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상, 아카데미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외 유력 영화상의 주요 시상부문에는 조연상이 반드시 있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영화의 완성도에 기여한 뛰어난 배우들에게 주는 상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주연 배우라도 혼자서는 영화를 완성할 수 없다. 막강 주연 뒤엔 묵묵히 주연을 빛내주는 조연이 존재한다. 조연 배우를 위한 상이 따로 있는 이유다.
지금 충무로에는 이문식 김수로 유해진 오달수 이재용 등 이미 스타 군단에 합류한 조연배우의 계보를 착실히 이어가고 있는 새로운 조연 군단이 떠오르고 있다.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서 기본기를 갈고 닦은 이들은 '외장'이야 주연급보다 조금 떨어질지라도 연기 하나만큼은 명품이다.
#카리스마의 달인 류승용 '거룩한 계보'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인용한 영화 속의 대사 "너는 밀어 붙여 나는 퍼 부을 테니"를 읊은 주인공은 정재영도, 정준호도 아닌 류승용이라는 배우다. 영화의 포스터까지 장식한 인상적인 대사가 무표정하면서 결의에 찬 눈빛과 함께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올 때, 영화는 최고로 비장해진다.
김승우를 살짝 닮은 류승용은 장진 사단의 오리지널 멤버다. 인권 옴니버스 '고마운 사람'까지 포함해서 여섯 편의 영화가 모두 장진의 작품. 그전에 5년 동안 '난타' 공연을 하면서 유명세를 탔지만 '거룩한 계보'를 통해 확실하게 얼굴을 알렸다. 정재영이 감옥에 들어가 극적으로 재회하는 정순탄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투톱 주연인 정준호보다 크다.
류승용과 연극 '웰컴 투 동막골'부터 호흡을 함께 한 장진 감독은 "나이 많은 대학 후배"라고 류승용을 소개하면서 "아마 몇년 후엔 '좋은 배우' 리스트에 반드시 올라갈 것"이라고 그의 카리스마와 연기를 칭찬한다. 류승용의 차기작은 세 편이나 된다. 송혜교, 유지태 주연의 '황진이'에서 3각 관계를 이루는 사또 역으로 출연중이며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에서는 영화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인 주막 주인으로 등장한다. 다음달 개봉작인 '열혈남아'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타짜'의 일등공신-김윤석과 주진모 600만 관객을 향해 거칠 것 없이 내달리고 있는 '타짜'에는 거물급 조연들이 총출동했다. 단연 눈에 띄는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귀 역의 김윤석과 짝귀 역의 주진모.
평경장과 함께 3대 타짜였던 짝귀와 아귀는 외모부터 섬뜩하다. 화투판에 영혼이라도 팔아 넘긴 듯 이들의 얼굴에는 사람이상의 정신 세계가 엿보인다. 아귀에게 당해 한쪽 귀가 잘리고 손목마저 잘려 갈고리손으로 나오는 짝귀 주진모는 젊고 잘생긴 배우 주진모와 동명이인일 뿐 전혀 다른 얼굴이다.
올해 '가족의 탄생'에서 김혜옥의 새남편으로 출연했던 주진모는 '거룩한 계보'에서도 정재영의 감방 동료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58년생인 주진모는 80년대 초반부터 대학로에서 활약했던 연극배우 출신. '인류 최초의 키스' '관객 모독' 등의 작품을 통해 거느리고 있는 팬도 많다. 영화에 처음 출연한 것은 지난 93년 박철수 감독의 '학생 부군 신위'였으며 올해 개봉예정작인 '열혈 남아'까지 12편의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다.
MBC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에서 조강지처 하희라를 버리고 요부 같은 아내에게 휘둘리고 있는 남편 역할을 맡아 주부 시청자들로부터 안쓰러운 시선과 미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김윤석은 부산 연극인 출신이다. 김윤석은 올해 '천하장사 마돈나', '타짜' 두 편으로 명품 조연군의 선두 주자가 됐다. 앞서 '범죄의 재구성', '파랑주의보', '시실리2㎞' 등의 영화와 '인생이여 고마워요' 등 드라마 출연작도 꽤 된다.
'천하장사 마돈나'에선 화려한 과거에 얽매인 채 알코올에 의존하는 무능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줬고 '타짜'에서는 비정한 고수의 악마성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아귀는 도박판에서 실력도 속임수도 통하지 않는 공포의 인물이다. 얼굴에 길게 드리운 칼자국과 선글라스로 가린 얼굴은 존재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김윤석의 악역 연기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당대 최고급으로 꼽히고 있다.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의 감초 정석용 '왕의 남자'의 광대 3총사 육갑이, 칠득이, 팔복이 중 칠득이로 출연했던 인상 좋은 배우. '라디오 스타'에서는 영월 방송국의 기술 소박한 엔지니어로 등장했다. 찡한 눈물을 안겨줬던 칠득이, 모자라는 말과 행동으로 따스한 웃음을 안겨줬던 박기사는 정석용의 원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왕의 남자'의 원작 연극 '이'(爾)에 내관으로 출연했던 인연으로 '왕의 남자' 광대패에 합류하게 된 정석용은 90년대 중반 대학로로 진출한 이후 오디션을 통해 '킬리만자로', '무사', '영어완전정복' 등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한 편 끝나면 반년 쉬고, 또 한 편 찍으면 1년 쉬는 식이었다. 지난해 '왕의 남자' 출연을 계기로 정석용의 조연 시대가 활짝 열렸다. 다음달 중순 개봉인 '그해 여름'이 그의 차기작이다.
글 = 손정인 기자 jiso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