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
미셸 투르니에 - 외면일기
발견, 고안, 창조. 이 세 가지 과정 사이에는 심오한 친화력이 있다. 고안inventer은 어원적으로 '향하여 나아가다invenire' , 즉 발견하고 창조한다는 뜻이다. 법률용어로 보물을 '발견'하는 사람을 그 보물의 '고안자inventeur'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그 보물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소급효력을 가지면서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발견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ㅏ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 우리를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또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파괴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喪)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낙원에 대한 생각 한 가지 : 내가 죽으면 내 앞에는 전 생애가 아주 작은 에피소드 하나까지 빠지지 않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는 그 중 이것 혹은 저것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다시 살아본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역인 동시에 관객으로서 다시 사는 것이다. 그 까닭은, 내가 합당한 만큼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내 삼의 장면들을 상기할 때면 향수와 회한을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장면을 '재연'해볼 수 있는 연극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서 그런 모양이다.
우리 나이가 되면 과거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심연인데 그 속으로 흐물흐물 미끄러져 들어가는 기분이 얼마나 달콤한지.
P.K의 딸들과 슈퍼마켓 안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나의' 화장수를 발견하고 놀라다. '오 드 콜로뉴 4711' 말이다. 나는 그 집 딸 아이들에게 그걸 한 병 사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게 내 향수란다. 너희들이 이걸 뿌리면 그게 바로 나야......"
자크 프레베르 : "만약에 물고기가 이름을 붙였더라면 대지를 바다라고 불렀을 것이다."
존재론적 논리. 입 다물고 존재들, 사물들, 개념들 스스로 말하게 하자는 철학자적 태도의 탁월한(전형적인) 예. 신의 뜻을 조작하려 들지 말고 신 자신이 우리에게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자. 그렇게 될 때 신은 우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는 존재한다. 그건 바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인 동시에 훗설의 현상학이다. 현상학 : 현상들 자체가 말을 한다. 그것은 또한 중세시대의 '말씀'이다. 신의 '말씀' :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있는 그 존재다."
버나드 쇼 :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 그들의 취향이 당신과 똑같은 것이라는 증거는 없으니까."
빅토르 위고는 "음악은 생각하는 잡음이다."라고 말했다. 번뜩이는 천재와 완전한 어리석음이 한데 섞인 이 말은 과연 빅토르 위고다운 표현이다. 그 자신도 이 점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르 콩트 드 릴르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은근히 만족스러워한 것 같다. ( 참조) 즉, 어떤 사람이 빅토르 위고는 멍청하다고 말하자 르 콩트 드 릴르는 이렇게 고쳐 말했다는 것이다. "맞아요. 멍청하죠. 하지만 히말라야처럼 멍청하죠."
켕페르Quimper를 방문하다. 나는 그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오데 강의 수위는 바로 인근에 있는 바다의 밀물과 썰뭉레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대양이 커다랗게 숨 쉬는 소리의 메아리가 발 아래서 출렁거리는 곳에 살고 싶다.
로베르(7살)는 콩트, 영화, TV 등에서 귀가 따갑도록 말하는 사랑이니 욕망이니 질투니 슬픔이니 하는 온갖 애정행각이 대체 어떤 것인지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체험해본 적이 없다고 내게 털어놓는다. 나로서는 이런 감정적 처녀성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아이는 아직까지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과 자신의 귀로 듣곤 하는 그 말들 사이의 일치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 어린아이들은 일체의 직접적 체험 이전에 허구라는 통로에 의하여 사랑의 담화를 학습하게 된다. 그 담화는 어떤 비어 있는 틀인데 때가 되면 그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그 틀 속에 부어 넣게 된다. 어쩌면 실제로 느낀 감정들의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채 그틀 속에 들어가 채워지지 못하고 지체하는 어떤 과도기가 전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 어린아이가 번쩍 하고 영감이라도 받은 듯이 이렇게 소리치는 날이 오는 것이다. : "아, 그러니까 이게 바로 그 사랑이구나! 그게 이런 건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내향성 폭발implosion, 내향성 폭발을 일으키다imploser. 점점 더 빈번히 사용되는 말. 회오리바람을 생각하면 된다. 회오리바람은 지극히 제한된 국부적 저기압현상으로 태풍의 눈 주위를 선회하는 운동에 말려든 탓으로 바람도 그 저기압을 메워주지 못한다. 이는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을 나타내기에 아주 적절한 이미지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간단히 만족시키는 대신 불만족의 산태로 남아 있음으로써 그의 주위에 있는 사물들과 자신 자신을 격렬하게 쉽쓰는 운동의 모터로 변해버린다.
독일의 지으이 한 기사는 '불굴의 사람들'이라는 제목 하에 어떤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가장 강한 성인들은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니체가 한 말이 그대로 증명되었다고 하겠다.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공격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그는 말했었다. 면역학의 원리가 그러하다. 즉 백신은 나에게 죽지 않을 정도의 공격을 가함으로써 나는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 결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또한, 최근 '어릴 때 앓는 질병'들(유향성 이하선염, 수두, 백일해, 맹장염 등)이 자취를 감추면서 성인들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박으로 노출된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얼굴은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다른 여러 기관들과 더불어 의복속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덩어리인 몸은 빙산의 잠겨 있는 부분이다. 그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느다. 그 이유는 바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디트 크레송 수상은 프랑스는 개미떼들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일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를 만난 기회에 나는 그에게 우리 수상의 그 같은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도 그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즉시 개미에 관한 곤충학 전문서적들을 자세히 읽어보았다고 했다. 그 결과 그는 개미들에게 과연 일본인 군중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을 주목해볼 수 있었다. 즉, 곤충학자는 피상적인 관찰자들이 자칫 잘못 보기 쉬운 점 한 가지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부산하게 우글대는 개미집을 보면 저마다의 개미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다수의 개미들은 일정한 목적도 없이 그냥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일본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오에는 말한다. 치열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는 어떤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데가 그을 볓 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욎거인 세계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 매일 아라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 속에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사진이 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각의 틀 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스탕달 : "이상화할 것. 라파엘이 초상화를 그릴 때 실물과 가장 닮아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이상화하듯이."
(...)그렇다. 떠난다는 것, 이사를 간다는 것,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여러 톤의 낡은 잡동사니들을 처분해버린다는 것, 모든 것을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가! 내 친구들 중에 일허게 행동하는 이가 여럿이다. 나는 그들을 따라하지는 못하면서 그드을 부러워한다. 소서가 베르나르 클라벨의 경우는 광란에 가깝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스위스로 이사를 다니다가 이윽고 다시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는 자신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으면 그게 겨우 몇 년간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때마다 드디어 결정적으로 정착할 평화로운 항구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이가 먹을수록 나는 어린 시절에, 그리고 대학 시절에 영재 학생이 되지 못했던 것을 애석해한다. 모든 책을 미친 듯이 일고 수학과 음악, 그리고 모든 지적 체조에 뛰어나고 모든 언어에 능통하다는 것. 인간의 모든 지식이 축적된 어마어마한 머리. 이쯤 되면 한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여향, 사랑, 나아가서는 온갖 발명을 대신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괴테의 작품 처음에 나오는 파우스트에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늙어가면서 자신이 세상만사 모르는 것이 없지만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을 잊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와 파우스트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백과사전 못지않은 지식을 갖춘 결과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 모든 것은 다 쓸데없는 잡동사니 지식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친구들처럼 술을 마시고 여자들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편이 더 낫다는 결론을 얻어낸다는 점이다. 내가 볼 때 지식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답고 심오한 것이다. 철학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빛이 있고 수학에는 온갖 절묘한 감칠맛이 있으며 여러 가지 과학에는 전광석화와도 같은 효율성의 열쇠가 담겨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 무엇보다도 문학과 예술에는 장엄하고 위대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풍요로움을 획득하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아, 그 무슨 마술지팡이로 탁 건드려 다시 열 살 먹은 어린이로 돌아가서 지금 내가 아는 것을 모두 다 알고 모든 것을 다시 하고 더 보람있게, 더 강하게, 요컨대 완전하게 산다면. 그 어떤 완전한 삶을 영위한다면. 이라고 제목을 붙인 소설의 구상.
'완전한 삶'에 있어서의 문제 : 창조와 발명의 , 르리고 거기에 따르는 불균형, 결함 및 실수들?
영감을 받은 작가란 곧 자기 자신의 텍스트에 의하여 추월당한 작가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 자신이 의식적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은 채로, 삶이란 '여러 시기들'의 연속이다. 규칙적으로 하나의 시기가 끝나면 또 하나의 시기가 시작된다.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심각한 병, 직업의 변화, 이사, 졀교 등등. 흔히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미로소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는 것을,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꼭 희망이 있어야 무슨 일을 기획하는 것은 아니며 꼭 성공을 할 수 있어야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것은 아니다."
- 기욤의 글(16세기 네덜란드 연합주의 장관)
Si vis sitam pata mortem(삶을 견디려거든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삶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죽음. 충만하고 온전한 삶은 그 스스로의 죽음을 내포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병들은 외국과의 전쟁과 내란처럼 서로 정반대되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병의 경우는 명백하다. 세균감염에 의한 병은 외부의 공격(외국과의 전쟁)인 반면 암은 나의 신체조직이 스스로의 신체를 공격하는 경우(내란)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에는 열이 나고(내 신체조직이 동원되어 공격자와 맞선다.) 반면 암의 경우에는 열이 나지 않는다. 이 구분을 정신적인 차원으로 옮겨서 생각해볼 것: 원인이 나의 밖에 있는 슬픔, 나 자신이 원인인 슬픔(불안, 신경쇠약, 회한 등등)
내 노르웨이 친구 P.C가 술에 대하여 말하다 : "우리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절제하며 수수하게 살다가 토요일 저녁이면 죽을 지경으로 푹 취한다. 그런데 프랑스에 와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반쯤 취한 듯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어서 매우 기분이 좋다." 나는 그에게 사랑도 그렇게 경험 될 수 있다고 대답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일종의 심각한 열광상태를 통과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게 지나가면 다음 번 열광이 솟구칠 때까지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다른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에 반쯤 취한 상태로 산다. 결코 엄청난 열광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매순간 어떤 미열 같은 것이 그들을 따듯한 상태로 유지시켜준다. 그러나 결코 불이 붙어 타오르는 법은 없다.
주여! 엄청난 사랑이 찾아와서 저의 삶을 비추어 뒤죽박죽 만들어놓도록 해주소서!
마음의 고요와 한여름의 고요 속에서 나는 이 기도를 드리자니 가슴이 떨린다. 내 소원은 그것이 열렬한 것이기만 하면 결국 이루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통계조사에 따르면, 해변에 나가 보면 너무 뚱뚱한 어린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아이들은 건강하고 당당한 모습이어서 별 문제가 없다. 뚱뚱하지만 당당한 인상인 것이다. 그것은 거의 언제나 갓난아이들의 경우다. 그 이후에는 문제가 어려워진다. 필요한 것은 신선함이다. 살이 과다하게 많더라도 생명이, 심지어 정신성이 그 속을 관통하고 있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건강하고 당당한 몸, 그것은 정신의 진동에 의하여 살아 움직이는 살을 의미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살은 부어오름, 처진 볼로 인하여 순대처럼 정신과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익은 과일처럼 썩는 것이다.
"avoir le coeur gros(마음 아프다)" 나는 프랑스어의 이 숙어를 좋아한다. 이 표현을 보면 슬픔은 결핍이 아니라 그 반대인 가득함, 즉 추억, 감정, 눈물 등이 넘쳐날 정도로 너무 가득한 상태임을 암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avoir le coeur gros : 직역하면 "심장이 터질 듯이 커졌다"는 의미를 가진 이 숙어는 서글프다, 마음 아프다는 뜻이다.(역주)
모든 진실을 다 요구한다는 것은 무한한 추정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그것은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주눅들지 않은 채, 무질서하고 부당하고 나아가서은 범죄적, 자살적인 방식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그 모든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 지혜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 오직 내 분수에 맞을 정도의 양과 질의 진실만을 말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