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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파트 대폭락예고 일본을 보라~!

김용철 |2006.11.07 12:46
조회 68 |추천 1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초까지 일본은 말그대로 거품나라였다. 한국의 용인쯤되는 지바(千葉)의 교외지역에는 수억엔(수십억원 가량의) 주택가가 속속 등장했다. 미국의 비버리힐스를 본따 지바리힐스라고 불렸다.

86년부터 89년까지 일본에서 땅값이 올라 생긴 자본이득은 1452조엔. 86년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1배다. 부동산과 땅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막대한 부를 손에 쥔 이들이 고급 외제차를 타고 흥청망청 즐기는 풍경이 급증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반대로 샐러리맨들의 내집 마련의 꿈은 영영 멀어져갔다.

◆거품경제의 시작은 = 83년 경부터 조짐을 보이더니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본격적화했다. 미국과 유럽의 요구에 따라 엔화 강세를 용인한 일본 정부는 저금리 대책으로 대응했다. 엔고로 인한 수출 감소를 만회하기 위해 일 정부는 5%대였던 금리를 86년 1월부터 87년 2월까지 5차례에 걸쳐 2.5%로 인하했다.일단 경기를 살리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일본 정부의 판단이었다. 엔고를 장기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는 관심밖이었다. 정치권도 동조했다. 지역구 수출기업 등의 압력을 의식해서다. 경기는 괜찮은데도 저금리 등 과도한 금융완화 정책이 너무 오래 이어졌다.

시중에는 돈이 남아돌았다. 통화증가율은 85년 3.8%에서 88년 13%로 확대됐다. 넘치는 돈들은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몰렸다. 은행들은 조달금리보다 운용금리가 높아지자 금융자산 및 부동산 보유비중을 늘렸다. 개인ㆍ기업들도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아 다시 부동산을 사들였다.

기업들이 사들인 토지는 84년까지 매년 8500억엔 수준이었지만 85∼90년 사이에는 8배나 되는 연 평균 6조7000억엔 규모로 치솟았다. 부동산값은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다. 도쿄를 포함한 일본 6대 도시 상업지의 평균 땅값은 85년을 100으로 봤을때 87년 201.4, 90년 374.6로 올랐다. 

◆안이했던 대응 = 정부 일각에선 이러다 큰 일 난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토지 불패신화를 믿는 목소리가 더 컸다. 또 금리를 올렸다간 경기가 고꾸라질 수 있다며 세제를 통한 투기억제 등 미봉책에 치중했다.

80년대 중후반 잇따라 양도세 인상, 토지거래 감시구역제도(한국의 토지거래 허가제와 유사) 등 각종 대책을 쏟아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양도세를 올리자 매물이 줄어 오히려 부동산 값을 부추겼다. 또 가계나 기업을 의식해 보유세 부담을 낮게 유지한 것도 버블을 키웠다.

◆과격했던 버블 깨기 = 부동산값이 너무 오르자 일본 정부는 결국 금융에 손을 댔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일본은 89년 5월부터 90년 8월의 16개월 동안 금리를 2.5%에서 6%까지 인상했다. 저금리에서 고금리로 180도 정책을 바꾼 것이다. 90년 4월에는 부동산 대출을 규제하는 총량규제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대장성 내부는 미온적이었다. 금융과 세제는 부동산 대책의 조역일 뿐 주역이 아니다(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대장상) 자유경제에 반하는 난폭한 조치(쓰치다 마사아키 은행국장)라는게 대장성의 속내였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대장성을 물러난 이후 당시 (버블 제거를) 더 빨리 했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이미 부풀 대로 부푼 버블은 금리인상과 세제 등 전방위적 공격을 받자 일순간에 무너졌다. 열탕-냉탕식 정책이 버블을 서서히 가라앉히지 못하고 급격히 붕괴시킨 것이다..

◆잃어버린 10년 = 91년부터 부동산과 주가가 폭락하면서 금융회사와 개인의 파산이 속출했다. 본업을 잊고 부동산투자에 나섰던 교와(共和)ㆍ아리토요카세이(有豊化成) 등 수십개 알짜기업들이 부동산 투자 실패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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