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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엮인 글 ; [문화대혁명 40주년] 文革박물관 르포 그리고 비판, 영향...

이양자 |2006.11.13 14:55
조회 60 |추천 0



[문화대혁명 40주년] 中國 유일 文革박물관 르포  
  











[문화대혁명 40주년] 中 유일 文革박물관 르포


 


“이념의 생지옥, 잊으면 또 겪어”

中정부 철저한 함구령속 민간 후원금으로 세워











 
▲ 중국 광둥성
산터우시 외곽의
청하이구 타산 유원지
내에 있는 중국 유일의
문화대혁명 박물관내
희생자 추모벽.
 
 
소풍 온 초등학생들이
벽에 써 있는‘문혁은
당과 국가, 각 민족,
인민에게 엄중한 재난
을 가져온 내란이었다’
는 중국 공산당의 결의
내용을 읽고 있다.
 
 
    산터우에서
  =조중식특파원



 “이것 좀 봐요. 이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노(老) 공산당원 위(余·73)씨는 비문(碑文)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청하이(澄海)현 부서기를 지낸 우런슈(吳仁秀)라는 사람의 비문 끝에는 ‘1968년 8월 17일 난을 당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14개 비문이 모두 그랬다. ‘천환신(陳煥新)~1968년 11월 11일 난을 당하다’ ‘위시취(余錫渠)~1968년 6월 16일 난을 당하다’….



 


“추모비를 세울 때 ‘쇠꼬챙이에 찔려 죽다’ ‘생매장당하다’라는 표현을 감히 적지 못했습니다. 단지 ‘난을 당하다’라고 썼을 뿐이죠.”

중국 유일의 문화대혁명 박물관이 있는 광둥(廣東)성 산터우(汕頭)시 외곽의 청하이(澄海)구 타산(塔山) 유원지. 문화대혁명 40주년(16일)을 앞둔 지난 13일 오후, 박물관은 한산했다.



 


추모비를 지나 박물관으로 오르는 산비탈에 20여기의 무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발길을 잡았다. 묘비석에는 2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뒤에 ‘~지묘(之墓·~의 묘)’라고 적혀 있다.


 


 위씨는 “문혁 난동이 극심했던 1968년, 반혁명세력으로 몰려 살해당한 희생자들이 한꺼번에 묻힌 곳”이라고 했다. 청하이구는 문혁의 중대 재난지역이었다고 한다.


 


문혁 주도세력이 장악한 생산대와 기존의 당권파를 지지하는 생산대가 이곳에서 총·칼을 동원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때 총살되거나 군중집회에 불려나가 맞아 죽은 사람이 381명, 부상을 입은 사람이 4500여명에 달했다.


‘중국의 역사를 수십 년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문혁은 ‘전 인민의 의식개조’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마오쩌둥(毛澤東)이 당내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 등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자)를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대약진운동(1958년부터 수년간 마오쩌둥이 주도한 경제생산 배가운동) 실패로 당권에서 배제된 마오는 “사령부를 공격하라”는 구호로 어린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동원, 실용주의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당·정 간부와 대학교수 및 지식인들은 어린 학생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다. 문혁 기간(1966~1976년) 중국 전역에서 1000만명이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산터우 청하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300여 차례나 끌려나가 홍위병들 앞에서 공개비판을 받았다는 위씨는 “형벌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파시스트보다 더 파시스트 같았고, 지옥보다 더 지옥 같았다”고 했다. 청하이 문혁박물관 벽면에는 당시 상황을 재현한 1100장의 사진과 자료가 623개의 검은 석판에 새겨져 있다. 홍위병에 둘러싸여 비판 받는 류사오치, 머리에 고깔을 쓴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군중들…, ‘늑골 9개 골절, 머리의 심한 상처로 뇌출혈 사망’이라고 적힌 사망 경위서도 있다.



 


문혁은 중국에서 아직도 ‘금기의 대상’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역시 청화대(淸華大) 졸업 후 문혁파의 탄압을 받았지만, 그가 이끄는 공산당은 여전히 문혁에 대한 어떤 연구나 토론도 금지하고 있다. 이와 관련, 공산당이 이미 마오쩌둥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공적이 7할이고 과오는 3할)’이란 평가를 내린 마당에, 더 이상의 ‘재평갗는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자유아시아방송의 중국문제평론가인 린바오화(林保華)씨는 “문혁 실체에 대한 논의는 공산당의 기본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베이징대학의 한 교수도 “문혁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6·4 천안문’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 있는 민감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산터우 부시장을 지낸 펑치안(彭啓安)씨 등이 1996년부터 9년 동안 각계의 지원금을 받아 문혁 박물관을 완성했다. 박물관 큰 돌에는 지난해 숨진 문학가 바진(巴金)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혁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문혁박물관을 짓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과거를 잊지 않아야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박물관을 나서면서, 현실을 도외시한 이념과잉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보여준 문혁의 과오가 지구촌에서 아직 종결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터우 汕頭=조중식특파원 jscho@chosun.com

 
 

         남아있는 文革의 그림자


 














▲ 이정남 고려대 연구교수
16일은 중국대륙에서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지 꼭 40년이 되는 날이다. 올해는 문화혁명 종결 30주년이 되는 해이며, 중국공산당이 1981년 제11기 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문혁(文革)을 “국가적 대재난을 초래한 극좌적 오류”로 공식 평가한 지 2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최근 들어서는 문혁에 대한 중국 좌파 지식인들의 재평가가 새로운 쟁점으로 등장하고도 있다. 이들은 최근 중국에 확산되고 있는 불균형 발전과 양극화 문제를 “개혁개방정책 성공의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라, 체제전환이라는 노선착오가 가져온 근본적이고 본질적 문제”라고 비판하고 있다.

 

최근까지 문혁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인식은 그런 재평가가 발붙일 틈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부정적 측면 일색이었다. 문혁의 상처와 아픔이 그만큼 깊었으며, 그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혁이란 것이 ‘자본주의 반동파’라는 딱지 하나 붙이면 사소한 개인적 이해관계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던 불신과 반목, 투쟁의 한마당이었던 것이다.



 


문화혁명 당시 불신과 반목, 투쟁은 정치적 위험에 노출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표현됐다. 그러다 보니 대중의 정치적 불신과 무관심, 관료들의 관료주의적 소심성이 만연하게 되었고, 노선투쟁에 따른 사상적 혼란과 당 지도부와 체제 자체에 대한 환멸감이 팽배하게 되었다.


당정부문의 공식기구가 “수정주의 집단의 소굴”로 간주되고 권력 핵심 세력조차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파벌통치에 바탕을 둔 인치(人治)가 주요한 통치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따라서 부패도 만연하게 되었다.


 


그런 문제들은 현재까지도 심각한 폐단으로 남아 있어, 중국 공산당이 당면 정치개혁의 주요과제로 “법치의 구현, 통치의 절차화와 제도화, 부패의 근절”을 강도 높게 외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물론 문혁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에 그치고 있다. 개혁개방정책이 문혁의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고, 문혁에 대해 덩샤오핑(鄧小平)은 “우리의 개혁개방정책이 일치된 의견으로 나타난 공(功)은 10년간의 문화대혁명에 돌려야 한다”는 역설(逆說)을 펴기도 했다.


또한 문혁세대인 장년층이 홍위병 운동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폐해는 역설적이게도 이들 세대를 건너뛰는 빠른 세대교체로 나타나기도 했다.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되어 개혁개방정책을 활기차게 추진하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아이러니를 낳은 것이다.



 


문혁에 대한 그런 부정적 시각이 중국사회의 주류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 다시 문혁에 대한 재평가 문제가 제기된 근본적 원인은, 한마디로 말해 ‘중국 학자와 지식인들이 문혁의 발생원인과 평가에 대해 철저한 연구와 극복을 진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학자와 지식인들은 서구학자들이 제기한 ‘상층부 권력투쟁설’을 부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객관적이고 분석적이면서, 심층적인 학문적 연구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런 현상 역시 문혁의 유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개혁개방노선으로의 전환은 곧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열매였고, 개혁개방정책의 성과는 그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중국사회에는 이에 대해 감히 부정적 견해를 제기할 수 없는 정치적 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개혁개방시기에도 집권세력만이 정치노선을 결정한다는 독점적 지위를 향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현재도 문혁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잔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혁이 중국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결국 중국 내에서 정치권력 독점을 둘러싼 좌우 간의 이데올로기적 논쟁의 시대가 끝나야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이정남 · 고려대 평화연구소 연구교수 · 중국정치
 


 

[ 문화대혁명과 그 영향 ]


 




중국은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걸쳐 소련과의 관계악화, 계속되는 자연재해(1959-61), 인민 공사를 축으로 하는 「대약진 운동」의 정체 등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향해 착실히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갑자기 「문화대혁명」(1966.5)이 일어난 것은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그 발단은 오함(吳晗)(1909-69)의 「해서파관(海瑞罷官)」에 대한 비판이었다.


 


(황제에게 직간하고 관직을 떠난 해서를 높이 평가하고 묘사한 것임; 이는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고 군의 근대화를 주장


하다가 실각한 팽덕회(彭德懷) 전 국방장관을 변호한 것으로 간주되어 그 정치적 의도가 추궁된 것임. 극작가 전한(田漢)과 역사학자 전백찬(翦伯贊), 역사학자, 문학가로 유명한 곽말약(郭沫若)도 자기비판을 했다).


 


그것이 정치투쟁 , 계급투쟁 , 권력투쟁의 모습을 띤 것은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으로 호칭이 통일된 1966년 5월 이후였다.
모택동의 호소에 의한 대량의 「홍위병」이 규탄자로 등장하여 당 , 정부 , 군의 지도자들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로 비판받았으며 학교와 직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반사회주의 분자로 규탄되고 지위를 빼앗겼다.



천안문 광장에는 100만의 군중이 모여들고 길거리에는 대자보(大字報)가 범람했다.


그러나 급격한 운동의 고양은 홍위병과 노동자의 충돌, 홍위병끼리의 싸움, 생산의 정체, 홍위병의 ‘경험교류’에 따른 교통망의 마비 등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다.


.



문화대혁명은 다음의 세 가지점에 주목된다.



1) 사회주의 국가에서 계습투쟁의 필요가 강조된 것.
2)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공산당 조직 자체가 혁명의 표적이 된 것.
3) 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던 모택동 주석 자신이 조반(造反)의 선두에 선 것 등이다.



당주석이 “사령부(당중추)를 포격하라”고 부르짖은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내에 계급투쟁 중시파와 생산력 증강 중시파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던 것.
둘째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기본노선을 둘러싸고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사이에 대립이 있었고, 따라서 유소기(소련노선에 가까움)파와 그것을 수정주의 노선으로 보는 모택동파 사이의 상반된 의견이 존재한 것.
셋째 1959년에 국가주석을 유소기에 넘긴 이래 점차 희미한 존재가 되었던 모택동과 그 주변인물이 권력의 탈회를 노린 것 등이다.



예상 밖의 혼란 가운데 권력을 장악한 모택동은 사태수습에 나섰다.


1968년 10월의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2회 전체회의에서 유소기 등을 당내외 일체의 직무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하고 그 위에 1969년 4월에 열린 제9회 당 전국대표대회는 문화대혁명을 계속 추진할 것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인사의 단행과 새로운 규약을 결정하고 일단 문제의 결말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혼미는 거듭되었다. 1972년 9월 임표의 쿠데타 사건(기도가 실패하여 소련으로 도망가다가 몽골 영내에서 추락사한 사건),


1975-76년에 걸쳐 「비공비림」운동(주은래(朱恩來)를 공자에 비겨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운동)이 전재되었는데, 이는 모택동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이용하여 당. 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려고 기도한 강청(江靑)(정치국원; 1914-91), 장춘교(張春橋)(부수상, 당정치국 상무위원;1917-), 요문원(姚文元)(당 정치국원;1930-), 왕홍문(王洪文)(당 부주석; 1934-92) 등 ,4인방인 문혁급진파가 추진하였다.



이 단계에 이르면 문화대혁명의 정신은 완전히 변질되었고 당시의 사회는 생산력이 저하되고 교육은 황폐화되어 모든 면에서 질식 상태에 빠졌다.
이러는 동안 중소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1969년에는 우수리강의 진보도(珍寶島)(다만스키 섬)에서 국경경비대의 무력충돌이 일어나 국경문제로 긴장이 고조되자 중국은 서슴지 않고 소련을 「사회제국주의 국갯라 불렀다.



한편 1971년 10월의 제26회 UN총회에서 중국은 합법적인 지위를 회복했다. 그리고 1972년 2월에 닉슨의 중국방문과 동년 9월에는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1976년은 중국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주은래(1월), 주덕(7월)에 이어 모택동(9월)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 세 사람의 죽음은 체제의 동요와 격렬한 권력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강청 등「사인방(四人幇)이 반혁명분자로 체포되고 등소평의 복권(1977년 7월 당 제10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이 결정됨으로써 문화대혁명과 모택동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의  문화대혁명 비판 


 


            "문화대혁명은 완전한 잘못"







 
   1981년 전면 부정하는 입장발표 뒤엔 공식논의 금지…   
   


               민간차원에서 재평가 요구


 


                               (이하 방현철 주간조선 기자 글)







중국의 관영통신인 신화통신은 올해 초 짤막한 부음 기사 한 건을 타전했다. ‘작년 12월 23일 린뱌오(彪),장칭(江靑) 반혁명 집단의 주범인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당뇨병으로 사망. 남자. 74세. 1981년 1월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20년형 선고 받음. 1996년 10월 만기 출소.’ 야오는 문화대혁명을 촉발시켰던 ‘새로 나온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논한다’라는 글을 썼던 인물이다.


 








▲ 문화대혁명 당시 '반동'으로 몰린 한 사람이 군중 앞에 끌려나와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1965년 당시 34살이던 야오는 베이징(北京) 부시장이자 역사학자인 우한(吳日含)이 쓴 역사극 ‘해서파관’을 마오쩌둥에 대항하는 글이라는 흑백논리를 동원해서 비판했다. 해서파관은 명나라 시절 황제에게 상소했다 파직 당한 관리의 억울함을 다룬 역사극이었다. 야오의 글은 전국적으로 문학과 예술 분야의 비판 운동을 일으켰고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다.


 


‘문혁의 입’(文革口)이었던 야오는 천부적인 글 재주를 자랑하며 38살에 중국 최고 권력층인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까지 올랐다.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한 ‘부르주아 민주파’(資産階級民主派), ‘아직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집단’(還在走的走資派)이라는 단어도 그가 만든 것이다.


 


야오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4인방(四人幇)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다. 4인방은 왕훙원(王洪文), 장춘챠오(張春橋), 장칭, 야오원위안을 가리킨다.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인 장칭은 1981년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1991년 자살했다. 왕훙원은 1992년, 장춘챠오는 2005년 각각 무기징역 중 병이 악화돼 숨졌다.


 


4인방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현재 중국 대륙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논의는 공식적으로 금기시돼 있다. 공산당은 1981년 6월 11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1기 6중전회)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해 ‘전면 부정’을 선언한 후에 더 이상의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당시 채택된 ‘건국 이후 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혁(문화대혁명)은 이론과 실천 모두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문혁은 어떤 의미에서도 혁명이나 사회진보가 아니다. 문혁은 지도자(마오쩌둥)의 잘못에서 시작된 것으로 반혁명 집단에 의해서 이용당했다. 문혁은 중국공산당, 국가, 각 민족에 엄청난 재난인 내란을 불러왔다.”


다만 공산당은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문혁의 책임은 있지만 문혁의 잘못보다는 중국 혁명을 성공시킨 공적이 더 큰 것으로 평가했다. ‘잘한 게 60%, 잘못한 게 40%’라는 평가였다. 마오의 사상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의 지도 사상 중 하나로 당헌에 명기돼 있다.


 


하지만 그리고 그뿐이었다. 1981년 이후 공산당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이외에 당내에 어떠한 공식적인 논의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문혁 30주년이었던 1996년에도 공식행사는 없었으며, 올해도 공산당 차원의 행사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화대혁명에 대해 학자나 민간 차원의 논의는 허용되고 있다. 민간 차원에서는 문혁을 재평가하고 교훈을 되새기자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1980년대 초에는 중국의 문호이자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부주석이던 바진(巴金)이 문혁박물관의 설립을 건의했다. 정협은 1949년 공산당과 공산당의 위성정당인 8개 민주파 정당의 대표와 각 단체, 소수민족, 홍콩·마카오인 등을 묶어 구성한 통일전선 조직이다. 정협은 주로 공산당과 정부의 정책에 대해 자문·건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홍콩 언론에 따르면 올해 3월에도 정협위원인 작가 양쾅만(楊匡滿) 등 48명이 “정칟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서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준 문혁의 교훈을 되새겨 다시는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말자는 뜻에서 문혁박물관을 건립하자”는 건의를 정협에 제출했다. 이 건의안에는 문혁 당시 홍위병의 수모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대문호 라오서(老舍)의 아들 수이(舒乙) 등이 서명했다. 이밖에도 작년 초 중국 광둥성 산터우(汕頭)시에는 한 민간인이 연면적 570㎡의 3층 건물에 세운 최초의 민간 문혁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바진의 고향인 쓰촨성에서는 성 정협위원인 판촨(樊建川)이 문혁박물관 건립을 최초로 제안한 바진을 기리기 위해 30만점에 이르는 문혁 시기의 각종 물품을 모아 ‘문혁예술품진열관’을 열었다.


 


자유주의와 개혁파 지식인들은 문혁을 재평가하고 교훈을 되새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문혁 이전인 대약진 시기의 문제까지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콩의 명보(明報)에 따르면 마오쩌둥의 비서를 지낸 개혁파 리루이(李銳) 전 공산당 중앙조직부 부부장이 최근 “문혁 40주년 기념일이 다가옴에 따라 당은 당시 재난에 대한 전면 총결산을 진행, 당이 직면한 이론·실천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민주제도 측면에서 여전히 미흡하고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는 등 현재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문혁 재검토를 통해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1990년대 이후 중국 신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선 문혁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하는 새로운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문혁이 자본주의 잔재를 청소한 것은 아주 잘한 일로 현재 중국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2의 문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 4인방 중 한 명인 야오원위안의 재판 장면.문혁과 관련된 자료 공개에 균형을 잃었다는 지적도 있다. 문혁에 관련된 자료를 인터넷상에서 모아놓는 문혁 박물관 사이트는 “문혁 이후에 주자파(走資派)나 지식인에 관련된 자료는 쉽게 수집할 수 있었지만, 문혁파(文革派)나 린뱌오 잔당이나 홍위병 내부의 문건에 대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다”고 밝히고 있다. 문혁박물관 사이트는 1996년 ‘화하문적(夏文摘)’이란 잡지 편집부가 개설했다. 실제 야오원위안이 1996년 석방된 후 상하이에 칩거하면서 썼다는 42만자 분량의 문혁 회고록 등은 공산당에서 공개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 ‘문화대혁명 40년을 맞이하는 중국의 고민’이란 글에서 “문혁 시기 중국을 휩쓸었던 정치적 광기와 중국인이 겪었던 고통을 고려하면 중국의 소극적 태도는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며 “하지만 중국 사회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문혁은 외면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1970년대 한국에서 중국의 문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이영희 전 한양대 교수는 작년 3월 구술한 ‘대화’란 책에서 “극히 제한된 정보와 자료 속에서 문화혁명의 와중에 그것을 보고 쓰고 할 때는 진실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 어려웠다”며 “이른바 홍위병의 반문화적 파괴 행위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부정적 사실은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며 일부 사실 전달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문혁에 대해 이 전 교수가 지녔던 긍정적인 시각은 “중공의 문화대혁명을 남한 사회의 독자에게 전할 때 자본주의 사회의 병든 생활양식과 존재양식에 대해서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옹호했다. 자본주의적 제도의 물질주의에 대한 정신주의와 도덕적 인간 행위의 숭상, 지식인 계급의 독점적 권위와 지배적 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하방(下放)제도 등에서 한국에 유효한 메시지를 뽑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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