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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방송 불가야!

이정란 |2006.09.13 13:27
조회 632 |추천 2

내가 의학프로그램을 집필할 때의 일이다.

 

참고로, 이 프로그램은 월요일 부터 금요일 까지 매일 아침 7시부터 7시 30분

까지 30분간 방송되고,

매 주 마다 병원(양방, 한방) 한 곳을 정해서 큰 주제를 요일마다 세분화 하여

다양한 질환이나 의학 상식에 대해 다룬다.

 

보통 의학 프로그램의 경우, 병원에서는 저절로 홍보가 되기 때문에 섭외에

흔쾌히 응하기 마련이고,

시청자도 건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은 욕구에 제작비 대비 시청률도 나쁘지

않게 나오는 편이다.

나 또한 의학 프로그램을 1년 이상 해오던 터라 의학프로그램에 재미를

느끼며 한창 일 할 때였다.

 

사실 방송일을 하면서 작가에게 제일 큰 고통 중에 하나는 아이템 찾기 일 것이다. 수많은 방송국과 프로그램을 통해 다뤄지고 또 다뤄지는 아이템들,

이왕이면 같은 아이템을 어떻게 하면 다른 시각으로, 더 재밌고 유익하게

다룰 것인가가 큰 관건이다.

특히, 의학프로그램은 그 성격상 오락 아니면 교양인데,

내 프로그램은 교양이니 만치 자칫 딱딱하고 전문적이기 쉬운 프로그램을

조금은 쉽고 재밌게 접근하고자 병원이나 의사 선정에 고심을 하기 마련이다.

 

한번은 '성'에 대해서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섭외에 들어갔다.

그동안 우리에게 '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였나?

늘 감추고 쉬쉬하고...그래서 더 음지로 몰려 왜곡된 성의식을 양산하기 마련

아닌가?

해서 나는 방송이지만, 꼭 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이 주제를 잡았다.

 

몇 몇 괜찮은 성 클리닉이 물망에 올랐고 자료 조사와 전화 취재를 통해 딱 한 곳이 낙찰됐다.

의사와 직접 만나서 우리 프로그램의 취지와 방송 주제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전문의는 대뜸 나에게 "자위해봤냐"고 물었다.

 

이런 경우 내가 "예" 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니오"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는데 대뜸 자위기구라며 바이브레이터를 던져줬다.

작가가 대본 쓰려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줄테니 오늘 집에 가서 꼭 써보라는 것이다.

성의학 전문의라 그런지 전혀 거리낌없이 대하는데 초보 신부인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의사는 주제가 주제인만큼 함께 출연하고 싶은 연예인이 있다면서 장미화 씨를

거론했다. 일전에 성에 관해서 장미화씨와 입담좋게 나눈 내용을 테입으로 제작한 적이 있다며, 판매면에서나 콘텐츠 면에서나 아주 좋았다고 했다.

나는 자료라며 받은 그 테입 4개를 집에 오면서 들었다.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성에 관한 얘기들을 이렇게 전해 들으니

재미도 있고 한편으로는 누가 차에 탈지도 모르니 이 테입은 빨간 테이프 처럼

숨겨놔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평소 아나운서 한 명이 진행하던 것과 달리 장미화 씨를 특별 캐스팅 해서

녹화는 재밌게 잘 진행됐다. 

 

첫날, 월요일 방송분의 주제는 '처녀막'이였다.

우리가 흔히 처녀의 상징으로 '처녀막'을 떠올리고, 첫날밤에 혈흔이 없으면

처녀성을 상실했다고 알고 있어서 처녀막 재생 수술이 인기라는 말까지도 있다.

 

그런데, 성 의학 전문의는 이런 잘못된 상식에 대해 속시원히 풀어줬다

처녀막이란 사람에 따라서 모양도, 크기도 다르고, 특히 반지 모양의 처녀막일 경우 첫 경험 때 혈흔이 나오지 않기도 한단다. 또 사람에 따라서 두번째나 세번째 성경험 때 처녀막이 파열되어 혈흔이 나오는 경우도 있단다.

또 자전거를 타기만 해도 파열되는 경우도 있고, 흔치는 않지만 태어날 때부터 처녀막 없이 태어나는 아기도 있다는, 정말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성에 대한 모든 것을 거침없이 말해줬다.

 

그리고,

이튿날(화요일)의 주제는 '불감증'이였다.

우리가 흔히 불감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내용- 불감증은 전적으로 남편 탓이다? 빈번한 자위는 불감증의 원인이다? 여자도 포경수술을 해야한다? 발목이 가는 여성은 성감도 좋다? 불감증은 완치가 가능하다?

 

이렇게 일반인들이 궁금해하는 주제들만 모아서 재밌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보가 전해져왔다.

방송이 나가다가 갑자기 끊긴 것이다.

이는 송출상의 문제도 아니였고, 바로 방송 내용의 문제로 인해

인위적으로 방송 중에 송출하지 않은 것이다.

윗 선에서 담당 PD를 불러서 어떻게 방송에서, 그것도 아침에 처녀막이니

불감증이니 하는 이런 주제를 다루냐며 호통을 쳤고, 다음 주는 어떤 아이템인지 보고하라고 했다.

다음주는 산부인과 질환이라고 하니까 당분간 '아랫도리'를 다루는 모든 질환에 대해서는 하지 말라고 까지 명 받았다.

그렇게 해서 성 클리닉은 첫날 하루만 방송되고 나머지 4일 분은 불방됐다.

대신, 일전에 방송된 치과질환이 재방됐다.

갱년기 성, 발기부전, 조루에 대해서 제대로 짚어주는 유익한 정보인데

불방이라니...

크.....아랫도리라니...

 

당장 내일 녹화인데...

어떤 병원을, 어떤 의사를 섭외할 것이며, 대본은 또 언제 쓸것이고,

VCR은 언제 찍고 편집할 것이며...난감했다.

참고로 방송국의 녹화 스케줄은 천재지변이 아니면 바뀌기 힘들 정도로

스케줄이 빡빡하다. 내일 못하면 모레도, 글피도 녹화를 영영 못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일단, 당장 내일 녹화 예정된 산부인과 원장에게 취소 전화부터 해야만 했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몇 번의 거절과 섭외를 통해 어렵게 이뤄진 섭외였는데,

그런 원장을 섭외했다며 목에 힘주고 다녔었는데 취소를 해야하다니

앞이 캄캄했다.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그 병원 홍보실장과 통화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뜸 화부터 내기 시작했다. 일단 사과의 말을 전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 이젠 인신공격성 멘트까지 날리기 시작했다

"네 방송국 사장보다 우리 원장님이 더 높으시고 고귀하신 분인데 어디다 대고

펑크를 내냐"는 둥...어쩌구 저쩌구...

 

그렇게 해대봐야 아무 소용도 없고, 오히려 그 병원에 대한 인식만 나빠질 뿐인데 그 홍보실장이라는 사람은 장장 30분을 나에게 욕을 해댔다.

나는 어찌됐든, 할 말은 없는 상황이므로 받아들이고 사과하고 또 사과하고 사과하고 해서 겨우 취소 전화가 끝났다.

이제 어디를 섭외할 것인지 정해야 했다.

사실 당장 내일 녹화인데 전날 오후 늦게 전화 돌려서 방송출연하겠냐고 하면, 아무리 방송출연하면 홍보에 도움이 된다고 하겠지만 우리가 얼마나 없어 보이겠는가, 그리고 병원과 원장의 스케줄상 맞아떨어지기도 쉽지 않고 말이다...

 

머리를 굴리고 굴렸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속에 전구가 탁 하고 켜졌다.

일전에 우리 방송을 보고 방송출연하고 싶다며 나에게 메일을 보낸 의사가 생각났다. 메일함을 뒤져보니 그대로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방송출연 전무, 유명세는 없고, 분야가 척추질환인데 우리 프로그램에 1달 전 방송 아이템에 관련 분야가 없었고, 1달 이후 섭외된 리스트에도 없으니 일단 다행이다.

사실 물 불 가릴 상황도 아니였지만, 그렇게 나쁜 아이템은 아니다 싶어

PD와 상의하니 빨리 진행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서브작가와 AD, 나는 번개불에 콩 궈먹듯이 일을 진행했다.

나는 당장 병원에 전화해서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당장 찾아가서 자료받고

촬영도 할 것이니 만반의 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문제는 내일 녹화 전 까지 내가 자료조사를 거쳐 대본 5일치를 다 쓸 수 있을것인지, 또 AD가 촬영하고 편집을 끝낼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였다.

사실, 방송에서 '할 수 있냐'는 질문은 없다. 그저 군대처럼 해야만 하는 거다.

그런 것이다.

 

당장 서브작가와 AD를 내 차에 싣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도착하니 저녁 8시.

의사와 상의해서 요일별 아이템을 잡고 대본 방향을 상의하고 자료를 받고

나는 집으로 갔다. 도착하니 밤 11시였다.

그때부터 007 작전이 시작됐다.

나는 대본을 하나 다 쓸 때 마다  서브작가에게 메일을 넣고, 그러면 서브작가는

CG (자막)를 뽑아서 다시 나에게 넘기면 내가 적절한 자막인지 여부를 확인해서 최종본을 넘기고,,,,

그렇게 메일을 주고 받으며 작업을 하고 나니 새벽 6시였다,

일단 대본이 완성됐으니 한 시름 놓았다.

눈도 붙일 새도 없이 바로 출근준비를 하고 녹화장으로 갔다.

모두들 초췌한 얼굴에, 불방으로 인한 팀내 분위기는 침체된 채로 녹화는 진행됐다.

녹화 내내 나는 스스로 검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문제되는 것이 없는지 대본을 보고 또 봤다.

사실 척추질환이니 일단 아랫도리는 해당되지 않고 기타 문제될 것이야 없었다.

 

녹화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의사도 방송 첫 출연이지만 나쁘지 않게 잘 했다.

녹화가 끝나면 늘 출연한 의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대타처럼 녹화를 성급하게 치뤄낸 의사, 프로그램의 메인작가로서

불방이라는 오명과 녹화 전날 급조한 대본, 담당 PD로서의 책임감...

 

그날 나는 많은 술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유독 금방 취했다.

그리고, 아까운 자식같은 내 대본들, 불방된 내용들이 불쌍했다.

그것이 그렇게 불방까지 될 것이였는지.

올바른 성의식을 전해주기 위한 것 뿐이였는데,

 

그렇게

한차례 폭풍우는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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