이루어진 법(法)의 뗏목을 버린 선지자(先知者)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원의 시작과 끝이듯이 이 속에는 순환론적 우주관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원을 끈어 길게 편다면 한일자가 된다. 신의 원리와 합일 됐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 극과 극은 통하며 이를 일러 도가에서는 회광(回光)이라 하여 맘의 빛을 내면으로 돌이켜서 그동안 쌓아왔거나 추구하고 있는 잡 지식을 버리고 네 깊은 속에 녹아 있는 순수한 내면의 그것을 찾으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잡 지식이라는 것들은 사실 잡된 것이 아니다. 과정으로서의 훌륭한 조교, 즉 방편 역할을 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의 글자나 지식적인 부분적인 것에 심하게 물들면 일명 사이비가 탄생하기도 한다. 사이비는 스스로를 모르고 있으나 그것이 돈과 권력이 된다는 것은 명확히 알고 행동한다. 대중은 죽고 나서 저승에서조차 오래 살고 싶다는 미망의 욕구와 집착에 의해 그것을 쫓아간다. 중세 때 면죄부를 파는 교황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의 자연법과 천지신명을 섬기는 무속은 유교 500년 동안 철저하게 억눌리고 일제 때도 몇십만권의 한문원서들이 불태워졌고 그 이전에는 더 많은 수천번에 걸쳐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천부경을 비롯한 그 모든 역사적 성스러운 자료들이 불태워져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우주의 원리를 담은 한줄의 해석서인 훈민정음 언해나 한 단고기 또한 한권 밖에 남은 것이 없으니 가짜로 부인되기도 한다. 다행히 수천, 수백년에 걸쳐 불태워졌던 천부경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묘향산 깊은 곳 석벽에 새겨 놓은 것이 1900년대 최치원 한 수행인에 의해 발견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에는 고려시대 사육신중 한분의 자손 유품중에도 현대에도 발견된적이 없는 갑골문자로 쓰여진 원본, 천부경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하나와 님’ 을 이용하는 자들 무엇이 ‘하나’인가. 하나면 됐지 거기다 ‘사족’인 ‘님’을 뭣하러 붙이는가. 이 님에서 아부와 인간차별, 언어의 계급적 분화가 나왔다. 님은 진실로 사랑하는 이성이나 존경하는 이에게 썻던 말이다. ‘주님’은 사실 ‘주’라는 말하나 만으로도 충분한 표현이다. 한문으로는 한일자(一)로 표기되고 영어로는 oneness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하나는 둘이, 셋이, 또는 만개가 합쳐서 하나가 되기도 하고 하나가 다시 분열되어 수만개로 되기도 한다. 동물이 새끼 열 마리를 낳으면 ‘10’이라는 절대적인 하나의 의미가 ‘1’이라는 적은 수를 가진 열 개의 의미를 지닌 개체로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3차원적으로는 그렇다. 사람들은 흔히 하는 농담 중에 2+2 나 4+7 ..... 이 4나 13이 되지만 ‘0’이 될 수도 1이나 엉뚱한 결과가 나올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꼭 둘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논리다. 보이지 않는 영계나 자연의 법칙에서는 한사람의 마음과 육체에 수십명의 귀신이 살수도 있고 두마리 생물이 번식하면 똑같은 ‘10’이라는 완성체가 여러 마리 복사되어 나올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성생식체는 한 마리에서 여러 마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전자에서 한문과 영어에서의 하나의 의미와 1+1 이 꼭 2는 아니라고 얘기했듯이 예수교와 불도, 선도에서 전하는 의미는 하나의 이러한 통일된 의미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닌 아버지, 예수는 ‘하나’인 아버지를 god father, lord 라고 현대인들은 칭하였고 이를 직역하면 아버지, 신(神)으로서 최고의 존재이며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의 의미와 는 거리가 멀다. 기존의 우리 무속에 있던 하늘님(하느님)이나 우리의 일태극 논리에서 나온 하나를 빌려다가 억지로 꾀어 맞춘 것이며 우리 고유의 신의 이름을 훔쳐서 썼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the one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주에 이르게 된다. 그 중간에 하나라도 빠지면 나도 없고 아버지도 신도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은 하나로된 유기체인 우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조상을 모시는것도 태조의 신을 포함한 ‘아버지’의 포괄적인 존중인 것이나 사람들은 이 원리를 잘 모르고 있다. 옛날 무식한 일반 민중들은 친숙하게 다가오는 우리 전통신의 이름을 가진 외래신의 새로운 개명된 이름에 따라 그 교세가 더 빨리 전파된 원인중에 하나가 되었었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아버지는 인간이 생각하는 남성적 아버지만이 아닌 어머니를 포함한 부모 모두를 상징과 은유로서 ‘하나’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3차원적 생각으로는 고대 남성 우월문화와 그 경전기록에 의한 남성적 모습을 지닌 인격적 신의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다. 실지로 ‘신’은 3차원적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신자’가 원하는 모양으로 자신의 모습을 둔갑시킬 수 도 있다. 그래야만 세계의 각 족속들이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경전들은 이름과 형체를 섬기지도 말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깨달음 그 자체밖에 없다. 정신적 영계의 측면에서는 음(陰)안에 양(陽)이 있고 양안에 음이 있으며 ‘불’ 안에 ‘물’이 ‘물’ 안에 ‘불’이 있는 것이 우주의 원리이다. 음과 물을 상징하는 쾌인 ‘감’쾌나 ‘불’과 ‘양’의 상징하는 이 쾌에서 끊어진 부분은 ‘음’ 이어진 부분은 양을 의미하며 마치 달걀과 같이 겉이 딱딱하면 속이 무르고 속이 딱딱하면 겉이 무르다. 곡선이 있으면 직선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이 음양의 법칙 안에 있다. 여자가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정도로 속이 독하고 겉육체는 나약하고, 남자는 겉은 강하나 속은 도량이 대체로 넓어서 독하지 못하듯이 육체가 있는 3차원이나 정신적 4차원의 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도교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의 고대 신인 ‘여와와 복희’는 직각자와 컴퍼스를 들고 있다. 이것은 곡선 직선을 은유한 음양을 의미하며 유대인의 ‘여호와’ 신이 동양에서 건너갔다는 설도 있듯이 전통 도교 경전에서는 하반신이 뱀, 즉 용의 형상을 지닌 ‘여와’ 신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인류를 창조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도교를 믿으면서도 이러한 천지 창조론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우주의 원리를 꽤뚫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곡선과 직선의 은유와 상징이 “음양” 자연적 태극원리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실 육체는 흙에서 영양분을 가져왔다가 다시 흙의 성분으로 돌아가기에 자연조화의 법칙 즉 ‘법신불’의 작용으로써 그리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에 의해 지방적 관습이나 기복신앙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인간을 교화하기에는 그러한 은유적 모습이나 기적적인 힘을 지닌 무소불위의 전설적 행적이 인간들을 믿게끔 하기에 적당하기에 그러한 신화를 말했던 것이다. 우주의 인격적 ‘절대신’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왜? 전 세계의 소수 민족들에게 하나님이 창조주의 다른 이름으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겠는가. 인간은 좋아하는 “님”을 위해 성형수술을 하듯이 신도 자신의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 사랑하는 어린양, 즉 창조물들을 위해 성형수술도 하고 호적을 바꾸기도 하는 것을 왜 모르는가 ! 또 하나의 은유는 창조론과 진화론은 그 시간적 의미로서 서로 같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학설을 가지고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식으로 싸우는 것이 우습다. 은유의 세계에서는 하루가 1억년이 될 수도 있다. 천지창조 이전에 신에게 있어서는 태양이라는 달이라는 시간 계측의 척도물이 없었는데 무엇으로 하루라는 시간을 잴 수 있겠는가. 또한 시간은 멈추어져 있고 다만 사람이 물질들이 산화돼 갈 뿐인 것을 왜 모르는가 ! 시간이 살아있고 마치 물처럼 흘러간다면 소진되고 늙어서 없어져야 하고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타임머신처럼 시간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은 그 자리에 있는데 ‘시계 바늘과 태양의 뜨고 진다는 시각적 지식’에 최면 되고 습관에 젖은 이들은 그 깊은속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논리에서도 우주의 고속 여행을 하는 동안에 두 행성사이에서 시간이 늦게 갈 수 있다는 논리도 있고 더 비약시키면 시간이 멈추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멈추어진 시간에선 너희의 생각과 육체도 멈추어진다. 시간은 항상 그곳에 있고 네 안의 시간을 멈추는 법, ‘업’을 짓지 않는 방법은 깊은 명상을 체득한 이들만이 안다. 삼매를 경험해 본 이들은 삼매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장 빠르다는 것은 멈추어져 고요함과 같다. 각진 팽이가 돌면 우리 육체적 눈에는 둥글게 보이며 서서 멈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진정한 최고의 빠름은 그보다 더 빠른 것이 없어야 한다. 끝없는 우주를 1초만에 가더라도 더 빨리 갈 수 있는 것이 이론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본래 있던 그 자리에 고요히 멈추면 그곳이 우주의 끝이다. 우주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것, 즉 우주는 변이나 모서리가 없다. 있다면 이미 우주는 가장 큰 것이 아니다. 그 중심은 어디인가 ? 이미 끝이 없는데 어디가 중심인가 ? 네가 서 있는 곳이고 실은 네 맘이 있는 곳에 폭풍의 회오리처럼 존재하고 있다. 가장 작은 것은 쪼개고 쪼개어 그 입자가 없어야 한다. 그 또한 이론적으로는 끝없이 쪼개어져 갈 뿐이다. 결국 가장 작다는 것은 형체가 없어진다는 결론에 이르고 없다는 것은 끝없이 있다는 논리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옛 선지자가 먼지 한알 속에도, 모래 한알 안에도 우주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 먼지의 비유를 직설적으로 3차원적 과학논리로서 밖에 이해 못하고 있다. 모든 물질을 쪼개어 가다 보면 물질이 아닌 빛과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물리학설이 있다. 이는 원자폭탄의 원리인 E=MC■의 논리대로 구 시대의 질량불변의 물리법칙이 깨지고 물질이 에너지와 빛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은 맥락이며 에너지나 빛도 물질로 환원 될 수 있다는 논리에 다다를수 있다. 성인들은 빛으로 감싸져 있다고 하며 빛 자체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병이어나 부활의 기적도 이 논리로 마음의 진동을 높여 육체를 진동으로 분해하거나 그 진동들을 끌어 모아 재결합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이마 윗부분 사람을 쓸 때 참고 할 수 있는 상법(相法) 관상을 보되 관상, 수상, 족상이 합해서 30%, 곧 상, 신체의 상이 30%, 마음의 심상이 모든 것을 관할하여 40% + 60% 이니 관상에 너무 매달려서도 안된다. 관상으로 심상을 바꿀순 없으나 심상으로서 관상은 점점 변해간다. 이마 윗부분이 발달된 이들은 여러 가지를 자료로 연구하는 연구직에 어울린다. 추리력, 사고, 상상력이 좋으니 탐정직 등의 종합 분석력을 활용하는 데에 알맞고 즉 2인자의 위치인 ‘참모’ 직이 천직이다. 여자가 난정이처럼 이마가 이러하면 너무 똑똑해서 남편과 오래 못살수도 있다. 케리어 우먼으로서 혼자 즐기며 사는 것이 더 낳을 인생을 영위할 수 있다. •이마 옆 윗부분 가로폭이 넓은 사람은 조직과 사람을 많이 끌 수 있다. 노무현이 이거하나는 좋다고 볼 수 있다. 단체사회, 정치, 모두가 조직력이다. 정치가, 사업가, 지도자, 영도자가 될 골상이 그러하다. 의지와 화합 활동력이 있다. 고로 관상이 그리 좋지 않은 사장은 상이 좋은 사람을 전무, 상무로 앉히면 된다. •이마 옆 부분이 아래 이 부분이 색이 윤택하고 발달돼 있으며 사회구조의 조율에 능하다. 행정관리, 의사, 영화감독등의 직업에 유리할 수 있다. •귀위서 관골까지 이곳이 넓다든지 튀어나와야 한다. 경계심을 의미하며 이곳이 약한 여인은 정조관념이 약하다. 이곳이 들어가 있거나 평평하다면 화재, 수재, 사기를 잘 당한다. 이곳이 발달하면 피해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측두골 튀어나온 옆머리는, 방어를 담당한다. 사기 협박 공포등을 적절히 막아내는 힘을 관장한다. 태권도 18기등 무술을 배우면 태양혈이 나오며 이곳도 튀어나오게 된다. 골상이나 관상도 평소에 닦은 수련이나 악업, 선업의 노력에 따라 변한다. •측두골 위의 앞부분 창조력이 좋고 비약적이고 없는 것을 만들며 정치, 발명, 과학, 의학자들이 많다. 이곳이 약하면 피동적, 수동적인 사람이 많다. 예술가가 이곳이 좋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이마 바로위 앞머리 부분의 심골 모방의 기능을 담당하며 기업의 제품관리, 해외의 신제품 모방에 능한 기업의 디자이너가 많다. •머리 뒤 튀어나온곳 활동력, 동양은 아이를 낳아서 뒤로 눕혀서 키우는 습관 때문에 두뇌의 활동성이 떨어진다. 서양은 옆으로 아이를 누워 길러서 앞, 뒤가 나온다. 칠전팔기하는 의욕과 남자는 정력도 좋다. 남편을 집에 묶지 말고 매일 내 쫓아야 이 부분이 발달된다. •귀 뒤의 밑부분 이곳은 성욕을 담당하고 있고 이곳이 튀어나오면 타고난 정력이 강하며, 일의 추진력도 월등하다. 절에서도 제자를 볼 때 아침에 그곳이 텐트를 치면 수제자 감으로 골랐다고 하며 사회에서도 아침에 그것이 서지 않는 남자와 동업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메부리코 구두쇠형이며 어떤 수단을 쓰던 남의 것을 뺏어 간다. 옛날엔 관료들을 등용할 때 이런 상을 쓰지 않았고 콧대가 높으니 타인을 지배하려는 지배욕이 강하다. 식민지 전쟁의 선두에 섰던 지금 유태인을 비롯한 서양인 대부분이 이 두가지 유형의 예이고 그들은 전혀 사랑과 평화 적선의 원리에서 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얼굴은 사업가 즉 장사꾼으로 적합하고 외교, 정치에도 능하다. 그러나 민중들에게 베푸는 데에는 인색하다. 전형적인 배부른 돼지상이다. 정치와 종교가 고대이후 분리되면서 애국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오직 권모술수가 능해야 하며, 현실의 원리 빵 만으로만 사는 놈들이라고 볼 수 있고, 영혼의 양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을 현실의 원리에 적용할 뿐이다. •눈동자 제일 중요한 포인트다. 이곳에서 그 사람의 뜻, 의지와 전체적 영성과 기감 등을 볼 수 있고 눈빛이 총기가 있고 뚜렷하지 않으면 만사에 크게 되기 어렵다. 아래만 보고 다니는 사람이나 눈빛을 마주칠 때 눈동자가 흔들리는 사람은 너무 깊게 믿으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광대뼈 튀어나온 사람 옆으로 마름모꼴로 튀어나오면 반항심이 심하고 애정이나 기교, 감정이 둔하여 예술감각이나 아이디어가 없고 ‘사’자 붙은 직업이 천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양인이 이런 형이 많다. 광대뼈가 앞으로 나오고 눈이 살아 있으면 자기 것을 저돌적으로 잘 챙기며 중, 말년에 재물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따른다. 식민지를 많이 만들어 수탈을 자행했던 서양인이 대개가 그러하다. 여자가 관골이 높으면 파란 만장한 팔자라고 볼 수 있다. 남편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남편의 건강에도 별 관심이 없으며, 좀 일찍 생을 접는 남편 사망률이 평균40%에 이른다. 소박 맞거나 독수공방, 첩 생활이 각각 10%씩 부부애정결핍이 90%이다. •주먹코 키 큰 거지는 있어도 코 큰 거지는 없다는 말이 있다. 서양인은 코가 높지만 살이 없으며 코 등이 높아 지배욕이 강해서 부하로 있으려 하지 않는다. 고로 수입이 많아도 쓸 일이 많다. 들창코, 즉 돼지코는 절대 비밀이 없고 100만원을 벌면 200만원을 쓴다. 들창코 옆에 있으면 하다 못해 짜장면이라도 얻어먹는다. 그러나 인정대문에 망할 수가 있다. 콧구멍이 안 보이는 부자는 작은 돈에는 인색하나 명예로운 일에는 크게 쓴다. 콧등이 높은 여자는 겉치례와 허황됨을 좋아하고 남자를 업신여긴다. •턱 말년운을 의미하며 이곳이 두둑한 이는 말년이 편하다. 여성이 턱이 뾰족하면 말년에 남편, 자식복이 있으며, 권력을 가질려면 뾰족한 턱이 유리하다. 정주영처럼 턱이 두터운 이가 정치를 하려하면 실패하기 쉽다. 두 토끼 즉 정권과 돈을 동시에 취하려 하면 관재가 따르기 쉽다. 몽골인 들이 대개 턱이 약하다. 그래서 징기스칸이 권력을 가진 것이다. •턱 옆 관골 정몽준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도량이 넓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정확한 기회포착에 능하다. 50세가 넘어야 성공하며 대기만성형이다. 모든 사람에 있어서 관상에서의 운세는 이마가 15세, 눈썹은 30세, 코 끝 50세, 입은 60세, 턱이 70세의 운세에 상당부분 작용한다. •눈두덩이 (전택) 풍만한 눈두덩이는 의욕이 높고 성공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지가 있다. 살이 없고 쏙 들어간 눈두덩이는 부모 유산이 없고, 불효하고, 방탕하며, 옴팡 눈이라고도 하며 사기성이 짙다. 서양인이 그러한 경우가 많다. •IQ, EQ, CQ CQ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모방을 싫어하는 창조력 있는 사람형으로서 컴퓨터 등에서 다양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다. •눈썹 바로 윗부분의 일자로 돼있는 튀어나온 부분 기억력이 나타나는 곳이며, 학구적이면서 진지하나, 고정 관념에 집착하기 쉽다. 창조적인 것은 아니며 수학, 물리, 법학에 성공할 수 있다. •이마 가운데 이곳이 윤기 있고 튀어나오면 직감력과 아이디어가 좋다. 대인관계에 능하며 검사, 기자, 경찰 및 참모직에 좋으며 재치 있고 임기응변이이 좋다. 골상이 나쁜 고승 없다고 한다. 여기저기 나온 골상의 스님은 괴승이라 하며,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관상보다는 골상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건망증은 천재의 필수요건 ! 선비는 필수 지필묵(紙筆墨)이라고 했다. 왜 ? 머리 용량은 한계가 있고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이미 얻은 지식을 담고 있기보다는 펜과 종이에 저장시켜 놓는 것이 새로운 것을 연구하기에 머리도 복잡하지 않고 일하기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큰 지혜는 무지해서 어리석은 듯하고 크게 찬 것은 뭔가 모자란 듯 하다고 한다. 현대병의 원인인 스트레스나 과로 또한 정신적 원인은 바로 과다한 두뇌혹사에 있다. 공허나 지극한 비움, 침묵의 정적은 모든 성직자들의 계명이고 대개의 성실한 성직자들은 장수하고 있다. 두뇌를 혹사해도 일의 성패에 그리 큰 효율성은 없다. 큰 전략과 작전이나 큰일을 계획하고 있은 이는 오히려 이러한 자세하고 꼼꼼한 기억력은 방해가 될 뿐이다. 적은 돈, 셀러리맨, 안정된? 생활을 보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백지에 그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듯이 명상의 무념무상 이나 과학자 특허, 발명가나, 예술가의 발상 또한 이 지극히 맘을 비운 트랜스 상태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 없이 맘을 쉴 때, 즉 화장실에서 그들은 가장 많은 창조적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한다. 이 상태의 공부가 깊어지면 무념무상, 무감각, 무아의 삼매에도 들 수 있고 이땐 심신의 탁기도 스스로 조절 할 수 있다. 산 속의 도인들이 공부하는 집착 소유를 버린 자연 소요적 삶이나 속세라 칭하는 사회에서 공부하며 인류에게 편리한 과학과 문화를 일궈 가는 자들은 큰 차이가 없다. 그들은 인류를 위해 공헌하고 있다. 인류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모두가 크고 작은 성직자이다. 다같이 인류를 위한 사랑을 펼치는 수행자들이고, 대승적 봉사자 들이다. 왜 성속(成俗)이 하나(一如)라고 했겠는가. 도인이 따로 없고, 교회, 절등의 수행처가 따로 없다. 오히려 산 속에서 시주나 얻어먹고 혼자만 이기심으로 닦다가는 집착을 버리기 위해 열반에 집착하는 이율배반적인 도인보다, 사회에 일조를 행하는 정직한 청소부가 더 수승하다고도 볼 수도 있다. 자기를 버리려 산으로 갔으면서도 자기를 더 찾으려고, 살라고 한다. 찿고 잡으려면 멀리 가는게 도이다. 진리는 바로 네 옆에 있다. 우주적 예술의 실행속에서 네 진아로 돌아가라. 스스로 죽으려면 살 것이요, 살려고 애쓰면 죽을 것이다. 석가가 말한 안일함도, 고행도 아닌, 수행은 산 속의 집착도 아니고 극단적인 육체적 고행도 아닌 사회에서 직업봉사와 함께 하는 생활 명상에 있다. 그것이 곧 ‘중도(中道)’의 길이며 이 시대의 요구이다. •우리도 노벨상 받을수 있다. 연구, 공부의 생활화 원칙을 교육에 적용시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능지수만을 기형적으로 키우고 있고 인정사정 없는 걸어다니는 ‘육법전서’이나 ‘컴퓨터’같은 인간들을 키우는 사회제도이다. 시키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다. 돈과 권력의 노예들, 지식의 노예들이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는 스스로가 불쌍한 줄 모른다. 마치 마약중독자들이 마약에 마냥 취해서 행복해 하듯이 노름꾼이 화투장의 하우스게임도박에 취해 다른 일들은 눈에 보이지 않듯이... 그러나 삶은 길지 않고 자식이 자기대신 사는 것도 아닌데, 자기 자식, 내 돈, 내 차, 내 집에 너무 집착하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라. 모든 유산을 주님 즉, 교회나 절이 아닌 이웃을 위해 스스로의 동지들 손에 지어진 사회 교육기관에 기부하길 바란다. 부자가 3대를 못간다. 네가 망해도 네 자손들이 그 시설에서 영원히 혜택을 받을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현세의 원리는 이것도 하나의 우주이고 저것도 하나의 우주이다. 서로의 세계관을 존중하되 그 근원인 하나의 진리를 밝혀나가야만 한다. 만인의 정신, 육체의 공동 행복을 위해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이고 그때서야 ‘군중속의 고독’이 사라져 갈것이며 행복의 에너지가 우리를 감쌀것이다. 어떤 이들은 과로사로 인해 일찍 죽거나 경제 동물, 돈 벌레, 책벌레란 소리를 들으면서 나이 들어서 죽을 때가 가까이 와도 많은 재산을 자식 몇 명에게 남기려 한다. 그들이 몇 대나 갈 것 같은가. 사회적 실질공부를 가르치는 전인교육 시설을 우리가 힘을 합쳐 만들고 상속 가능한 회원제를 기본으로 운영한다면 이 나라가 끝날때까지는 네 자손들이 우선적 혜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그 권력과 재력에 만족하고 있다. 뭐든지 만족하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단지 그것으로 인해 남들이 피해를 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돈’들은 과연 누구의 ‘피’인가? 그러나 그러한 교육을 받고 자란 지배 계층에 의해 전국의 종교나 자연 경관 학교, 관광지, 문화시설들은 점점 더 삭막해져 왔었고 동강의 댐 공사도 정부가 아닌 시민단체에서 반대해 백지화 됐다. 우리는 내부의 깊은 곳에서 새소리 물소리 들리고 그것을 닮은 우리의 정서지수에 도움을 주는 교육과 광신이 아닌 우주의 진리를 가르치는 문화시설들을 원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으로 모든 선진국들이 추구하는 바이고 자연으로의 회귀와 맘의 법칙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법칙은 음율, 화율(畵律), 무율(舞律)등이 있다. 그것을 모든 국민이 한가지씩 악기, 춤, 음악을 몸으로 소화해 내고 그 재능을 국가적, 마을축제때 서로 즐길 수 있을 때 지금의 월드컵 축제와 같은 온전한 국민의 화합과 정서적 정신적 영혼의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그것을 근간으로 하여 축제문화의 발전과 상하가 모두 음율의 화음(和音)처럼 화락(和樂)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 화음과 화락의 이 화(和)라는 글자가 같은 글자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그냥 듣고 흘려버릴 얘기가 아니란 말이다. 공자가 말한 화합이 제일 귀하고(和謂貴) 그것을 위해 음악을 바로 잡겠다고 주장하는 핵심을 무시하는가 ! 이 전통윤리를 말하면서 전통을 버리는 교육을 하는 이시대의 무식하고 뻔뻔한 권력의 이단자들아. •히딩크의 증언 대표팀 선수들이 고참은 고참끼리, 신참은 신참끼리 어울리고 점심때도 따로따로 나뉘어져서 식사를 하기에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우리 조선 문화의 선무당식의 잘못됨에서 시작됐다. 전통 선도(仙道)에서는 작은 생선을 끊이듯이 천하를 경영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같은 인간에 있어서 반말과 존대말의 차이도 없다고 얘기한다. 너무 인위적으로 자연격 신의 오묘한 섭리를 바꾸려하면 인위적으로 끈어진 조그만 생선의 살들이 끓은 물에 풀어지고 뭉개져서 먹을 것이 없어지듯이 조심해서 자연의 섭리에 맞게 해야 한다는 자연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 500년 동안 인위적인 법 제도에 의해 자연법칙이 심하게 일그러져 왔다. 너무 잘하려고 여기 저기 끊이고 굽고 손대다 보니 결국 생선이 타 버리고 살점들은 뭉개져서 먹을 수도 없게 돼 버렸다. 민주주의적 인간의 존엄성이나 불교적으로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불성 혹은 선도(仙道)에서 말하는 나이나, 지위와, 언어 격식에 얽매임이 없는 비유인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에 대한 비유에 대해 또는 인위적 윤리로 예수교의 어린아이 영접이나 사랑, 형제 자매론의 원리에 모두 어긋나고 있다. 지금의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전통윤리 교육관’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 개혁과 민주가 아닌 밥그릇수 많은 이를 대접하고 자기 주장을 접는 것을 주로 가르치고 있다. 겉으로는 인(仁)을 내세우고 효(孝)를 내세우나 정말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인과 효를 가장한 치열한 군신유의론에 의한 개인이나 국가 간의 전투로 일관되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창조주 아버지, 어머니가 내재해 있고 진짜 효도는 나이를 떠나 인간으로서 나와 남을 가리지 않고 서로 간에 존중해야함을 이 사랑의 절대적 원리이나 기득권자의 권리가 교묘하게 위장하여 내재된 것이 바로 지금의 퇴색된 유교 윤리다. 4강에 올랐을 때 TV심야토론에서 어떤 사람은 그들이 헌신과 인내, 어떤 출연진은 한국의 ‘흥’이 이루어낸 결과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한은 ‘인내’로 흥이 ‘열정’으로 나왔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어렸을 때, 태어날 때부터 돼지우리에 있으면 그곳이 더러운 줄 모른다. 한과 흥의 대폭발 이라고 ? 무엇이 그들을 한을 가지게 했고 무엇이 우리의 흥을 억압해 왔던가 ? 바로 인간을 밥그릇 신분, 지위, 학벌 순으로 갈라놓은 시발점인 허례적인 유교 문화이다. 무엇이 우리의 단군 이래의 전통인 흥에 찬물을 끼얹었었나 ? 국민적 흥의 문화인 남사당패, 태평소, 단소를 곁들인 사물놀이, 탈춤, 3국 시대 고대의 국가적 초대형 자생적 무속 축제를 죽이고, 조선으로 그나마 전해 내려오던 마을 축제인 일주일이상 하던 마을 굿을 누가 죽였던가 ? 조선의 유교가 그 규모를 죽이고 지금의 서양문화가 99%까지 우리의 놀이문화를 멸종시킨 것이다. 소수 양반들을 위해 행해졌던 고급스럽고 사치스런 지금의 룸싸롱 문화인 거문고, 가야금, 한량 춤이 아직도 전자의 대중문화를 압도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한을 키워왔는가 ? 예술적 과학적 재능있는 재인들과 무인을 무시하고 국민의 흥을 말뿐인 문인들의 유교의 문자향의 격식으로 서민들의 혈기를 억압해 왔다. 그들의 순수와 자유를 양반이라는 신분과 유교적 껍데기 지식으로써 천시하고 능멸해 왔던 것이다. 그들의 사대주의는 결국 우리를 외침이 많은 협소국가로 전락시켰다. 고대 전쟁의 신이며 단군 환웅이신 ‘치우 천왕’이 지금의 월드컵에서 뿔 달린 붉은 악마로 살아나고 있다. 중국 한족과 1000번을 싸워서 1000번을 이겼다고 한다. 한족은 그를 뿔 달리고 무시무시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 최초로 철기와 뿔 달린 투구를 써서였을 것이다. 향우와 천하를 놓고 싸우던 한고조 유방도 전쟁 전엔 치우 천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출전했다고 한다. 그땐 우리를 하나로 묶는 국가적인 축제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유교가 들어오면서 도가적 자연주의 성향을 띠던 대중의 음악, 춤, 수행의 초국가적 ‘흥’의 축제문화는 사라지고 협소한 한반도로 유교적 문리주의 속에 우리의 무대가 줄어들어 버렸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매년 이러한 축제를 통해 우리의 에너지와 힘을 키우기를 원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가능성을 가진 고유의것, 아니면 서양것 이라도 온전한 축제 문화를 가지고 있는가? 없다. 축제에는 몇가지 요소가 들어가야 만하다. 그 나라 교유의 문화들을 기반으로 그 독특함을 가짐이 바람직하며 춤, 음악, 술과 음식 등의 먹거리 문화를 통한 열정과 서로를 하나로 화합시키는 자유와 사랑이다. 이 열정은 ‘샥티’ ‘쿤달리니’ 또는 ‘기(氣)’라고도 한다. 유교적인 지식과 논공행상의 기가 아닌 실생활에서 국가, 마을, 곳곳의 성스러운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롭고 힘이 넘치는 축제문화를 통해서만이 일으킬 수 있는 에너지다. 우리는 유교를 통해 실생활의 열정적인 추진력인 기(氣)를 당리당략적인 유교적 논리속의 지식적 기로 숨겨 버렸고 그 기는 제 기능을 잃어 버린지 이미 오래다. 그나마 농민 평민 사회에 남아있던 풍습들은 서양의 돈과 과학, 물리적 힘에 묻어온 그들의 종교 문화적 축제논리와 그들의 습관에 물들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설날, 추석때 동네아이들이 이웃에 세배를 다니지 않는다. 시골의 스레이트집들도 이제는 각각 떨어져 연관성 없이 사는 아파트와 같이 돼가고 있다. 우리의 축제를 되살리려면 남의 나라의 신이 그것(무속적 축제)을 원치 않는다는 그릇된 경전해석의 논리에 의해 우리의 전통 축제의 씨앗부터 밟아 버리는 일들을 재고해야 할것이다. 또 그들 서양의 문화를 우리가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좋은것보다 나쁜 것들을 많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들의 자유로운 정열을 지닌 춤 문화는 유교적 교육을 받은 정치인들에 의해 상스럽다고 치부되어 지하 카바레로 숨어들어서 우리의 정신과 열정적 끼를 지하실의 곰팡이로 피어나게 하고 젊은이들은 어두운 나이트클럽에서는 몸을 흔들줄 아나 밝은 야외에서나 낮에는 움직일줄 모르고 서로 눈치만 살핀다. 춤뿐이 아닌 발표력도 떨어진다. 키스도 밝은데서는 하지도 못하는 것들이 어두운 데서만 할 줄 안다. 사랑이 부끄러운 것인가? 유교적 습관을 가진 나이든 이들의 비판 즉 뒤에 호박씨 때문이다. 나와서 무엇을 하라고 하면 우물주물하고... 물론 학교에서도 탈춤을 비롯한 전통 춤이나 고대 현대의 서양 춤 태평소, 단소, 대금, 서양악기나 미술, 연주 등의 공부를 필수로 시키지 않는다. 무조건 국, 영, 수다. 그들 중 과연 몇%가 수학자나 국어학자가 되는가 ? 못사는 동유럽에서도 국민 누구나 한가지 악기는 다룬다고 하는데... 그들도 교민들에게 우리나라 학생들이 불쌍하다고 말한다. 이런 문화적 교육을 통해 국민의 정서 속에서 진정 그것을 즐길 줄 안다면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의 행복감은 더욱 고조될 것이며 그들의 여가 생활이나 스트레스를 세계1위 소비율을 자랑하는 술이 아닌, 담배가 아닌, 예술로서 풀 수 있을 것이다.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다. 우리는 밥벌레가 아니다. 밥 먹는 기술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정신과 사회를 하나로 화합시키고 고리타분한 윤리적 지식 없이도 그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행복하게 하는 교육을 원한다. •나는 하루 밥 두끼만 먹고 얼어죽지 않으면 행복하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동지들 나의 아들, 딸들이 나와 같이 또는 나보다 더 행복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해 살고 싶다. 수백만 평의 산과 강물을 한 마리 ‘새’에게 다 주어도 새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 한 종기의 물과 한 홉의 먹이이다. 그러나 인간은 먹지도 못할 것을 쌓아두거나 아니면 썩여서 버리기도 한다. 또는 새 보다도 못하게 그 강과 산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자기 새끼와 마누라와 함께 그곳을 소유하려 든다. 자기 새기는 자기 분신도 아니고 소유도 아니다. 전생의 인연 따라 만났을 뿐... 천국을 아이에게 주려면 부자와 낙타의 비유를 알라. 즐거움은 만인과 함께 함만 못하다. 수만 마리의 다른 새들을 그 큰산중의 판자로 이어진 한 그루 나무에다 모두 몰아넣고 한 그릇의 물과 먹이만을 주고 힘겹게 살라고 한다. 그러면서 변태적인 삐뚤어진 심성으로 그들이 찿아 와서 애걸하고 아부하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정치 권력에 중독된다고 말한다. 한번 정치의 권력에 맛들인 사람은 평범한 우주원리인 봉사와 섬김에서 멀어지는 수가 많다. 그러나 산은 몇 년 않가서 그새의 명이다 하면 또 다른 권력 집착적 새에게로 넘어간다. 있을 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공부하고 그 산을 수만마리 새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르라. 권력도 도박처럼 중독된다. 최근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비리를 저질렀던 모 대통령의 아들이 교도소에서 나와 다시 출마한다고 하듯이 한번 맛들인 권력과 아부는 황제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주(主)님과 사역 즉 쓰임(用)에 대한 말장난들. 예수교의 주님과 사역. 동양의 주체(主體)와 쓰임(用). 노자의 서른개의 쓰임과 그것이 모인 공(空)한 무심(無心), 즉 주님(主)의 자리. 불교에서 말하는 이름지을 수 없는 마음의 불성인 주인공(主)과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로 된 심부름꾼의 사역. 이 모든 지구상의 유불선 최고의 논리는 단 두가지로 집약된다. 주(主)와 종(從) 육체의 일원적이면서도 양분된 이 원론적 논리이다. 음, 양이라고도 하며 천지, 선 악, 천국, 지옥, 정신, 육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거짓 방편들을 사람들은 은유로 보지 못하고 직접 삼켜 버린다. 독단적 광신이나 복이나, 천국에서의 영생만을 구하는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깨닫게 되겠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성자도 아니고 그러한 시험에 이길 수 있는 자가 드물다. 불교의 방편은 예수교의 은유와 같다. 따라감을 뜻하는 종(從)을 육체적 노예의 종으로써 해석하고 있고 주님을 따라 근원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헬링어의 ‘돌아오라’의 은유를 ‘회개하라’ 라고 잘못해석하고 있다. 그 원인은 물론 시발점인 서양인들의 정신 철학적 무지에서 나왔다. 유대인들은 선무당처럼 신명 성령이라고도 불리는 귀신들과 신내림 받아 대화할 줄만 알았지, 단군 문화의 원류인 한국처럼 대 우주의 원리인 음양 5행론이나 소우주인 인체의 365혈의 신비를 모르고 있고 관찰과 논리에 접근하는 정신 과학적 논리라 매우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서 물질과학이 발달하면서 동양이 발견치 못한 새로운 것들을 연구해 오고 있으나 정신과 육체는 아까도 말했듯이 주(主)와 종(從)의 논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도 그 종을 주위에 올려놓고 자연을 파괴하고 자기 중심의 기복적 광신에 젖어 인류의 행복을 짓밟고 있다. 누가 감히 너희의 믿음이 기복 즉, 복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는가? 서로가 소유적 복을 버릴 때 모두가 그 복을 공유할 수 있다. 자기 것, 자기 집, 자기 천국만을 구하는 소유에 물든 자들이여! 만일 그 신이 주는 것이 없다면 너희는 모두 그 신전을 떠나리라. 그러나 진정한 주님의 본체인 신은 인류에게 광신적 섬김을 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 그릇된 상상 속의 SF영화처럼 인류를 지배하려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신성과 능력의 가능성과 씨를 가지고 있는 인류에게 그 씨앗을 틔우게 하기 위해 육체를 고기로써 주고 피를 물로서 베푼 것이니, 너희도 바라지말고 오직 너희 살과 피로 베풀고 봉사하라. 그의 이적보다 더 큰 이적도 행할 수 있으리라. 천국이나 영생의 은유적 의미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때이다. 면죄부적 의미의 11조나 광신이 아닌 것이다. 육체는 썩고 영혼은 죽지 않고 계속 윤회하여 그때에 인연 있던 성자들의 인도를 세세, 상생에 걸쳐 받고 삶을 통해 교육받는다. 그것이 그가 말한 진정한 그와 영원히 함께 하는 영생이고 육체에 인간이 만든 성전에 있지 않는 것이다. 마음마저 죽으면 그 또한 열반이라는 이름의 영생이 된다. 죽음과 삶은 같다는 것이다.

첨부파일 : 현대 미술의 이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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