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2006)
감독 : 데이빗 프랭클 이렇게 가슴 아픈 영화가 또 있을까? 예고편을 봤을 때 보고 싶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그건 아마도, 낼모레면 환갑을 바라보는 메릴 스트립의 낯선 모습 때문이었을 게다. 처음엔 메릴 스트립인 줄 몰라봤다. 워낙 연기 폭이 넓고 다양한 인물을 소화한 수십년 역사가 있는, 세계가 인정하는 명배우이기는 하지만, 짧은 백발에 명품으로 휘감은 악마스러운(!) 여자가 스크린 속에서 나를 째려보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싸늘한 미소를 날리는데, 속으로 '저 여자는 누구야?' 궁금해졌더랬다. 물론, 이내 메릴 스트립이란 걸 알아챘고, '저 여우같은 배우를 만나야지' 결심했다. 호시탐탐 극장에 갈 짬을 찾다가 결국 토요일 오후 생각지도 못하게 시간이 났다. 이번주 개봉영화 중 와 를 보기로 이미 점찍어두었고, 주말인데 슬픈 영화를 보는 것은 좀 청승맞을 것 같고, 예고편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경쾌+발랄한 영화일 것으로 확신이 서는(!) 를 선택했다. 바뜨, 그러나... 이 영화 너무 슬프다. 절대 캐발랄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얼굴이 도무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같이 갔던 20대 어린 친구는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가슴이 아프다. 물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명품을 휘감은 앤드리아(앤 헤서웨이)가 패션쇼를 하듯 수초 상간으로 옷과 구두, 가방, 헤어스타일을 바꾸며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고, 한시도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캐발랄 영화의 필요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슬프다. 앤 헤서웨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원작에서는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끌고가던 중심축이었을(안 읽어봤으므로 추측) 앤드리아는 영화에서 악마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광휘 앞에 빛을 잃는다. 오히려 조연급인 동료 에밀리(에밀리 브런트)가 훨씬 생동감 있게,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나는 내 직업을 사랑해, 내 직업을 사랑해" 주문을 외듯 자기암시를 하며 안간힘으로 버티는 에밀리를 보며 공감하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성공이라는 신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란다와 에밀리에 비해 앤드리아는 그저 칭얼대기만 하는 다섯살배기 어린아이 같다. 이 영화가 슬프게, 가슴 아프게 느껴졌던 건, 미란다와 미란다가 되고 싶은 에밀리들의 전쟁같은 일상이 너무도 생생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아"라며 휴대전화(미란다)를 분수대에 던져버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발길을 돌리는 앤드리아를 보며 (보통 영화 전개상 갈등의 해결 대목이니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할 텐데도) 전혀 속시원하지 않았다. 다섯살배기 앤드리아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미란다를 떠난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소신이 있는 자리('뉴요커' 기자) 역시 또 다른 미란다와 에밀리들이 전쟁같은 일상을 치르고 있을 텐데, 그때는 어쩌려고 저럴까, 한숨부터 나왔다. 물론, 앤드리아는 런웨이에서 미란다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자신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하지만,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을 전해준 스승 미란다에게 인사 한마디 남기지 않고 도망치듯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 그다지 미덥지 않다. 그래도 믿어봐야지. 넘어지고 깨지고 부딪치며 프라다를 입는 악마와 앞치마를 두른 천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일하는 여자'들의 숙명이라면. 물론 모든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아니, 오히려 악마 소리를 들으면서도 앞치마까지 둘러야 하는 여성들이 더 많다는 게 엄연한 현실이긴 하지만. 설사 프라다를 입더라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남편이 떠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애원하는 아내와 보살핌이 부족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니로 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이긴 하지만. p.s. 생명력 있는 악마, 공감가는 악마를 만든 그녀, Meryl Streep 앞서 말했지만, 난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픽션을 가미한 논픽션소설을 읽지 않았다. 영화가 나온 뒤에야 이 소설의 존재를 알았고, 소설 속 미란다는 영화 속 미란다와 전혀 딴판이란 것(앤드리아 입장에서 오로지 악마같은 존재)도 알게 됐다. 각본의 힘이 분명 있겠지만, 불쌍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못된 악마 미란다에게서 "왜 일에 성공한 여자는 악마로 살아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또 다른 주인공 미란다를 만든 힘은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에게서 나온다. 원작보다 영화가 낫다는 세간의 평 또한, 심지 곧고 착한 주인공의 고난극복(또는 탈출)기라는 뻔한 이야기에서 '여성의 생존'이라는 묵직한 무게를 끄집어낸 미란다, 메릴 스트립 덕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과 닮았다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믿었던 앤드리아가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신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미란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결국은 악마라는 딱지를 못 버텨내는구나. 하지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곳 역시 악마라는 낙인을 이겨내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걸. 어느 곳에 있든 멋진 악마가 되길 바래.' 이렇게 속으로 응원하고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