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청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람재단 비리척결을 위한 노숙투쟁이 벌써 한 달째다. 스물일곱 살에 들어가 서른세 살까지 살았던 은혜장애인요양원. 8년여 동안의 시설생활은 나에게 여러 가지 추억들을 제공해 주었다. 좋은 추억과 안 좋은 추억, 기쁨과 슬픔, 안타까움 등 갖가지 감정들이 교차한다.
오랜 시간, 차를 타고 도착한 강원도 철원의 산 속에 벽돌로 쌓은 큰 건물. 2층의 사무실로 들어가 입소절차를 마치고 삭막한 느낌의 경사로를 지나 큰 문을 열고 3층 복도를 지나치는데 목욕시간이었던지 벌거벗은 성인의 생활인들이 부끄러움도 모른 채 복도를 활보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들어간 곳이 301호였다.
처음 나를 맡았던 보모는 참 인자한 인상이었다. 당시 40대 중반의 아주머니셨는데 인상만큼 마음씨도 좋으셨다. 저녁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그분은 저녁식판을 들고 와서 먹여주시며 하시는 말 “집 밥보다 훨씬 못 하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으렴.” 그리고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오셨다. 내가 27살이라니까 자신의 막내아들과 동갑이라며 반가워하시고는 요양원에서 아들이 생겼다고 좋아하신 기억이 난다. 그분은 우리 방 A조 보모였다.
다음 날 9시가 되자, 또 다른 여성분이 들어왔다. 환경이 바꿔서 잠을 못자고 계속 누워 있었는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 살짝 봤더니 “힘든 xx가 들어왔군! 왜 이런 xx를 나한테 줘! 힘들어 죽겠구먼.” 날카롭고 기분 나쁜 인상의 아줌마였다. A조 보모가 가자마자 그녀는 휠체어를 밀고 오더니 “야, 일어나!” 내가 머뭇거리자 “일어나지도 못해?"날카롭게 노려보며 거칠게 일으키더니 휠체어에 태우고는 바리캉을 든 군인 앞에 내 머리를 들이댔다. 그녀는 우리 방 B조 보모였다.
우리 방 B조 보모는 B조 보모 중 대빵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하라는 일들은 앞장서서 했으며 방에서 생활인들을 돌보는 것보다 다른 B조 보모들을 독려하며 모심고 논매고 소 풀 모으는 등 바깥일을 더 좋아했다. 그 보모는 욕을 입에 붙이고 산다. B조 보모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폭력 쓰기 또한 좋아했다.
그 당시 요양원 보모들은 주로 철원 인근에 사시는 아주머니들로 구성 되었는데 A조와 B조로 나뉜 2교대였다. A조 보모가 아침 9시에 들어와 하룻밤 자고 다음 날 B조 보모가 같은 시간에 들어오면 인수인계하고 나가는 식이었다. 한 보모 당 12명 정도의 생활인들을 돌봐야 했다. 요양원 전체 약 500여명의 생활인들이 살았는데 70%~80%가 정신지체장애인이거나 발달장애인이었다. 우리 방에도 12명의 식구들이 있었는데 나와 민용이란 친구 빼고는 전부 정신지체 발달장애인들이었다.
B조 보모가 나가는 날 아침, 우리 방의 어린 자폐장애를 가진 친구가 세수하고 나서 화장실 문고리에 걸려 있던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는데, 우리 방 B조 보모가 그것을 보더니 갖가지 욕설을 퍼부으며 그 아이를 개 패듯 패기 시작했다. 자신의 수건을 썼다는 이유였다. 이 보모는 우리들을 동물로 취급했다. 생활인들을 씻길 때도 고무장갑을 끼고 씻겼으며 생활인들이 자신의 몸이나 자신의 물건들을 만지는 것에 대해 극도로 싫어했다. 나는 이날로 그 보모에 대한 모든 정이 다 떨어졌다.
반면 A조 보모는 정 반대였다. 그래서 A조 보모가 들어오는 날은 봄이었고 B조 보모가 들어오는 날은 겨울이었다. 우리 방에 정신지체, 발달장애 생활인들도 그것을 느낀다. 요양원 측에서 생활인들에게 보모들을 ‘엄마’라고 부르게 했다. A조 보모는 마치 엄마처럼 우리 방 생활인들에게 참 잘했다. 먹을 것이 귀하긴 했지만 A조 보모가 있는 날이면 먹을 것이 풍부했다. A조 보모는 어디서 갖고 오는지 잘도 갖다가 생활인들을 먹였다. 반대로 B조 보모가 있는 날이면 생겼던 먹을 것도 없어진다. B조 보모는 우리 방 생활인들이 “응아를 많이 한다”고 먹이질 않는다. 웃기는 일은 A조 보모가 있는 날, 많이 먹은 우리 방 식구들이 B조 보모가 있는 날, 똥을 싸면 그것을 치우면서 B조 보모는 A조 보모의 욕을 해댔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많이 먹이고 나만 고생 시킨다 식으로….
B조 보모는 나와 참 악연이었다. 그와 나는 서로를 죽도록 싫어했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6년을 살았다. 나는 그 보모의 독선적이고 나를 비롯한 우리 방 생활인들을 야만적으로 대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고 그 또한 내가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하지 않고 건방지다며 화를 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와 찢어진 계기가 있었다.
다름 아닌 그가 내게 가한 폭력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밤에 코피가 났던지 베개에 코피가 묻어 있었다. B조 보모가 이불을 개다 그것을 보고 더럽다는 투의 욕을 했고 그 욕에 기분이 상한 나는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냐고 항의했다. 그 순간, 코피 묻은 베개가 내 얼굴로 날아왔다. 화가 나서 더 크게 반항했더니 이번엔 그의 발이 슬리퍼가 신겨 진 상태로 내 목을 강타했다. 나 역시 화가 나서 “당신 잘라 버릴 거야!”라는 말과 함께 그에게 덤볐지만 역부족이었고 일단 그 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그 뒤 나는 우리의 동료(지영, 철규, 희영)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2층 사무실 앞 자원봉사자실을 점거하고 사무실 측에 강한 항의를 했다. 우리들의 요구는 B조 보모의 해고였다. 이런 식으로 이틀을 버텼다. 그것은 요양원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들 네 명은 손수건에 혈서를 썼으며 그래도 먹히지 않자 나는 요양원 가파른 길에서 구르는 자살시도도 하게 됐다. 결국 B조 보모는 시말서를 썼으며 나는 다른 방으로 옮기는 조건으로 일단락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B조 보모 또한 시설 비리의 일부였다. 재단은 500명 규모의 시설을 지어놓고 500여명의 장애인들을 수용해 정부보조금을 타 먹고 요양원 주변의 땅을 사서 농사와 가축을 키우고 그곳에 드는 인력들을 요양원의 생활인들을 돌보는 보모들로 충당하고 그 보모들을 관리할 짱을 세워 관리하게 하고 생활인 보조에 투여될 보모들은 출근하자마자 외부로 끌려 나가 엉뚱한 일로 고생하고 들어와 그 스트레스들을 방바닥에 소·대변 볼 수밖에 없었던 생활인들에게 욕설로 폭력으로 푸는, 이 모두가 시설비리의 악순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