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있는여성혁명가, 송경령 ]
1. 유년시절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송경령은 1893년 1월 27일 상해의 유별난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둘 다 기독교 사회가 아닌 사회 속에서 사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송가수宋嘉樹와 서광계徐光啓의 후손이며, 그 당시로는 신식여성이었던 어머니 예계진倪桂珍 사이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언니 애령靄齡, 동생 자문子文, 미령美齡, 자량子良, 자안子安 등 6남매는 다 함께 뒤에 현대 중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지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송씨 왕조를 이룬다.
6남매는 모두 미국 유학을 하였으며, 송경령은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웨슬리안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송가수는 해남도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친척의 양자로 미국에 건너갔다가 보스턴에서 점원으로 얼마 동안을 지낸 뒤 도망쳐서 노스캐롤라이나로 가 남감리교회파의 도움으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전도사 출신이었다.
나중에 그는 상해에서 제분공장과 인쇄소 등을 경영하여 부르주아로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의 자유와 독립에 관심을 가져 일찍부터 손문의 민족주의 혁명사업을 경제적으로 도왔다. 이 같은 가정환경은 송경령에게 중국혁명에 대한 관심을 높여 주었으며, 졸업 후 영웅으로 숭배하던 손문과 결혼까지 하게 만들었다.
송씨 세 자매(좌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경령, 미령, 애령)
송경령을 비롯한 애령, 미령 등 세 자매는 모두 전족을 하지 않았으며, 미션 계통
인 중서여숙中西女塾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세 자매의 성품은 장녀인 송애령과 동생 송미령은 꽤 활발한 편이었는데, 송경령은 내성적이고 온순했으며 학구적이고 사색적이었다고 한다.
송경령은 16세 되던 해 미령과 함께 미국으로 가 뉴저지주의 서미트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한 뒤 이듬해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였다. 4년의 대학생활 동안 그녀는 학교잡지 {The Wesleyan}의 문학편집을 맡았으며, 네 편의 글을 실었다.
그 가운데 이란 글에서는 “조국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전제하고, 청조의 정치적 부패를 바로잡고 아편 추방, 전족 반대, 변발 폐지, 빈민의 생활상태 개선, 사회개혁 등 변혁에 힘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유학생이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그녀의 유학 목적은 뚜렷하였으며, 초점은 대중의 행복에 맞추어져 있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 성공 뒤 손문이 임시 대총통이 된 사실을 안 송경령은, 청조의 국기[龍旗]를 떼어내고 아버지가 보내준 공화국의 새 국기를 달고 신해혁명의 승리에 환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학교 잡지에 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혁명은 중국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왔다. 너무나 많은 고귀한 영웅적인 생명을 희생시킨 대가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유와 평등의 인간 권리를 확립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박애가 획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애야말로 자유‧평등의 기반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 내용은 그녀의 생애를 관철하는 사상과 행동의 원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비록 추상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인간 본연의 자세, 사회 본연의 상태에 대해 이미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었으며, 이제 혁명이 시작된 조국의 미래에 인간애, 정의, 평화가 실현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문장 속에는 애국심과 중국의 미래에 대한 신념이 가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귀국 뒤 송경령은 마음속에 늘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하던 손문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였고, 부모 친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 27세 연상의 손문과 대담하게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혁명운동의 중심으로 접근”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애정의 이상과 혁명의 이상”의 결합이었던 것으로 바로 그녀의 이상주의적 민족주의 열정의 징표였다.손문과 송경령의 생애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일이 일본에서의 망명 기간 동안 일어난다.
49세였던 손문은 한번도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 적이 없었다.
1915년 10월 25일, 일본 도쿄에서 찍은 결혼 사진.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송경령은 너무나 아름다웠으며, 손문의 혁명운동에 열정을 가지고 완벽하게 헌신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15년도쿄(東京)에서 결혼했다.
중국 같은 사회에서 그 결혼은 가십과 소문과 전설적 이야기의 온상이 되는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이혼을 강력히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이 결혼을 크게 반대하였으며, 손문의 절친한 동지이자 친구인 아버지 송가수도 반대하였다. 특히 정적들은 이 결혼을 비난거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이 훨씬 더 많았다. 급진주의자들이나 젊은이들로부터는 따뜻하게 환영 받았다. 그것은 봉건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뜻했으며, 또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간 송경령은 여성해방운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센세이션은 곧 사라졌고,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송경령을 훌륭하고 위엄 있는 퍼스트레이디로서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2. 중국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송경령과 손문의 결혼생활은 겨우 10년 동안이었다. 1925년 3월 12일 손문은 북경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들의 결혼생활 10년은 중국의 정치상황이나 그들 부부의 생활에서 늘 끊임없는 소요과 운동이 계속된 기간이었다. 손문은 권력의 안팎을 들락거렸고, 손문과 송경령 두 사람은 모두 위험의 안팎을 들락거려야 했다.
송경령은 손문과 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혁명전선에 투신하는 계기를 얻었다.
손문과 함께한 결혼생활 10년은 송경령에게는 정치를 익히고 혁명을 배우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결혼 뒤 송경령은 손문과 손문의 혁명활동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서이기도 했고 통역관이기도 했고 조언자이기도 했고 참모이기도 했고 동지이기도 했고 아내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송경령의 성품은 솔직하고 낙천주의적인 손문과 매우 잘 어울렸으므로 항상 손문을 즐겁게 해줄 수 있었다.
이 같은 송경령의 역할은 그 당시 중국문화 속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손문 경호원이었던 모리스 코헨(Morris Cohen)은 송경령의 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손문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부인인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가 집무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지 않았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를 즐겁고 행복하게 지켜줌으로써 손문이 생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1916년 원세개가 죽고, 이듬해 손문은 광동군정부를 수립하고 총통으로 영입되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안으로는 군벌을 정벌하고 통일을 하는 일,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을 쫓아내는 일이었다. 먼저 군벌을 없애기 위해 북벌을 시작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러자 1922년 군벌 진형명을 영입하여 관동군정부를 세우고 다시 북벌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형명의 배신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참담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때 송경령은 죽음의 고비 앞에서 남편 손문만 먼저 탈출시키고 자신은 임신 중인 아이까지 유산하며 며칠 만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겪은 일을 기록한 은 빼어난 문장으로 꼽힌다. 이러한 실패는 손문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방향 모색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소련 코민테른의 원조 아래 1923년 제1차 국공합작을 단행한 손문은 황포군관학교를 세우고 다시 북벌에 나섰다. 언제나 송경령과 함께였다
.
1924년 12월 북쪽 군벌의 요청에 따라 손문은 국민회의 개최를 요구하며 북경의 단기서段祺瑞와 회담하기 위해 북상하였다.
도중 잠시 일본을 방문하여 고베(神戶)여고에서 손문은 를, 송경령은 를 강연하였다.
드디어 천진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손문은 간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곧바로 북경의 협화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 뒤 손문이 서거하기까지 3개월의 투병기간 동안 송경령은 손문의 병상을 지키며 한 발짝도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침식을 잊고 병간호를 하였다.
손문은 타계하기 얼마 전에 슬퍼하는 부인 송경령에게 “동지는 계속 혁명에 힘쓸 것을 희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손문의 이러한 유언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손문에게 송경령은 동지였음을 비로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송경령은 사상으로나 혁명사업 수행에서 독자적인 활동으로 손문의 신뢰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1925년 3월 12일, 손문은 송경령과 동지들에게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국민혁명을 꼭 이루어달라고 당부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손문 만년의 중요한 시기에 모든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그와 함께하였다. 특히 5․4운동에서 손문과 청년운동가 사이에 매개 역할을 하였고, 손문과 레닌 사이에 왕래된 편지를 기초하였으며, 손문과 코민테른 대표 마링, 소련대표 요페와 가진 회담 및 공산당대표 이대교李大釗 등과 가진 회담에 그녀가 함께하였고, 국민당 개조과정에서 손문을 도운 보로딘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등 송경령 자신이 중국국민혁명에 입문함으로써 손문 만년의 주의나 정책에 그녀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손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마음으로 그녀는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았다. 10년의 결혼생활 동안 두 사람은 늘 함께 있었으며, 고난을 함께 나누고 혁명활동을 같이하면서 화합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나갔다.
죽음은, 남편이며 지도자이며 스승이며 아버지 같이 자애로운 사람 그 모두를 한꺼번에 그녀로부터 빼앗고 말았다. 그 뒤 손문의 기일이 되면 그녀는 늘 자기 방에 틀어박혀 가능한 한 공적 행사도 피하고 고독한 회상에 잠겼다.
3. 망명시절-혁명정치가로 홀로서다
많은 사람들이 송경령은 손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무대 뒤로 사라질 희미한 존재로 생각했고 또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앞으로 겪을 암담한 세월을 통해 자신이 지녀왔던 독특한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손문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열정 속에 우뚝 선 혁명정치가로 홀로 일어섰다.
이것은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남성 주도적 활동 속에서 여성으로는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으나 그녀는 이 일을 해냈다. 수줍음을 극복하고 훌륭한 연설자가 되기 위해, 또 공적 인물이 되기 위해 자신을 강철같이 단련시켰던 것이다.
손문이 죽은 뒤 송경령은 손문 유지의 계승과 그의 정책을 수호하기 위해 몸을 바쳤다. 국공합작의 상황에서 공산당원과 접촉하면서 대중운동에 참가하여 5․30운
동을 통하여 반제反帝노선을 견지하는 등 독립된 혁명정치가로서 자립하였다.
이후 국민(당)정부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민당 좌파 구성원으로서 무한정부武漢政府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의 4․12 반공쿠데타 이후 무한정부의 붕괴로 이어진 반反혁명적 사태에 부딪혀 송경령은 손문과 장개석의 이념적 단절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장개석의 국민정부와 결별을 고하고 모스크바로 정치적 망명을 떠났다.
송경령에게 이 시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좌절된 국민혁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손문의 이른바 신삼민주의와 3대정책을 좌파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되는 급진적 사회혁명이 선행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그녀 자신의 이상주의적 혁명관뿐 아니라 장개석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의 무자비한 반공정책이 국민혁명에 끼친 손실 때문에 송경령의 정치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송경령의 모스크바 망명시절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춥고 참담했다. 스탈린의 태도는 냉담했으며, 중국으로 돌아가서 차라리 장개석과 협력하라고 재촉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혁명 직후의 소련은 아직도 트로츠키파와 갈등하면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과 곤궁 속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함께 간 동지인 미국인 급진주의자 레이나 프롬의 죽음은 송경령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송경령이 진우인과 결혼했다는 근거 없는 추문이 신문에 나돌면서 손문 부인으로서의 위상에 큰 흠집을 주는 등, 너무나 큰 상처를 입어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결국 1928년 3월 그녀는 등연달鄧演達을 뒤따라 독일로 갔다.
게다가 함께 간 동지인 미국인 급진주의자 레이나 프롬의 죽음은 송경령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송경령이 진우인과 결혼했다는 근거 없는 추문이 신문에 나돌면서 손문 부인으로서의 위상에 큰 흠집을 주는 등, 너무나 큰 상처를 입어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결국 1928년 3월 그녀는 등연달鄧演達을 뒤따라 독일로 갔다.
이때부터 송경령의 가장 그녀다운 활동, 즉 국제적 반제국주의 반전 .반.파시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1927년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반제국주의 동맹에서
대회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회의에는 아인슈타인, 앙리 바르뷔스, 자와할랄 네루, 막심 고리키, 로망 롤랑 등이 참여하였으며, 송경령과 서로 교류하였다. 1929년에는 베를린의 반파시즘 국제대회에 출석하였으며, 그 뒤에도유럽의 반제평화운동에 꾸준히 참가하였다. 송경령은 그 뒤 이 국제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중국혁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나갔다.
3년에 걸친 독일 망명 세월 동안 송경령은 등영달과 함께 민생문제, 특히 토지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이 일이 송경령 개인적으로는 문장 실력을 높이는 큰 계기가 되었다. {신청년}에 실린 이대교․진독수․운대영 등의 문장을 읽고 등연달의 도움으로 문장연습과 숙어공부에 매달렸다. 유럽에 머무는 동안 송경령은 1929년 손문의 국장(남경 중산릉으로 이장)에 참여하기 위해 잠깐 귀국한 일 말고는 주로 독일 베를린에서 지냈다.
이 시절, 그녀의 귀국을 종용하러 온 사랑하는 동생 송자량에게 송경령은 “송씨 집안이 중국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송씨 집안을 위해 중국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 말은, 그녀의 철저한 애국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으로 송씨 집안은 이젠 돈에다 권력까지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중국의 정치를 점점 더 우익의 쪽으로 몰고 갔다. 이것은 송경령의 결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송씨 왕조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이 왕조를 붕괴시키려는 길고도 험난한 과업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민중 편에 서고자 한 애국심의 발로에서였다.
손문 부인으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발판으로 1920년대 국민혁명의 무대에 진출했던 이상주의자 송경령은, 손문의 혁명 생애 마지막에 도달했던 민족주의적 사회혁명으로서 국민혁명의 성과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기 위하여 그녀는 장개석 국민정부와 외로운 투쟁을 하면서 손문사상을 새로운 단계로 발전 변용시켜 역사에서 독자적 지위를 획득한 혁명정치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