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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탄압과 강제수용소

최종길 |2006.10.16 21:24
조회 55 |추천 0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을 심신수련법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중공은 ‘책임자’ 혹은 ‘조직자를 잡아들이기 시작, 중심으로 한 중공 독재 세력이 파룬궁 탄압을 처음 개시했을 때 체포한 사람들은 대부분 전(前) 파룬궁 연구회 회원들과 각지 기공 보도소 소장들이었다. 중공은 각종 운동 가운데 민중들은 이미 흩어진 모래알처럼 되어‘책임자’ 혹은 ‘조직자’를 잡아들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뿔뿔이 흩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청원을 하러 간 일반 파룬궁 수련인들에 대해서, 중공은 잠시 수감한 후에 곧 석방시켰다.


그러나 중공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파룬궁은 결코 ‘연구회 회원’, ‘보도소 소장’, ‘분소장’, ‘보도원’ 및 직함이 없는 일반 수련인들 간에 엄격한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파룬궁 내부에는 근본적으로 상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실제로 개인의 《전법륜(轉法輪)》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다음 행위를 결정한다. 그래서 중공이 ‘책임자 체포’ 전략을 실시한 후, 오히려 더 많은 파룬궁 수련인들이 용감하게 전진하며 평화 청원의 큰 흐름에 합류하였다.
파룬궁에 대한 중공의 표면적인 박해는 처음 1년 동안 단계가 5차례 높아졌는데 이 과정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무릇 장쩌민이 계획한 ‘3개월 내 파룬궁을 소멸한다’은 이러한 박해의 승급을 뚜렷하게 ‘3 개월’을 단계로 했다는 특징이 있다.

◎ 제1단계 (1999년 4월 ~ 1999년 10월) - 일시적인 감금

1999년 4월 25일 중난하이(中南海) 청원사건이 끝난 후, 중공은 파룬궁의 새벽 단체연공 동에 대해 소란을 피웠다. 해산과 교란에 이어 99년 7월 20일부터는 일시적인 감금을 시작했다.

◎ 제2단계 (1999년 10월 ~ 2000년 설) - 15일 구류

장쩌민(江澤民)은 파룬궁을 ‘불법 조직’으로 규정, 프랑스 방문 기간에 공개적으로 지 기자에게 파룬궁을 '사교' 라고 말했다. 이후 파룬궁 수련인들의 대규모 청원은 신방국(信訪局) 앞에서 천안문(天安門) 광장까지 확장되자, 장쩌민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심하게 화를 내면서 천안문에서 현수막을 펼친 수련인들에게 행정처분을 통한 15일 구류에 처하게 했다.

◎ 제3단계 (2000년 설 ~ 4월) - 30일 감금

그러나 15일간의 행정 구류로도 더 많은 파룬궁 수련인들이 천안문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궁이 좋다는 의미)’ 현수막을 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와 같이 천안문에 가서 진상을 알리는 것은 2000년 설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자 중공은 당시 수감 중이던 파룬궁 수련인들에게 기본적으로 30일간의 형사 구금에 처했다.

◎ 제4단계 (2000년 4월~ 7월) - 강제노역

새해가 지난 후에도, 파룬궁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각국 기자들은 대대적으로 천안문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이 항의하고 있는 소식을 보도했다.
2000년 4월 25일 무렵, 중난하이 사건 1주년을 맞이하여, 게다가 해외에서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이 파룬궁을 공개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한 5월 13일을 ‘세계 파룬따파의 날’로 정하는데 동의하자, 천안문 앞에서 항의하는 사람들의 수는 박해 개시 이후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자 당황한 중공 당국은 원래 청원하는 사람들에 대해 관례로 되어있던 15일 혹은 30일 구금을 강화하여 대부분 강제노동교양(강제수용소) 처분을 내렸다.

◎ 제5단계 (2000년 7월 ~ 현재) - 학살과 생체 장기 적출

장쩌민은 신앙의 힘을 이해할 수 없었고 기독교 탄압을 명령했던 로마 황제 네로보다 더욱 잔인하고 더욱 어리석었다.
분명 놀라서 수그러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항의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으며 체포된 파룬궁 수련인들도 대부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단호하게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2000년 7월에서 8월 사이 파룬궁 수련인에 대해서는 “때려 죽여도 상관없고 때려 죽였으면 자살로 간주하라. 신원을 조사할 필요도 없이 직접 화장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

비밀 명령을 하달하기 전에, 파룬궁 박해로 사망한 제자 수는 대략 180명이었다. 그러나 비밀 명령을 내린 후 1년 동안 박해를 당해 죽은 사람 수는 500명으로 늘어났다. 이듬해는 다시 1000명으로 늘어났다. 이나마도 확실히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불완전한 통계 수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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