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23
아멜리 노통브 -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 없음은 공도 불확실함도 아니었다. 그냥 무 그 자체였다. 그것은 신이 보기에 좋았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줘도 신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은, 무의 상태가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신은 무에서 충만감을 느꼈다.
신의 눈은 항상 뜨여 있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감겨 있었더라도 하나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볼게 하나도 없었고, 신은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의 삶은 달걀처럼 가득하고 빽빽했다. 둥글둥글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삶은 달걀과 똑같았다.
신은 절대적인 만족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고, 어디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 정도로 충일한 삶이어서 삶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신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존재한 것이다.
신이 느낄 수 있을 만한 존재의 시작은 없었다. 현란한 문구로 시작하는 책이 아니면, 아무리 대단한 책이라도 조금 읽다보면 첫 문장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득한 옛날부터 그 책을 읽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와 비슷하게, 어느 순간부터 신이 존재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은 너무나 오래 전부터 존재하는 것 같았다.
신에게는 언어가 없었다. 따라서 생각도 없었다. 신은 포만이고, 불멸이었다. 이 모든 게 신이 정말 신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신이,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아주 우습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있는 눈과 시선이 없는 눈은 어떤 차이가 있나? 이 차이를 바로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생명은 시선이 시작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신은 시선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 발육 단계에서 우리는 신을 파이프라고 부를 것이다.
파이프의 형이상학이 있다. 슬라보미르 므르체크가 파이프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아연해질 만큼 깊이 있는 내용인지 대단히 익살맞은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파이프는 공과 만의 독특한 결합이고, 속 빈 물질이며, 존재하지 않는 다발을 보호하는 존재의 막이다. 호스는 파이프의 유연한 형태이다. 물렁하다고 해서 호스의 신비로움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호스처럼 유연했다. 하지만 단단하고 움직임이 없는 점으로 봐서 분명히 파이프였다. 신은 원기둥의 절대적 고요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우주를 여과했지만 아무것도 흡수하지 않았다.
시선은 선택이다. 뭔가를 응시한다는 것은 거기에 시선을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시야의 나머지 부분은 관심범위에서 제외하겠다는 뜻이 담기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생명의 본질인 시선은 무엇보다, 거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표준을 신성시한다. 진화가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과정의 결과라고 믿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일종의 생물학적.내적 필연성의 지배를 받아 한 살 정도부터 기어다니지 않게 되었고, 몇천 년이 흐른 후 처음으로 직립보행할 수 있게 되엇다고 믿는 것이다.
아무도 돌방성 사고는 빋고 싶어하지 않는다. 외적 필연성 - 이것도 탐탁치 않다 - 혹은 우연 - 이건 최악이다 - 에 의한 돌방성 사고는 인간의 상상에서 배제되었다. 누가 감히, "내가 한 살쯤 되었을 때 첫 걸음을 뗀 것은 우연이다."라고 말하거나, "인간이 어는 날 두 발 달린 동물 행세를 하게 된 것은 우연이다." 라고 말하면 이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우연의 이론은 수용할 수 없다. 우연의 이론에서는 다른식의 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 살 먹은 아이에게 걷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이 두 발로 걷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총명한 인간이 걷는 것을 꿈도 꾸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면,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육감과 지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멍청이들의 거대집단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한다. 악순환이다. 이 멍청이들은 자신들의 지적 능력을 고양하기 위해 쾌감을 억누르는데, 이 때문에 지적 능력마저 저하되는 결과가 생기고 만다. 점점 더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총명하다는 자기 확신은 더욱 커진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쾌감을 느끼면, 쾌감을 느끼게 해준 대상 앞에서 겸손해지고, 그 대상을 찬미하게 된다. 쾌락은 정신을 자극하고, 뛰어난 기교와 깊이를 지닐 수 있게 독려한다. 너무나 위력적인 마술이기 때문에, 쾌감이 없더라고 쾌감에 대한 생각만 있으면 된다. 이런 개념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득의양양한 불감증은 스스로의 무를 찬양하기 마련이다.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은 해당 단어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발음된 단어가 감격하면서, 자신이 인정을 받아 소리로 나왔다고 생각하는게 느껴진다. 우리는, 그 동안 단어에 지고 있던 빚을 갚기 위해, 혹은 단어를 찬양하기 위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이미 네 사람에게 이름을 붙여준 바 있었다. 상대방이 번번이 너무도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이상 말의 중요성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말은 개개인의 존재를 증명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그 동안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사람들은 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도둑처럼 집에 들어왔다
너는 벌써 꽃들과 함께 깊은 휴식에 들어가 있었다
[......]
나는 너의 침묵이 두려운데, 너는 숨을 쉬고 있다
상상의 제국인 너를 나를 붙잡아두고 있다
나는 네 곁에서 불안에 떠는 파수꾼이다
걸음마다 메아리를 만들어 발자국 소리는 두 배로 울려 퍼진다
한밤중에
나는 네 곁에서 집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한밤중에
잎새 한 잎에 괴로워하고 속삭임 한 마디에 고통스럽다
나는 네가 쉬는 시간에 들리는 이 탄식을 위해 산다
나는 모든 것을 향한 내 안의 이 두려움을 위해 산다
한밤중에
오 나의 숫영양, 내일을 사는 자들에게 말해라
여기 엘자의 이름이 유일하게 나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한밤중에.
나는, 우리들 개개인마다 다른 특성이 딱 한 가지 있는 데, 그게 '네가 뭘 혐오하는지 말해 봐, 그럼 네가 누군지 내가 말해 주지.'로 요약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들의 개성은 정말로 별 볼일 없다, 우리들의 취향도 하나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느끼는 혐오감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말해준다.
뭔지도 모른 채, 전진하지 않는 것은 후퇴한다는 우주의 가장 끔찍한 법칙 중 하나가 눈앞에서 구현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성장 다음은 쇠락이다.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절정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건 환상이다. 이래서, 여름이 없었던 것이다. 긴 봄, 생명력과 욕망이 무섭게 솟구쳤다. 하지만 이런 분출이 끝나기 무섭게 벌써 추락이었다.
멀쩡하게 살아나서 억울하고 분했던가? 그렇다. 하지만 때맞춰 구해줘서 안도감을 느끼지는 않았는가? 그렇다. 나는 그래서 무관심해지기로 했다. 살든, 죽든, 결국 나한테는 마찬가지였다. 후일을 기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