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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처럼 음악처럼 살다간 그 故 김현식

서은주 |2006.10.12 13:16
조회 723 |추천 1

[Pilgrimage For Art ]  

Pilgrimage For Art

故 김 현 식

허무를 앓다 떠난 사랑의 가객

故 김현식의 휴먼다큐 

 

 

 

+쓸쓸한 거리에 나 홀로 앉아 바람의 떨리는 소리를 들었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설레는 이 내 마음이여(김현식)+

♣ 프로필

 

▣ 이름 - 김현식  

▣ 출생 - 1958년 1월 7일   

▣ 사망 - 1990년 11월 1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신체사항 -  키 : 180cm  체중 : 71kg  

▣ 데뷔앨범 - 1980년 1집 앨범 [봄 여름 가을 겨울]  

▣ 학력 - 명지고등학교 2학년 자퇴 

▣ 경력 

- 정성조와 메저스 멤버  

- 검은나네 멤버  

- 브루셀 멤버  

- 뿌리 멤버  

- 들개바람 멤버  

- 신촌블루스 멤버  

- 봄 여름 가을 겨울 멤버  

▣ 수상내역 

- 제3회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  

- 1992   제1회 다운타운 가요대상

♣ 그가 살아온 발자취

1958년 1월 7일 

서울 인현동에서 출생했다. 친가는 충남 홍성에서 조그만 사업과 농사를 함께 하는 유지 집안이었고, 외가는 충남 옥천의 명문가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캐나다에서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동생이 있다. 

   

1965년 

서울 혜화국민학교 입학. 3학년 때 옥천 외가에서 시작하는 갈포공장에 참여하려 아버지가 식솔들과 함께 내려가 죽향국민학교로 전학했고, 1년 후 다시 서울 삼청국민학교로 전학한다. 동료 가수 전인권이 이때 삼청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물론 둘은 서로 몰랐다. 

   

197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 중학교 시절, 초반의 성적은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아이스 하키, 기타 등의 과외 일에 몰두하면서 하락했다. 이 시절 그에게 기타와 60년대 미국 록큰 롤을 함께 가르쳐준 사람이 사촌형 양국정이다. 

   

1974년 

전기 경기고에 낙방하고 후기 명지고에 입학. 밴드부에서 음악을 배우다 2학년초 자퇴하고 종로 제일검정고시학원 등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상은 이때부터 기타를 메고 종로, 명동 등지의 통기타 업소를 드나들기 시작한다. 

  

1976년 

포크송 가수 이장희의 주선으로 김현식 1집 녹음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장희가 갑작 스런 부도사태 이후 미국으로 도피해버려 마스터 테이프까지 나온 상태에서 첫 번째 독집 출반이 무산된다. 

  

1980년 

서라벌레코드사에 의해 계획보다 2년 늦게 김현식 1집이 출반됐다. 아직은 앳된 목소리에 소울, 록, 트로트들이 융합된 김현식의 초기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앨범이었으나 거의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김현식은 주로 밤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1982년 

우연히 신촌의 한 의상실에 들어갔다가 만난 김경자 씨와 결혼한다. 동부이촌동 공 무원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인근에 피자가게까지 열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결혼이 가져다준 행복에 빠져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83년 

그가 늘 '나의 분신' 이라고 부르던 아들 완제가 태어난다 

  

1984년 10월 

[사랑했어요]를 타이틀로 2집 앨범 출반. 다운타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다. 조원익이 리드하던 그룹 '동방의 빛' 리드싱어를 맡았고, 그룹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리드하던 '메신저스' 의 싱어도 맡으면서 서서히 밤무대 최고의 싱어로 부각되어간다. 

  

1985년 

김종진, 전태관, 고(故) 유재하와 함께 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조직한다. '봄 여 름 가을 겨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가 리드하기 시작한 최초의 그룹이다. 그러나 누나, 어머니 등 가족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고 부인 김경자 씨와도 별거에 들어가 개인적으로 는 가눌 길 없는 고독이 시작되던 때이다. 

  

1986년 

[비처럼 음악처럼]을 타이틀로 '봄여름 가을 겨울'과 함께 3집 출반. 2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음악대중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는다. 서서히 여기저기서 "김현식이 도대체 누구냐"는 말들이 나오면서 얼굴 없는 가수로 통하기 시작한다. 

  

1987년 10월 

전인권, 허성욱 등과 함께 마약상용 혐의로 구속된다. 이때 복용한 마약이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 

  

1988년 2월 

63빌딩에서 삭발한 채 재기 콘서트.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관중들은 그의 재 기를 열화 같은 박수로 성원해주었다. 스스로 자신에게 가장 기억되는 콘서트라고 말했다. 

  

1989년 1월 

이정선, 엄인호, 한영애와 함께 '신촌불루스' 3집 앨범에 참여한다. [골목길] [환상] [바람인가 / 빗속에서] 등의 곡들에서 강한 재즈, 블루스 지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1989년 11월 

강인원의 주도로 권인하, 신형원과 함께 영화음악앨범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 참여한다. 이 가운데 싱글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각종 방송 차트에 오르면서 가끔씩 방송에 얼굴을 비친다. 그러나 마약에 이은 폭음으로 건강은 계속 악화돼 이때부터 병원을 주기적으로 드나든다. 

  

1990년 3월 15일 

[넋두리]를 타이틀로 한 5집 앨범과, '신촌블루스' 3집을 동시 출반한다. '신촌블루스' 3집에는 그가 부른 [이별의 종착역] 등이 있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6집 녹음과 '신촌블루스' '비오는 날의 수채화' 팀과 전국 각지를 누비며 라이브콘서트를 연다. 이때는 어쩌면 다분히 술의 힘에 의해 그의 몸이 유지되던 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1990년 11월 1일 

지병인 간경화로 자택에서 사망. 장례식장에는 많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참석해 요절한 가수의 명복을 빌었다. (하오 5시 20분) 

  

1991년 2월 9일 

63빌딩에서 김현식추모콘서트 열림. 김수철, 이정선, 전영록, 강인원, 조하문, 한영애, 김태화, '봄여름가을겨울' 최호섭, 권인하 등 30여 명의 가수들이 참가, 김현식의 노래를 불렀다. 

  

1991년 

투병생활중 녹음작업을 했던 음악들을 묶어서 내 사랑 내 곁에를 타이틀로 제6집이 출반됨. 

  

2002년 1월 22일 

병실에서 투병생활중에 통기타반주로 불렀던 노래들이 녹음된 카세트 테잎을 원본으로 제작한 제8집 The Sickbed Live가 발매됨. 

 

2006년

지난 1990년 34세의 나이로 요절한 가수 김현식의 아들 김완제(24)가 내년 초 가수로 데뷔한다. A 소속사는 12일 "김완제와 올해 초 구두계약을 맺었으며 다음주 쯤 전속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라며 "음반은 내년 초 쯤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A 소속사의 또 다른 관계자는 "김완제는 원래 가수가 될 마음이 없었다. 모친을 비롯한 가족들의 반대도 심한 편"이라며 "그런데 캐다다에서 대학을 마치고 군입대를 위해 귀국한 뒤 군대에서 음악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재능도 있고 해서 1년 정도의 트레이닝 후 가수로 데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 김현식은 지난 1980년 1집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데뷔했으며, '내 사랑 내 곁에' '비처럼 음악처럼' '그대와 단 둘이서' '사랑했어요' '골목길' 등의 수많은 히트곡으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지난 1990년 11월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 그의 음악 [ 앨범 ]

 

♣ 1집 

- 1980년 12월 10일 발매 

서라벌레코드사에 의해 계획보다 2년 늦게 김현식 1집이 출반됐다. 아직은 앳된 목소리에 소울, 록, 트로트들이 융합된 김현식의 초기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앨범이었으나 거의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김현식은 주로 밤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 2집 

- 1984년 9월 20일 발매 

<봄. 여름. 가을. 겨울>, <당신의 모습>이 실린 데뷔 앨범의 처참한 실패 이후 4년만에 와신상담 내놓은 이 앨범의 성공은 김현식을 공중파와 공연장 모두에서 환영받는 이로 변모시켰다. 이렇게 된 것에는 <사랑했어요>의 멜랑콜 리가 지대한 공헌을 했고(이러한 '소녀취향' 의 감상을 꼬집는 이들이 있지만 이 앨범의 상업적 성공이 없었더라면 김현식이 이후 앨범에서 자신이 원했던 음악을 표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독보적이었지만(<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를 김태화처럼 부를 이가 없듯이 <골목길>을 김현식의 느낌으로 부를 이가 없다) 

김현식이 뮤지션으로 비중있게 언급될 수 있는 이유는 최이철의 기타가 발군인 블루스 록<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와 김현식의 샤우팅 보컬이 빛을 발하는<어둠 그 별빛>, 회상>등의 곡에 있다.  

김현식은 이 앨범 이후 백밴드 봄. 여름. 가을. 겨울과 함께 3집을 발표하며 더욱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 3집 

- 1986년 12월 5일 발매 

김종진(기타), 전태관(드럼), 박성식(키보드), 장기호(베이스), 유재하(키보드, 앨범에는 참여하지 않음)로 이루어진 라인업은 단순한 세션의 개념을 넘어 서서 밴드의 앨범을 가능케 했다. 또한 이 앨범은 이후, '봄.여름.가을.겨울'과 '빛과 소금'의 음악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게, 김현식의 음악 자체를 퓨전 재즈와 블루스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크게 작용하기도 했다.  

가창력에 비해 평가절하되던 김현식의 작곡 실력도 이 앨범에서는 빛을 발하여 '빗속의 연가', '비오는 어느 저녁' 등의 곡들을 이뤄냈다. 더불어 유재하는 이 앨범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 않으나, '가리워진 길'을 선사해 김현식의 목소리로 새롭게 들을 수 있기도 하다.

 

♣ 4집  

- 1988년 9월 30일 발매 

3집 발표 이후, 김현식은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마약복용 혐으로 구속되고, 술에 대한 탐닉으로 건강을 해치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전태관은 이후 지금의 '봄.여름.가을.겨울'로, 박성식과 장기호는 '빛과 소금'으로 분리된다.  

김현식의 4집 앨범 발표 당시는 '신촌 블루스'와 함께 활동하던 시기로, 이 앨범에서는 블루스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다. 또한 이 앨범은 새로운 라인업으로 참여한 송홍섭의 편곡과 이병우의 프로듀싱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당시 이병우의 나이는 25세로, 이는 프로듀싱을 후배에게 맡기는 김현식의 열린 음악관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는 3집부터 함께 활동한 박청귀의 완성도 높은 기타 실력을 만날 수 있다. 이제 완연한 허스키 보이스로 변화한 김현식의 노래가 담긴 이 앨범에는 이미 먼저 세상을 떠난 유재하를 되새기는 노래, '그대 내 품에'가 수록됐으며, 장기호의 '사랑할 수 없어', 그 외 지우들이 제공한 '언제나 그대 내 곁에', '기다리겠소', 사후 라디오에서 자주 흐르던,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사람'이 담겨있다.

 

♣ 5집 

- 1990년 3월 15일 발매 

'신촌 블루스' 3집과 동시에 제작된 이 앨범에서 김현식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음악으로 표출해내고 있다. 이 당시는 김현식은 상당한 공연과 더불어 가장 왕성한 음악적 욕구를 실현해냈던 시기다. 그러나 그에 비례해 육체적으로 상당한 고통이 뒤따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더없이 지울 수 없는 곡은 '넋두리'다. 이미 망자의 목소리를 띠고있는 듯한 김현식의 목소리는 단 한번 듣고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거리 그 벤취'에서의 늦가을 뒤안길같은 그의 목소리도 쓸쓸하게만 들린다. 그러나 이 앨범은 김현식이 어려운 시기에 제작했으나 가장 음악적으로 충실한 앨범이다. 3집의 세션맨들이 거의 그대로 회동하여 만들어진 이 앨범에는 박청귀(기타), 이원재(베이스), 배수연(드럼), 함춘호(기타) 등이 참여했으며, 송홍섭이 프로듀싱을 맡고 있다. 전반적으로 단순한 구성의 곡들로 채워진 이 앨범은 수록곡 면면히, 자신의 영역을 확고화한 김현식의 음악인으로서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 추모앨범 하나로 

- 1991년 6월 발매 

<관련자료> 

1991년 김현식씨가 타계후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그의 최초 추모 앨범이 제작되었다. 이듬해 여름에 발매된 그 최초 추모 앨범[하나로 91]에 참여한 인물들은 그의 음악적 측근이 다수였으며, 일부를 제외하면 언더 쪽에서만 활동하는 뮤지션이 대부분이었다. 당대의 실력파 뮤지션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데 엄인호, 최이철, 김수철, 이문세, 정경화, 한영애, 권인하, 사랑과 평화 등과 몇몇 뮤지션이 더 참여하고 있다. 

 

♣ 김현식 Best 앨범 

- 1991년 11월 발매

 

♣ 제6집 

- 1991년 발매 

이 앨범의 녹음 당시만 하더라도 김현식은 병원에 가만히 누워있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서 탈출해 노래를 하고 녹음을 했다. 그러나 결국 앨범의 완성 이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지우들이 미완의 이 앨범을 끝마친다. 어쩌면 이 앨범은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전하는 첫번째 추모앨범일 수도 있다. 이 앨범에는 그의 최초의 히트곡 '사랑했어요'와 '사랑과 평화'의 '겨울 바다'가 새롭게 리메이크돼 있다. 그러나 이전의 곡들과는 다른 관조적인 시선에서 단지 과거의 영화를 되새기려는 의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만든 곡 '추억 만들기', '사랑,사랑,사랑'에서 느껴지는 낙관적인 시선은 역시 관조적인 태도에서 비롯되는 담담함처럼 느껴진다.

 

♣ 제7집 Self Portrait 

- 1996년 9월 2일 발매 

Fuky 기타리스트 한상원, 베이시스트이자 편곡자 송홍섭, 드러머 배수연, 하몬드 올겐 주자로 정평있는 김효국 등이 김현식의 미발표곡 '다시 처음이라오', '사랑의 불씨', '이 바람 속에서' 등에 연주를 입혀, 이 앨범은 만들어졌다. 그리고 , 김현식이 즐겨 부르던 'First Of May', 'Rain'의 커버곡과 더불어 라디오에 출연한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

 

♣ 김현식 Live 앨범 

- 1997년 11월 발매 

소형녹음 가셋트로 녹음된 듯한 음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조악한 음질을 들려준다. 그러나 이 앨범은 김현식이 건강하던 시절의 공연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팬들에게는 기쁜 선물일 수도 있다. 

 

♣ 김현식 연주곡 모음집 

- 연주곡 모음집 

한동안 라디오를 통해 자주 들렸고, 여전히 기억되고 있는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 사람'을 비롯한, 김현식의 노래들이 연주록으로 수록됐다.

 

♣ 추모 10주년 헌정앨범 

- 2000년 11월 발매 

<관련자료> 

후배.동료가수 대거참여…힙합버전 '골목길'등 눈길 

세상 모든 것에 낙담하고, 그러나 돌이켜 무엇을 해 볼만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자의 노래.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우리 강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하는 그 와중에도, 김현식의 노래는 처절하고 어딘가 냉소적이었다. "그 아름다운 강산에서 대체 당신들 무엇 하느냐" 하는 식으로 들렸다. 그의 사랑 노래마저 이별이 예정된 만남을 노래하는 듯했다. 서른두살은 무엇을 끝내기보다는 시작하기에 어울리는 나이. 1990년 11월 1일 서른두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김현식에 바치는 헌정앨범 '트리뷰트 투 김현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음반에는 아름답고 슬펐던 그의 노래 22곡에 연주곡 2곡, 시낭송 등 모두 25편이 담겼다. 음반에 참여한 가수들은 12월 31일 추모공연도 예정하고 있다. 헌정(트리뷰트) 앨범은 언제나 함정이 있다. 숭배의 대상이 남긴 자취가 너무 뚜렷하기에 그를 숭배하는 가수들의 열기와는 별개로 원곡이 갖는 '아우라' 를 못따라 가게 마련이다. '트리뷰트 투 김현식'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참여한 가수들은 화려하다. 최고의 인기가수 조성모를 비롯 김민종과 유승준이 참여했으며 김종서 이승환 김경호 임재범 등 그의 후배들이 따랐다. 음반 발표 후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선 "조성모와 유승준, 김민종이 대체 김현식과 무슨 관계냐" 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상업성을 의식한 발상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특히 유승준은 예상외로 선전했다. 그가 부른 '골목길'은 힙합 버전으로 독특한 색감이다. '골목길'이 발표됐을 당시의 그 전복적인 느낌을 돌이켜 본다면 이런 '반란'에는 후한 점수를 주어도 무방할 듯 싶다. 복고풍의 효과를 사용,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강조한 김종서의 '떠나가 버렸네', 업비트의 전주로 시작되는 김범수의 '눈 내리던 겨울 밤'은 앨범의 소중한 수확이다. 이미 '약속'으로 실력파 가수로 인정받은 김범수는 이번 음반에서도 가창 실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김현식의 동료인 장필순 엄인호 한영애 강인원 등의 노래 역시 들을 만하다. 그러나 김현식의 '절창'을 의식한 나머지 가수들은 전반적으로 '오버' 하는 느낌이 강하며, 마지막 부분 최민수의 '넋두리' 시 낭송은 그 특유의 '무게' 에 감정과잉까지 겹쳐 듣기에 영 부담스럽다.

 

♣ 제8집 The sickbed live 

- 2002년 1월 22일 발매 

<관련자료> 

古 김현식이 병마와 생사의 투쟁을 벌이던 당시 병상에서 통기타 하나에 의지해 절규하던 육성이 앨범으로 만들어진다. 지난 90년 지병인 간경화로 입원했던 서울 동부이촌동 금강병원 병실에서 만난 여자 환자에게 테이프로 녹음해 넘겨주었던 미공개곡들이 뒤늦게 빛을 보게 된 것. 총 21곡이 녹음된 이 테이프는 기타 하나만이 유일한 악기이고 노래 시작과 중간·끝부분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박수 소리, 잡음 등이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번 음반에서는 잡음제거 작업을 거쳤다. 최태완을 비롯한 세션맨들의 악기 더빙이 된 곡 11곡, 통기타 원음 반주로 된 5곡 등 총 16곡이 수록됐다. 이 음반에는 같은 입원실에서 환자들과 나누는 대화, 미니 콘서트를 열어 그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현장, 곁에 있던 한 어린이가 떠들자 "조용해 인마" 하는 소리, 먼저 퇴원하는 환자에게 "이제 퇴원하는 거야?" 하고 섭섭해하는 목소리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눈내리는 겨울밤' '가리워진 길' '당신의 모습' '재회' '넋두리' '밤의 고독속에서' '예스터데이' '떠나가 버렸네' '비처럼 음악처럼' '추억 만들기' 등 그가 남긴 명곡들과 박자와 음정, 때로는 가사까지 무시하며 즉흥적으로 부른 노래들이 수록돼 있다. 당시 테이프를 넘겨받은 여자 환자는 윤혜경이라는 이름의 30대 초반 여성이며 현재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병상에서 이 테이프를 넘겨받아 보관해오던 그녀는 지난해 11월 모 방송에서 김현식 추모뉴스를 접하고는 느낀 바 있어 음반 출반을 결심하게 됐으며, 캐나다에 있는 김현식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았다.

※ 그에 관한 책

1. 사랑의 가객 김현식 (솔 출판사) 

전에 일간 스포츠 연예부 기자이셨던 육상효씨가 김현식을 취재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쓰여져 있고 그 외 강인원.엄임호,오태호 외 여러 분들이 쓴글 들로 구성되어 있음.그리고 책 후반부에는 김현식이 쓴 몇 편의 시들과 그의 앨범 악보가 삽입되어 있음.

2. 지상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살림) 

김현식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3. 넋두리 (이정선 음악 출판사) 

김현식의 사진집.그의 사진들과 친필 글씨가 실려 있고 책의 후반에는 그의 노래가사와 미발표곡 가사가 실려 있음.

4. 소설 내사랑 내곁에 (대광출판사) 

김현식을 주인공으로 쓰여지 반픽션인 소설로 방송 작가 구자형씨가 쓴 책.

※  그에 관한 영상

1. 뮤직 다큐멘터리 김현식 

김현식님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로 김현식님의 방송 출연과 콘서트 장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김현식님의 장례식 장면도 있습니다.

-85년 남이섬 콘서트 

-87년 롯데호텔 콘서트 

-88년 재기 콘서트 

-신촌블루스 공연실황 

-90년 마지막 콘서트 

 '비오는 날 수채화' 

-장례식 장면 등

 

2. 비처럼 음악처럼 

92년도에 출시된 김현식 추모 영화로 가수 김형철과 심혜진이 주연한 영화로 심혜진은 이 영화로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3. 내사랑 내곁에 

김현식님의 열성팬이 그의 콘서트마다 찾아가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해서 소장한 미공개의 귀중한 필름을 편집해서 구성한 내용입니다.

-촬영:황준호, 이호근 

사랑의 가객 김현식 (솔 출판사) 글중에서.....

그의 노래는 일반적인 록발라드가 아니라 엘라 피츠제럴드나 빌리 할리데이 같은 재즈 보컬리스트처럼 블루스적인 소울에 더 가깝다. 영혼을 울리는 기적의 노래, 그렇기 때문에 흑인들의 영성에 호소하는 소울은 박해받는 순교자들을 위한 진혼의 노래이다. 슬픔과 고통의 영가,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김현식의 방랑과 휴식은 그의 노래가 독기처럼 품고 있는 어떤 한스러움과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으리라 짐작해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직전까지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본 가까운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매 다녔다고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서도 그로 하여금 외롭고 황량한 밤거리를 헤매게 한 심리적 기제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반쯤은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미치광이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죽음의 기미를 눈치채고서도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엄청난 폭음을 일삼을 수 있었을까.  

 

시시각각으로 자신의 몸을 덮쳐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잠시나마 떨쳐버리기 위해서? 아니, 아니다. 그에게도 목숨은 하나였다. 가수가 아니라면 정신병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자아의 괴로운 육성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나'에 관한 정체성이었고 정체성의 결핍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비와 음악의 음유시인 혹은 사랑의 가객으로 부르지만 나는 이제 그를 내 속에 있는 너무 많은 나를 찾아 시작도 끝도 없는 머나먼 여행을 떠난 한 사람의 외로운 나그네로 명명한다.  

 

김현식이 생전에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남긴 곡의 레파토리는 끝이 없다. 나는 여기서 그 노래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내 힘이 너무 벅차고 숨이 가쁘다. 다만 추억의 옛 책장을 넘기듯, 남몰래 지나간 사진첩을 들추듯 그저 몇 몇 곡을 향해 언제나 변함없는 안타까운 연민의 눈길을 던지며 그 곡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되새김질해 볼뿐이다.  

 

신촌 블루스 시절, 두 팔을 벌리고 마치 대기 속의 영혼과 접신이라도 하듯 혼신의 정열을 쏟아 토해내던 '골목길'과 '떠나가 버렸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룹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했던 '비처럼 음악처럼'은 이미 하나의 고전이 되어버렸고 권인하, 강인원과 호흡을 맞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비오는날 수채화'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새삼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 어찌 잊을 것인가. 유재하의 곡을 다시 편곡하여 그 자신만의 독특한 음깔로 소화했던 '가리워진 길'과 '그대 내 품에'를, 춥고 배고픈 잠 못 드는 밤마다 쓸쓸하고 허기진 내 영혼을 달래주던 '우리 처음 만난 날'이나 '추억 만들기', '언제나 그대 내 곁에'와 '사랑할 수 없어'를, 그가 떠난 뒤 동료 가수들의 입을 통해 다시 환생한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 그리고 그 자신의 '넋두리'를. 그러나 그 모든 추억의 노래를 제쳐두고 나는 오히려 그가 사랑의 음유시인처럼 하모니카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떨림을 안은 채 고즈넉하게 연주했던 '한국 사람'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해보고 싶다.  

김현식, 그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정직하게 걸어간 대중음악인이었습니다. 그 역시 변함없는 한국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왜 그때 '한국 사람'을 내보냈던 걸까. 모르긴 해도 그 행위의 배후엔 김현식이 80년대 초의 어느 순간 음악 현장에서 우연히 김민기를 만났을 때 벌였던 유명한 논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때 김현식이 음악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지점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한 반면 김민기는 보다 더 크고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을 강조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 후로도 그들이 나아간 음악세계의 방향은 서로 달랐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결국 그들은 같은 한국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의 정체성이 무언가를 고민했던 진정한 음악인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김현식 사후에 김현식과는 이종사촌의 관계에 있는 김장훈이 조직한 밴드 이름이 '한국 사람'인 것은 그런 측면에서 우연 치고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하겠다.

♣ 그의 고백

나는 어린 시절 시골서 자랐다. 

국민학교 5학년 때인가 서울 삼청국민학교로 전할을 올 때까지 지금 생각하면 시골 생활이 참 좋은 것 같다. 파아란 하늘. 아주 깜깜했던 밤. 별이 유난히도 많았던 밤. 아름답던 추억이다. 그 시절 추억이 지금도 음악에, 나의 음악 생활에 커다란 희망을 준다. 세월은 지나, 그럭저럭 나도 인생의 반을 어느 새 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30이 넘은 것이다. 언젠가 만난 음악생활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나의 광기, 내 몸속에 있는 그 어떤 광기가 음악으로 표출되는 것 같다. 음악, 음악은 내 인생이다. 그리고 내 전부다. 노래를 하다 못하면 쫓겨나고 그러면 또 더욱 열심히 노래하고...  

그냥 음악이 좋아 무작정 좋아 시작했다. 고생도 많이 했다. 누구나 음악 10년 이상 한 사람이면 이런 과정을 겪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 배가 고파야 노래가 더 잘되는 것 같다. 나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특히 방황, 좌절 여러 가지 좀 나쁜 경험이다. 

처음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이젠 이쯤에서

나의 방황도 좌절도 끝을 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나의 사랑은 언제나 실패였다. 첫사랑은 누구나 그러하듯 철이 없었고 생각해 보면 짜릿했다. 아마 어디에선가 그녀도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과거는 과거다. 지난 일은 세월에 잠겨 잊혀져 간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아픈 기억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 아픈 기억들을 좋은 음악으로, 깊은 마음으로 진실된 노래를 부르고 싶다. 좋은 세상, 좋은 음악, 좋은 사랑.. 내가 바라고 절실히 원하는 것이다. 지금가지 세 장의 앨범을 냈다. 네 번째 앨범에서 나의 모든 음악생활의 전부를 보이려고 노력했다. 밝은 마음으로, 깊은 사랑으로 기대해 주기 바란다.

김현식 88. 9.10

♣ 그가 잠든 곳...

 

 

※ 위치 : 성남 분당 장미마을 남서울 공원 (031-703-9102) 

※ 개장시간 : 05:30 - 17:30 (차량통행에 한 함. 도보일 때에는 시간에 상관없습니다.) 

※ 찾아가기 : 지하철 분당선 야탑역 하차 -> 3번출구(외환은행) -> 오른쪽 버스정류장 -> 성남 아파트형 공장 행 버스 -> 종점하차 (10분소요) -> 남서울 공원까지 도보(20분소요)

그를 떠나보내며..............

엄인호 - 신촌블루스 리더  

1년도 채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 웬지 그를 보기가 싫어졌다. 

심지어 밤늦게 찾아온 그를 그냥 대문 밖에서  

돌려 보내기도 했다.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나 역시 괴로움에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며칠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골목 저 끝에서 낯익은 

하모니카 소리가 들린다. 

현식이가 온 것이다. 조금은 멋적은 표정으로  

들어오는 그의 손에는 영락없이 돼지고기가  

들려있다. 우리집 개들은 반가워하고...... 

며칠 우리집에 묵으며 많은 얘기들이 오간다. 

새로 들어갈 앨범 얘기며 공연 얘기 등. 

얼마 있으면 다시 완제와 완제 엄마랑 같이 살게 된단다. 

그리고는 술을 조금씩밖에 입에 대지 않았다. 

  

권인하 - 1980년 가요계 데뷔, 비오는날의 수채화 등 

현식이형을 결국 맨 마지막에 본게 세상을 뜨기 일주일전이었는데 그날도 또 녹음을 하다 방송하러 왔더라구요. 너무 체력이 딸려서 채 노래도 못 부르고 그냥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갈 때 "형 어디가?" "어 나 녹음실로 가야지" 

결국은 죽는 순간 까지도 음악속에 있다가 간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인원 - 비오는날의 수채화, 제가 먼저 사랑할께요 등   

그는 음악에 관한 한 

천재였고 또 보헤미안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낭만인이었다. 

엉뚱한 행동을 곳곳에 터뜨리고 다녔던 피에로였다. 

그런 그가 그리웁다. 

그의 영혼이 머무는 것이 이 우주 어느 지점일까? 

後生의 어느 지점 , 어떤 생명과 연이 닿을지...... 

막연하지만 그래도 기원한다. 

방랑과 무질서와 자학과 두려움과 파괴가 아닌  

평화와 온전함으로 

드넓은 대지와도 같은 포용의 깨우침과  

사랑과 사람과 행복을 구현하는 사람. 

그런 음악인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길 말이다. 

  

오태호 - 가수겸 작곡가, 기억속의 멜로디 등  

"나의 모든 사람이 떠나가는 날이......" 

"그게 무슨 곡이니?" 

"얼마전에 제가 써본 곡이예요." 

"나 줄래?" 

"그러세요." 

1988년 신촌블루스 시절로 기억되는데, 지방 콘서트중에 대기실에서 김현식 선배님과 제가 나눈 대화입니다. 

그렇게 조금은 쉽게 [내사랑 내곁에]란 곡은 주인을 만났고 (지금은 다시 잃었지만......) 그후에 5집(넋두리)이 나왔지만 제곡이 실려 있지 않아 조금은 실망스러운 마음과 함께 "미리 얘기라도 해주시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더 서글펐고...... 

  

김동환 - 묻어 버린 아픔 등  

저 나이에 저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노래를 잘했어요. 

정말 샘이 날 정도로 노래를 잘하더라구요. 

그리고 항상 따뜻했죠. 

사람이...... 

  

박성식 - 가수겸 작곡가, 듀엣 빛과 소금 활동 

천재는 요절하는가 보다. 

현식이 형에게 미안한 일이 한가지 잇다. 

학업관계로 내가 봄여름가을겨울을 나왔던 이후에 

[비처럼 음악처럼]이 많은 대중에게 

사랑 받은것이 웬지 늘 마음에 걸린다. 

아무래도 내가 만들었던 곡이니만큼  

같이 있었더라면 

조금이나마 현식이 형게게 도움이 됐을텐데...... 

지금도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가끔씩 그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유영석 - 푸른하늘, 화이트 리더  

김현식 선배와의 첫 대면은 동아기획 사무실에서 였다. 

가만히 숨죽이며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툭 치곤  

"네가 유영석이냐?" 고 심드렁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얼른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현식 선배는 회사 여직원에게 1천원을 주고는 소주, 오징어, 담배를  

사다줄 것을 부탁했다. 내 머리속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주, 오징어, 담배가 1천원으로 될것 같지않았는데 여직원은 선뜻 나가서 그것들을 구해왔다. 

소주를 간단히 딴 김현식 선배는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그러더니 불쑥 내 앞으로 내밀곤 "마셔"라고 전했다. 

어느 선배의 영인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셨다. 

그렇게 간단히 둘은 소주 한병을 비웠다. 

그것도 휜한 대낮에.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짖궃은 장난도 많이 쳤지만 언제나 후배들에게 

정이 많았던 선배였다.  

무엇보다도 음악에 관한 열정만은 대단했다.  

  

김장훈 - 가수  

대학준비를 하면서 나는 본격적인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바로 김현식 형을 자주 만나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된 것이다. 당시 현식이 형의 연습실은 한남동에 있었다.  

공부하던 도중 나는 매일 연습실로 찾아가 나의 장래는 물론이고 음악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현식이 형은 그때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해 3집 앨범을 하크 시킬 즈음이었다. 그때 나는 현식이 형이 너무나 부러웠다. 노래 잘하고 잘 생기고 또 가수로서 인정을 받고 하지만 현식이형은 항상 방황을 했고 외로워했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지금까지 나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 하나를 밝혀야겠다. 바로 현식이 형과의 관계다. 항간에는 내가 현식이 형의 친 사촌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물론 사촌보다 더 친하게 지낸 것은 사실이다. 현식이 형과 나는 이웃사촌으로 어머니끼리 친자매 이상으로 지내신 까닭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촌지간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하여튼 나는 공부를 하던 틈틈이 현식이형의 연습실을 찾아가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당시 너무나 담담한 심정이었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동병상련일까. 부러울게 없어 보이던 현식이 형은 나처럼 늘 방황하고 외로워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가수가 된 지금은 현식이 형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괴리감 그리고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들이 그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항상 술을 끼고 살았다. 심지어 노래를 부를 때도 술을 마셨다. 마치 자학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현식이형의 행동들이 곧 나의 일처럼 느껴지니 현식이 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 눈에는 생생하다. 

그러던 90년 11월 나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현식이 형이 불연듯 세상을 떠난 것이다. 

소식을 듣고 믿기지가 않아서 슬프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이러니컬 하게도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떠나자 난 첫 음반을 내고 정식으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마도 현식이형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도 그럴것이 현식이형이 살아있을때 여기저기 다니면서 내 자랑을 많이 하고 다녔다. 그런 소문이 계기가 되어 한 제작자에게 연락이 왔고 그 분 밑에서 나는 데뷔앨범 <그곳에>를 발표하게 되었다.               

김현식,

결코 많이 들어 본 가수는 아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는 '언더그라운드 씬'의 기수로서 군림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다시 말해 김현식은 훌륭한 가창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가수는 많지만 가창력을 지닌 가수가 없는 우리 나라 풍토아래 김현식은 기나긴 가뭄 끝에 쏟아지는 비처럼 마냥 싱그러움이 있고 그리고 다른 여느 가수에서는 좀처럼 느 끼지 못하는 진한 혼이 베어 있다. 흔히들 김현식을 가리켜 '대중적인 가수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대중적이라 함은 그의 음악이 우리의 현실에서 볼 때 약간은 어렵다는 말이다. 즉, 수준이 있는 음악성을 그에게서 느끼게 된다. 

그는 '색깔이 있는 남자'다. 색깔이 있다는 말은 예술세계에서는 개성이 강하다는 뜻으로 연 결된다. 만약에 가수가 개성이 없다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김현식이 지닌 매력은 매콤한 겨자처럼 톡 쏘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게 일품 이다. 

김현식은 또 '끼가 있는 사내'다. 그가 만약 끼가 없었다면 벌써 노래를 그만 두었을지도 모 른다. 남들처럼 야간업소에 서는 것도 아니므로 그의 주머니는 항상 비어 있고 춥지만 그에 게는 음악이라는 보약이 있기에 시금치를 먹은 뽀빠이처럼 항상 힘이 샘솟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는 '멋을 아는 친구'다. 

멋이란 사람을 돋보이게 하지만 자칫 잘못 멋을 부리면 오히려 안한것만 못하다. 이것을 멋에 대한 감각이라고들 한다. 그런 면에서 김현식은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센스가 있다. 다시 말해 멋을 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멋이 넘쳐흐른다. 

더러는 김현식을 '건방진 녀석'이라고 한다. 건방지다는 말을 잘못 해석하면 자만에 빠졌다 고 해석할 수 있겠으나 그는 자만이 아닌 건방짐이 있다. 만약 예술을 하는 예술인이 건방 짐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예술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중에게 야합하다 보면 당분간은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겠지만 곧 식상한 대중들이 외면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현식 의 건방짐은 대중을 이끌어가며 항상 새것을 추구하는 원동력이라 해석된다. 

아무튼 김현식은 2년만에 와신상담 4집을 갖고 심판대에 섰다. 

가수생활 10년을 기념하며 임한 이 음반은 과거 어느 앨범보다 더 원숙한 음악성과 보다 더 한 개성을 접하게 되는데 앨범을 턴테이블에 올려 논 순간 분명 당신은 김현식의 독특한 매 력에 빠져 들 것이다.

글 . 선성원 (가요평론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1980년의 어두운 사회를 위안할 때 슬며시 발표된 김현식의 데뷔 앨범을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무려 5년 뒤 들국화가 화려하게 데뷔할 즈음 그의 두번째 앨범이 나왔을 때 그의 이름은 바로 80년대 대중음악계의 가장 중대한 사건인 이른바 `언더그라운드'의 동의어가 될 채비를 완료했다. 그리고 그가 지병으로 이승을 마감하고 유작이 된 여섯번째 앨범이 요절의 신드롬과 함께 밀리언 셀러의 폭풍을 몰고 왔을 때 80년대 중후반의 이 신화는 저물었다. 

대부분의 그의 노래가 록의 정통주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을지는 몰라도 그는 적어도 세계에 대한 태도의 측면에서는 완벽한 로커(rocker)였다. 그는 방송과 음반회사의 전횡을 무시해 버렸으며 대중의 소녀적 취향에 대해 일고의 배려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저 60년대 우드스탁의 끝없는 자유를 동경했다. 

김현식에 대한 최대의 아쉬움은 그가 탁월한 록 보컬리스트였던 사실에 반해 뛰어난 싱어송라이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데뷔 앨범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제외하면 그의 작곡 능력은 2류에 머물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록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이러한 약점은 그의 탁월한 백 밴드 봄여름가을겨울과 송홍섭을 위시한 베테랑 세션들이 메꿔주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 앨범인 이 앨범에 이르러 그는 짧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자신의 삶의 내면을 일필휘지로 내보인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임박한 임종을 암시하는 가운데 흐르는 짧은 독백과 한 호흡으로 제시되는 그 특유의 상승하는 주제선율, 그리고 박청귀의 일렉트릭 기타와 호응하며 포효하듯이 일어서는 후렴의 사자후- 그 자신에 의한 이 <넋두리> 한 곡만으로 그가 펼쳤던 날개가 얼마나 많은 이의 감관을 휘감았는지를 알아차리는 데 충분하다. 

그는 두번째 앨범의 <어둠 그 별빛>이나 세번째 앨범의 <비처럼 음악처럼> 같은 대표적인 곡에서 드러나듯이 블루스에 기인한 슬로 템포의 록의 비경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그 여유로운 템포 속에서 그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소리꾼의 힘과 기교를 아로새겼으며, 그로부터 기인하는 보컬의 카리스마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게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김현식이 우리에게 각인됐던 그 시대는 랩을 제외한 서구의 모든 문법이 우리 대중음악의 골간을 장악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사조의 단순 수입상에 머물지 않고 그 자신만의, 어쩌면 나아가 우리의 숨결을 불어 넣고자 했다. 네번째 앨범의 <우리네 인생>이나 이 앨범의 <도시의 밤>과 같은 전형적인 로큰롤 곡에 면면히 흐르는, 무어라 규명할 수 없는 '향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향기 없는 꽃>을 통해 이렇게 읊조리는 것이 아닐까? 

"겉이 화려할수록 진실 메말라 있고 / 겉이 화려할수록 향기 간 곳 없으니 / 향기 없는 꽃이여 / 그대의 진실은 은밀함에 있어 / 부러움 한 몸에 받을 수있다오..." 

-강 헌 (대중음악평론가)

그의 수기

 

  ㆍ 나의 성장기

  ㆍ [벌판다방]의 가수

  ㆍ 1집이 나오기까지  

  ㆍ 작은 보금자리를 꾸미고  

  ㆍ 얼굴없는 가수

  ㆍ 가수는 나의 천직  

  ㆍ 연재를 마치며

자 료

방송 동영상

http://eq.freechal.com/flvPlayer.swf?docId=25666729

김현식 내사랑 내곁에

http://www.pandora.tv/my.bluesky4989/2342520

사랑했어요 - 김현식  

http://www.pandora.tv/my.bluesky4989/2343006

비오는날 수채화 - 김현식

김현식 3집,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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