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응오 왕조(939~965)
남한을 물리친 이후 939년 봄 응오꾸옌은 중국이 자신에게 봉한 절도 사직을 버리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꼬 로아로 천도했다. 꼬 로아로의 천도는 과거 독립 왕조로서 남월의 조타와 대립했던 어우 락의 전통을 이으면서, 지역에서 비롯된 경제와 국방의 이점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했던데 있겠다. 응오조는 문무 관직을 세우고, 조정의 각종 의식을 규정하고, 관직에 따라 관리들의 의복 색깔을 정했던 일에서 중국의 제도를 모방했다. 응오 조는 외적으로는 완전히 독립된 봉건 왕조의 중앙집권제였지만 내적으로는 중앙의 왕권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했으며 944년 응오 꾸옌의 사망과 함께 곧바로 무너지게 되었다. 그의 사망이후 처남인 즈엉 땀 카가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사실이 알려지자 지방의 많은 토호들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각 지방에서 복병으로 존재하던 세력들이 권력을 좇아 '십이사군의 난'으로 나타났다. 십이사군이 20년 간을 서로 치고 받고 병합되는 혼전의 양상속에 베트남 민족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가장 먼저 일어난 자는 쩐람으로 그의 사후 딩 보 링은 군사를 이끌고 호아 르로 옮겨와 세력을 키워 나갔다. 즈엉 땀 카는 응오 쓰엉 반을 후계자로 정하나 응오 쓰엉 반은 장수들을 회유하여 그를 죽이고 응오조를 회복하나 난국을 수습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남한에 신복을 자처한다.
2. 딩왕조(968~980)
십이사군의 난을 평정한 딩 보 링은 국호를 다이 꼬 비엩이라 칭하고 스스로 황제라하여 수도를 호아 르로 정했다. 이는 중국의 남진을 염려한 군사적 원인에 있다. 딩 보 링은 궁전을 짓고, 조정의 의식을 규정하고, 문무백관의 직제를 세워 공에 따라 관직과 채읍을 주었다. 딩 보 링이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개별적인 연호를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더이상 중국의 어떤 간섭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과 자국이 독립 왕조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송의 남진을 염려한 딩 보 링은 자신의 아들을 중국에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바쳤다. 딩 조 때에는 유교가 발달하지 못하여 불교와 도교가 본연의 종교 역할 외에도 지식의 대표로서 정치를 돕는 역할을 겸했다. 딩 보 링은 불교를 국교화하고 전국의 승려를 질서있게 관리하기 위하여 승직을 세웠다.
딩 보 링이 죽자 어린 딩 뚜에가 황제로 추대되나 국권은 레 호안의 손에 넘어간다. 송의 남진 소식을 접하고 국가 존망의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어린 황제로는 국난을 회복할 수 없으니 레 호안으로 즉위케하자는 제안하고 이후 레 호안이 제위에 오른다. 이로써 딩조는 개국 14년만에 끝난다.
3. 전레왕조(980~1009)
1) 송의 침략
딩조말의 혼란을 틈타 새로운 왕조를 연 레 호안은 자신을 대행황제로 칭한다음 연호를 정했다. 981년 송은 수륙 양면으로 베트남을 공격해오나 실패하고 송군을 물리쳤지만 송군을 두려워하고 있던 레 호안은 화친을 제의하고 조공을 올린다. 이후 송은 베트남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레 호안을 정해절도사로 봉한다.
2) 점성의 침략
국내의 안정과 힘을 바탕으로 북방으로의 세력 확장을 엿보던 점성은 딩조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북진을 하였다. 그러나 레 호안은 점성의 수도 인드라푸라까지 진격하고 레호안의 남진 이후 점성은 베트남에 족오을 바치기 시작하고, 1697년에 멸망하기까지 쇠퇴의 기로에 빠졌다.
3) 왕권의 강화
통치기간 동안에 크고작은 소요가 끊기지 않으나 레 호안과 아들 롱 딩은 친정하여 모든 난들을 평정한다. 한편 984년에는 베트남 최초의 화폐인 티엔 푹을 주조한다. 중앙의 관제에 있어서는 대개 딩조의 것것을 모방하나 일부 관직은 당의 것을 모방한다. 식호제도는 레조에서부터 처음 시작되며 국왕이 친경의식을 하여 권농하기도 한다. 농업발전과 더불어 레조 때에는 국내외적인 통상도 발전하여 점성과 중국과 통상무역이 잦았다. 군사제도로는 천자군을 두었다.
4) 전레왕조의 멸망
레 호안 사후 롱 비엩이 즉위하나 동생 롱딩에게 죽고 만다. 롱딩은 보위에 오른지 4년뒤 죽고 제위는 리 꽁 우언에게 넘어간다.
4. 리왕조(1009~1225)
1)
리 타이 똥은 수도를 지금의 하 노이인 다이 라로 천도했다가 탕 롱성이라 개명한다. 리조의 국가조직은 이전 딩조와 레조의 제도를 보다 체계화하였지만 대부분의 관제는 송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1075년 베트남은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의하여 관리를 선발하고 그 이듬해, 국자감이 설립된다. 국자감의 입학자격은 귀족과 관리들의 자녀로 한정된다.
리 꽁 우언은 황제친위군을 두고 타잉 똥은 친위군을 증강하였으며 군대를 정병과 번병으로 분리한다. 이들은 병농일치의 원칙에 의하여 6개월 순번제로 농사와 병역을 담당하였으며 전시에는 모두가 전쟁에 참여하였다.
리조초에는 전레조의 법제를 수용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문서화된 형태의 피고를 취조하는 방법과 형량을 규정한 형서를 집대성한다.
리조의 불교는 베트남 4천년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를 맞는데 리조는 승려들을 귀하게 여겼고, 많은 사원과 사탑과 종을 만들었으며 불교건축문화가 발달한다.
리조의 경제는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발전을 보게되는데 토지의 매매와 사전제도도 보편화된다. 채읍은 상속권이 없이 당대에 한정되나 척도전은 공신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식읍의 한 유형으로 면세의 형식으로 후세에게 세습된다. 왕실소유의 국고전은 개간 간척사업을 통하여 새로이 형성된 왕실 소유의 토지로 둔전의 형태로 볼 수 있다.
2)
리조는 산간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의 소요를 수습하기 위하여 유화 무력의 이원정책을 폈으며 유화정책으로는 통혼 관계가 대표적이다. 한편 소수민족에 의해 일어나 일어난 난 중에서 가장 위협적이었던 것은 눙족의 반란이다.
3)
년 똥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이를 베트남을 재병합할 호기로 여기던차에 송은 남진을 추진하나 3주를 유린당하고 이후 송은 점성과 진랍을 끌어들여 베트남을 공격한다. 지금의 박 닝 꺼우강의 접전에서 리 트엉 끼엩은 자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시를 지어 읽는데 베트남인들은 이 시를 베트남 최초의 독립선언서라고 말한다. 꺼우강을 사이에 두고 접전이 장기화되면서 리 트엉 끼엩은 중국측에 사신을 보내 종전을 제안하고 송군은 5개주를 할양받는다. 이후 1087년에 베트남왕을 안남국왕이라 칭하는데 이는 중국이 스스로 베트남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다.
타이 똥 때에는 서남부 지역에 위치한 아이 라오, 점성, 진랍등의 잦은 침략이 있었다. 점성은 레호안에 의하여 크게 위축되었음에도 계속해서 베트남을 침입하였고 1103년 점성으로 도망한 리쟉은 점성왕 쩨 마 나를 사주하여 베트남을 치게하나 리 트엉 끼엩의 공략으로 다시 3개주를 빼앗긴다. 이로써 베트남의 영토는 호아잉 선에서 꾸앙 찌까지 확대되었으며 반대로 점성은 이를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진랍의 수리야바르만 2세는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여 베트남과 점성을 진격하였다.
4)리왕조의 멸망
리조의 장기통치기간중 가장 번영을 누렸던 시기는 황제의 인격과 자질이 뛰어났던 타잉 똥 때와 당대의 유학자였던 리 다오 타잉의 국정능력으로 인해 년 똥 때였다고 할 것이다. 한편 리조의 종말을 재촉했던 결정적인 사건으로는 아잉 똥때의 턴 러이의 난을 들수 있다. 이후에도 산악지역의 소수민족의 반란은 리조의 종말을 재촉했으며 인재와 자연재해 외에도 국사를 볼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 황제, 귀족관리들의 무자비한 착취를 들 수 있다. 아잉 똥 사후 까오 똥이 즉위하고 이어 후에 똥의 즉위하나 이후에도 내 외란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후에 똥의 차녀 찌에우 타잉 공주는 베트남 역사의 유일무이한 여왕이지만 쩐 투 도에 의해 쩐 까잉과의 혼인이 선포된 이후 여왕의 제위를 쩐 카잉에게 양위케한다.
5. 쩐왕조(1226~1400)
1) 쩐왕조의 건국
건국과 함께 쩐조는 봉건 세력들간의 분쟁을 평정하고 중앙 집권제도를 강화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중앙 집권제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왕조 설립 과정에 공이 있던 왕족과 풍 따 쭈 같은 무리를 왕후로 책봉하여 식읍을 지급하고 사병을 소유할 수 있게 하였다. 문무백관의 관제는 리조의 것을 대부분 수용하고 전국을 12개 로로 나누었다. 쩐조의 관제는 리조보다 훨씬 정돈되었는데 관료계급에게는 일정한 봉록이 지급되어 품에따라 식읍 혹은 식호를 받았으며 모든 관직은 세습되었다. 이외에도 쩐조는 과거시험을 통하여 재능있는 자들을 관리로 기용하였다. 한편 군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수도를 지키는 금위군과 지방을 지키는 지방군을 하나로 하는 정규군을 두었다.
쩐조는 리조말과 쩐조초에 있었던 내란을 수습하자 곧바로 국경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는데 노력했고 점성으로부터 취득한 영토를 확고히 할 목적에서 점성을 침략하여 왕비와 수많은 군민을 생포하였다.
장원제도는 쩐조에도 계속 발달하였는데 국가소유의 공전과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공전을 소유하게된 왕족과 귀족 공신들의 식읍은 상당했다. 쩐조초에는 대부분의 장원들이 농민들에 의해서 경작되지만 몽고항쟁을 거치면서 각종 원인으로 농민들이 노비로 전락하는 사례가 일상화되어 쩐조말에는 장원의 대부분이 노비에 의하여 경작된다.
2) 쩐왕조의 산업발달
쩐조의 경제발전의 모토는 농업에 있었고 쩐조는 처음부터 개간과 간척사업에 주력했다. 여기에는 노비 외에도 군인과 상인들이 동원되었다. 홍수를 막고 교통망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방사업에도 힘을 쏟았고 안정적인 조세와 부역 및 병역을 확보할 목적에서 1288년 타잉 호아지역을 필두로 장적을 다시 만들어 남자를 3종류로 분류했다. 토지가 있는 정남은 정세와 지세를 일년에 한번 각각 돈과 벼로 납부했으며 공전은 두종류로 분류되어 각각 세가지 형태의 세율에 의해 모두 벼로 납부되었다. 쩐조의 상업은 더욱 발달하였으며 홍강을 중심으로 다이, 로, 마, 주, 람강이 위치한 각 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망이 있어 상업 발전을 더욱 촉진하였다.
3) 민족문화의 발전
쩐조에는 선종의 또 다른 종파인 죽림파가 타이 똥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리 트엉 끼엩의 한시에 나타난 민족의 정기는 쩐조의 한학의 발전에 힘입어 계속 이어진다. 쩐조의 민족문화의 발전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라고 한다면 민족어 쯔놈과 대월사기같은 역사 편찬사업을 들 수 있다. 한편 쩐조에는 다이 라 예술이라 일컫는 건축과 조각문화가 발닥한다. 쩐조의 문화는 중국 문화의 요소외에도 인도와 점성과 몽고 문화의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다.
4) 몽고항쟁
몽고의 제1차침입-쿠빌라이는 남송을 점령하기로 하고 운남에 머물고 있는 우량카다이로 하여금 먼저 베트남을 확보하도록 한다. 우량카다이는 병력을 국경 지역에 집결해놓고 베트남에 조공과 항복을 요구하다 1257년말에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홍강을 따라 베트남으로 진격한다. 몽고군은 베트남을 밀어부쳐 순식간에 탕 롱성을 점령하나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외에도 지세에 익숙치 못한 이유로 더이상의 공격을 전개할 수 없었다. 오히려 탕 롱성 남쪽 동 보 더우에서 베트남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전세의 역전으로 철수한다.
몽고의 제2차침입-남송을 병합함으로써 중국정복을 완료한 몽고는 점성에 행중서성을 설치하며 나아가 베트남을 고립화하여 남북에서 베트남을 공략하기 위한 군사적 전략도 함께 한다. 몽고의 베트남 공략은 3방향에서 이루어지며 많은 병력과 기병에 의한 기동력이 말해주듯 몽고군은 수월하게 탕 롱을 포함한 많은 지역을 점령해간다. 하지만 몽고군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접전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전쟁의 양상은 역전되어 1차 항전때와 같이 베트남의 자체파괴전, 유격전에 의한 장기전술, 풍토병 등의 요인에 의하여 마침내 몽고군은 무너지고 만다.
몽고의 제3차침입- 몽고의 3차침입은 이전 1,2차 침략때보다 훨씬 강도있고 신속하고 전략적이었는데 1287년 몽고군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베트남 침략을 감행한다. 삽시간에 수도 탕 롱과 반 끼엡을 점령하고 해로를 통하여 운반되어 오는 식량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바익 당 강을 거슬러 반 끼엡으로 식량과 병기를 운반하기로 하였던 몽고의 선단이 섬멸됨에 따라 몽고군의 전세는 일시에 뒤바뀌고 만다. 이는 곧바로 패전으로 이어지고 오마니의 통솔아래 철수하던 몽고군은 바익 당강에서 전멸되고 말았다.
몽고항쟁의 승리 요인은 여러 원인이 결부된 복합성을 띠며, 이는 쩐 꾸옥 뚜언의 뛰어난 전술과 베트남의 지형, 지세, 기후등 여러 요소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개발한 유격전을 들수있다. 베트남의 독특한 지형과 기후는 몽고군의 생체리듬에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위로는 왕으로부터 밑으로는 민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인들의 하나같이 통일된 불굴의 의지, 강력한 군사력과 엄한 법률을 기반으로 했던 쩐조의 정책, 남의 외교 역량으로 베트남은 3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