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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 _01

홍은숙 |2006.10.23 12:59
조회 50 |추천 0


 영화가 끝난 뒤에, 여자의 손을 맞잡으며 남자는 토닥이듯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안 그래."


 잉? 대체 뭐가.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걸까. 파렴치한 욕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이? '연애'에서 '섹스'를 남겨두고 '사랑'을 분리수거하는 유림의 연애방식이? 온갖 작업능력을 동원해서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이? 대체 뭐가. 그리고, 그러면 어때서.


 연애의 목적은 그야말로 한없이 지분대는 남자가 속모를 여자를 만나 밀고 당기는 연애를 한판 땡기는 이야기다. 이들의 역사는 멜로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벤치 아래서 시작된다. 노랗게 물든 낙엽이 벤치아래 수북이 쌓여있고, 남자와 여자는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 두 사람은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수줍게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고 진행되었어야 옳겠지만 이 모든 판타지는 남자의 한마디로 우당탕탕 나가떨어진다. 젖었어요? 쿵. 연애의 목적은 시종일관 이런 자세를 취한다. 통속적인 멜로와 시니컬한 포르노그래피를 넘나들며, 그들의 연애는 이렇듯 다소 '너저분하게'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유림은 한마디로 미친놈이다. 미안. 달리 우아하게 표현할 길이 없다. 영화를 먼저 보고 온 지인이 유림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완전 개야. 개념이 없더라, 완전."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말에 절실히 동감했다. 정말 그는 온갖 미친 짓으로 사람 혼을 빼놓는다. 홍의 방을 훔쳐보려 백미러를 부순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젖었느냐고 묻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 새끼가 단단히 미쳤다는 걸. 단, 미친 새끼와 나쁜 새끼는 절대 동의어도 유사어도 아니다. 관객들은 유림을 미친 새끼라고 생각할망정 쳐 죽일 나쁜 새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탕을 달라며 누나를 조르는 어린 남동생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저 '귀엽다'라고 여기며 그의 지분거림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림은 결코 위악스럽지 않다. 그녀를 얻기 위해 달콤한 대사를 날리거나, 온갖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 설쳐대던 '이벤트'를 펼치거나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낭만'이 없다. 그저 솔직하게 그녀와의 '얘기'를 위한 길고 긴 여정을, 지름길로 가려고 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그의 욕정을 드러낼 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연애만 해요. 섹스만 해요. 쿨하게. 그런 그에게 홍이가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섹스를 하느냐고 묻자 유림은 이렇게 말한다. "홍선생, 아직 애구나. 16살도 아니고. 사랑이란 거 웃겨요. 그런 거 없어요."


 유림의 말은 진심이다. 그러나 이런 냉소적인 반응은 연애에서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연애에 있어서 언제나 승승장구해왔기 때문이다. '부모 같고 자식 같은' 연인과의 별 탈 없는 연애. 문제가 있다면 '별 탈 없는 연애'가 6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뿐인데, 오히려 그 안정적이고 편한 연애가 그를 냉소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홍이는 다르다. 남자친구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유림에게 "아니요. 나는 아무도 사랑안해요." 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말은 얼핏 유림의 연애관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현저히 다르다. '진심'으로 인해 맹렬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 그래서 홍이는 꿋꿋이 방어하고 밀어내지만 유림은 한없이 공격하고 쟁취하려 한다. 알기 때문에 두렵고 모르기 때문에 용감한 두 사람의 간극은 좁혀지면 멀어지고, 멀어지는가 싶으면 좁아진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상처를 툭툭 털어내고,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무뎌지고, 하기야 연애에서 죄질을 묻는 것이야 말로 가장 비겁한 일이겠지만, 그들은 '관계'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나간다. 연애의 목적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연애'로 인해 두 사람이 천천히 성장해나가는 것. 사랑과 섹스라는 다소 통속적인 화두를 던지면서도 이들의 '연애'가 지루하지 않은 것은 관계로 인한 상처를 작위적인 아름다움으로 꾸며내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마치 유림의 시선처럼 담아냈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달픈 사랑은 무슨. 연애에 대한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깨버리는 이 얄미운 영화는 유림을 닮았다.


 어쨌든 나는 노골적이고 발칙한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다들 한차례씩 꼬집고 지나가는 엔딩의 판타지조차도.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실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들이 연애에 대해, 관계에 대해, 삶에 대해 얼마나 성숙했느냐가 아닐까.

상처투성이인 자신에게 한없이 연민을 느끼다가도 또 다른 관계에서 상대를 상처입힘으로서 이전에 나를 상처 입힌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 용서하게 되는 것.

그리고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 이 얼마나 씁쓸하고 가혹한 일이냐만은, 연애란 본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걸 다시금 일깨워준 '연애의 목적'이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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