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변법사상과 혁명사상<2>

이양자 |2006.12.07 15:48
조회 34 |추천 0

     


 

 

 

               [변법사상과 혁명사상]

 

Ⅲ. 改革과 革命

  1. 혁명사상의 발생과 전개

    (1) 두가지의 길

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인 특히 지식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중국근대사에 있어서 아편전쟁에 필적하는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특히 중국인에게 주었던 심리적 영향은 오히려 아편전쟁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였다.1) 청일전쟁 자체가 중국의 조선에 대한 옛부터의 종주권을「근대적」불평등조약체제로 보완해 보려는 소제국주의적 시도였는데, 그것에 실패함으로써, 중국 자체가 제국주의적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는 좌절감, 위기감이 그들 선진 지식인들을 강타하였던 것이다. 전쟁에서 진 상대국이 소국이라고 우습게 알아 왔던 일본이었기에 그 위기감은 더 뚜렷하게 인식되엇다. 청일전쟁에 패함으로써 소제국주의로의 길이 막힌 것만이 아니라 열강에게 중국 땅이 분할 점유당함으로써, 중국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아주 멸망해 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도 하였으니 전쟁에 진 결과 일본에게 대만과 澎湖列島를 쪼개어 주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중국의 분할에 촉매작용을 할 터였기 때문이다.2)

戰後 이를 계기로 빚어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격화를 배경으로 중국에서는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두 가지의 정치운동이 시작되었다.

하나는 上書를 반복함으로써 황제와 직접 결합함과 아울러 계몽활동을 통해 관료․지식인들을 움직여 황제의 이름으로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는 운동이다. 즉, 만주 이민족 지배의 존속을 전제로 하면서, 위로부터 사회체제에 대한 개혁을 행하려는 改良主義的 운동이었다. 또 하나는 중국의 분할위기를 막아야 할 청조가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니, 서방의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근대국가의 건설은 청조지배체제 아래서는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면서, 더 나아가 장애가 되고 있는 만주 이민족지배 그 자체를 먼저 타도하고 그 바탕위에 민주주의에 따르는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혁명운동이었다. 전자의 리더가 되었던 사람이 康有爲였고, 후자의 리더가 孫文이었다. 그리고 이 양자에게 공통되는 점은 밖으로부터 밀려 들어오는 열강의 위협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이 존재했다는 점이다.3)


    (2) 강유위와 손문

두가지 흐름의 변혁을 이꿀었던 지도자 강유위(1858-1927)와 손문(1866-1925)이 모두 廣東省출신이었고, 여덟살의 연령차이는 있다고 해도 거의 동일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초점을 맞추어 두 사람을 배출한 광동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을 그들의 공통요인으로서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상세히 검토해보면 오히려 두 사람의 인간형성 과정에서 여러 조건이 서로 크게 다름을 깨달을 수 있다.

같은 광동성 출신이라고 해도 강유위는 南海縣에서 태어났으며 손문은 香山縣4)에서 태어났다. 또한 康․孫의 여덟살이란 연령차이는 청일전쟁의 발발시점에서 볼 경우 다른 의미를 가질 지도 모른다. 이 때 강유위는 30대인 37세, 손문은 20대인 29세였다.

한편 그들이 자랐던 가정환경, 교육, 사제, 우인관계 등의 차이 역시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들을 검토해 보는 이유는 똑같이 청일전쟁의 패배에 큰 충격을 받고, 민족적 위기를 통감하여 함께 구국의 정열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왜 한 사람은 체제내적 개혁의 길을 걸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체제에 반역하는 혁명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에 하나의 해답을 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5)

강유위는 1858년 광동성 광주부 남해현 銀塘鄕의 地主, 讀書人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58년이라면 몇 년전부터 태평천국의 지도자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는 등의 이유로 이미 태평천국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던 시기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애로우호전쟁, 1856-60)에 패배한 결과, 중국은 열강과 천진조약을 체결하였던 해이기도 하다.

그의 일족 중에서는 태평천국의 진압에 공적을 세운 사람이 나왔다. 예컨대 조부의 종형 康國器는 그 공으로 廣西布政司까지 나아갔고 한때 廣西巡撫 대리로 근무하는 등, 그의 일족은 점차 명족으로서의 지위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를 위한 학문, 특히 八股文이 성격에 맞지 않아, 오로지 群書를 닥치는 대로 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때문인지 몇번이나 童試에 낙방하였다. 1876년 鄕試에 응시하여 실패한 후 동향의 석학이며 조부의 친구이기도 했던 朱次琦의 문하에 들어가 약 3년간 친히 그의 가르침을 받고 깊은 감화를 받았다. 특히 주차기의「漢宋兼採의 학문」- 강유위의 말에 따르면 ‘한송의 門戶’를 소거하고 공자를 祖宗으로 삼는다는 학풍 - 은 과거를 통해 봉건교육의 중심에 위치했던 주자학의 속박에서 그를 해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강유위가 孔敎를 제창하는 데에는 朱次琦의 학풍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강유위는 자라면서 이처럼 과거를 위한 공부를 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 자신이 아무리 화석화한 과거체제를 비판했다고 해도 결국 최후까지 그 코스를 밟지 않으면 안되었다. 변혁의 논리도 또한《신학위경고》,《공자개제고》를 완성함으로써 유학의 비판 전개 속에서 이룩된다. 변법론의 근본에 공자가 놓여져 있고 공자의 국교화를 주장하였다.

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상서를 통해 황제와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황제를 움직이므로써 개혁의 실현을 꾀했다. 그가 의지했던 사람들은 자신도 그 일원의 한사람이었던 일단의 지식인․관료뿐이었다. 더구나 대전제로서 만주 이민족지배와 관료지식인에 의한 지배라는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용인하고 있었다. 아무리 변법론의 구체적 정책이 당시에 있어서 ‘혁명적’이었다고 해도 거시적으로는 전통적인 체제의 틀을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고, 체제내적 개량주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문에게는 강유위를 둘러싼 것과 같은 전통의 중압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해도 좋다. 무엇보다도 그는, 극히 교묘하게 유능한 지식인을 체제의 틀에 끼어 맞추어 버리는 과거제도의 틀로부터 완전히 자유였다.

손문은 1866년 광동성 향산현 翠亨村에서 태어났다. 백여호로 이루어진 취형촌은 산을 배경으로하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그만 촌락이었다. 풍요한 토지라고는 할 수 없었고 촌민의 대부분이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든가 행상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에 안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향리를 떠났다. 그의 숙부들와 큰형도 이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손문의 생가에 대해서 그의 부인인 宋慶齡은 “孫中山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바로 그가 몸소 구중국의 비참한 농촌생활을 체험했던 바, 그것이 그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했다”6)라고 말하였다.

손문은 7세때 私塾에 들어가《三千經》,《千字文》 등을 배웠고 10세때에 鄕塾에 들어가 四書五經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학습에는 열심이어서 일념으로 면학에 임했다. 또한 태평천국 진압후 10여년, 그의 주변에는 이 동란에 참가했던 ‘老兵’들이 많았다. 그들로부터 들은 洪秀全이나 楊秀淸에 대한 이야기는 소년의 피를 끓어 오르게 했다. 과거를 위한 면학을 게을리 한다고 해서 질책받던 강유위, 그리고 일족중에서 태평천국 토벌에 공을 세운 인물이 배출되었던 강유위와는 바로 대조적이었다.

청불전쟁의 패배는 강유위와 마찬가지로 손문의 사상형성에 중대한 전기가 되었다. 예컨대 “중불전쟁에 패했던 해, 나는 청조를 타도하고 민국을 창건하고자 결의했다.”라고《自傳》에서 그가 말할 정도였다.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제까지의 현상에 대한 막연한 불만에서 국가 혹은 민국의 운명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이르게 되는, 보다 큰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1879년 손문은 하와이에서 성공한 큰형 손미를 따라 하와이로 건너가 이오라니 스쿨(Iolani School)에 입학하였다. 3년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듬해 1883년 당시 하와이의 최고학부인 오아후 칼리지(Oahu College)에 진학했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적인 생활태도를 고수하고 있던 큰형이 동생의 기독교에로의 접근을 경계하여 학비지불을 중단하는 바람에 손문은 학업 도중에 귀국해야만 했다.

1886년(광서 12) 손문은 의사가 되려는 뜻을 품고 광주의 博濟醫院 부설 의과학교에 들어갔다. 다음해 1월 홍콩에 신설된 西醫書院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손문은 의학생으로서 면학에 열중하는 한편 국사도 논했다. 그의 주위에는 이미 소수이지만 뜻을 같이하는 우수한 인재가 모이고 있었다. 박제의원의 동창이었던 鄭士良(?-1901)은 反滿的 비밀결사인 三合會의 수령이기도 했다. 孫文, 尤列, 楊鶴齡, 陳少白은 자주 양학령의 부친이 경영하는 楊耀記商號에 모여 청조의 부패무능을 통박하고 구국책을 서로 토의했다.

1892년(광서 18), 서의서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손문은 마카오에서 中西藥局을 개업했고 이듬해에는 광주로 옮겨 東西藥局을 열었다. 이때부터 손문에게 의사로서의 생활은 하나의 수단이 되었고 정치변혁을 위한 실천활동이 중심적 행동이 되었다. 중국인 개개인의 육체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를 지망했던 손문이 보다 큰 입장인 국가․민족의 구제를 위한 정치적 실천자로서의 입장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는 국민의 고통은 좋지 않은 정치가 원인이므로 만약 나라를 구하고 사람을 구하자면 열악한 정부를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여 혁명사상이 늘 마음속에서 분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손문은 혁명론에 기울어지면서도 한편으로 위로부터의 점진적 정치개혁에 의한 구국이라는 개량주의적 방향과도 완전히 결별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일종의 혼미는 1894년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인 이홍장에게 상서를 올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상서의 내용은 부강의 근본은 단순히 군사면의 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재의 등용 및 농․공․광․상업의 진흥에 의해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양무운동에 대한 비판이며, 역시 청일전쟁패배 이후 큰 흐름이 되었던 변법론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손문의 상서에 이홍장은 결국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손문으로 하여금 혁명운동의 실천을 결심하게하여 이윽고 흥중회를 결성하고 이어서 광주에서 제1차 무장봉기를 진행시키게 된다.

손문에게 있어서 이홍장은 개량주의 시도에 접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였다. 전통적 지식인, 이른바 사대부 계층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홍장을 뛰어넘어 황제와 직접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했다. 이 시점에서 손문이 개량주의적 정치개혁에 기대했던 것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유위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 사대부의 세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기성의 권력이 훨씬 가까이 있다고 의식했고 또 의지했던 것도 소수의 관료․지식인 이외에는 없었다. 康이 온갖 방해를 받으면서도 황제권과의 직결을 노리고 계속 상소를 올렸던 것, 계몽운동에 의한 관료․지식인의 각성에 전력을 기울였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康에게 있어서 일반민중은 구제해야 할 대상이기는 해도 그들에 의거해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신뢰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문은 새로운 타입의 지식인이었다. 당시의 통념으로 볼 때 독서인이라는 규격에서 벗어난 이단적 지식인이었다. 전통적 학문을 받았던 독서인이 볼 때, 그가 받은 학문조차도 학문으로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無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강유위에 비하여 훨씬 용이하게 자유로운 입장에 설 수 있게 하였다.7)

  

    (3) 혁명론의 대두

1895년 10월 손문 주도의 광주폭동계획이 좌절되고, 1898년 강유위 주도의 무술변법 역시 실패로 끝나자 이 두 개혁과 혁명운동 세력은 190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거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즉  개혁 운동가들에게도 혁명을 통한 정권 장악이 개혁보다 더 절실하다는 논리가 작용하게 되어 1900년 의화단난을 계기로 양자강 일대의 비밀결사인 哥老會조직을 동원한 自立軍暴動計劃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처음부터 청조타도를 표방했던 혁명운동가들도 의화단난이라는 대혼란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고, 광동성의 惠州에서 비밀결사(會黨) 성원을 동원하여 무장반란을 일으켜 大秦國을 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강유위와 양계초가 호남성 출신 개혁운동가인 당재상에게 재정 지원을하여 수립된 자립군 폭동계획은 청조 지배의 합법성, 정통성을 부인하여 새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으로 이를 통하여 개혁에서 혁명으로의 미묘한 이행을 볼 수 있다. 이후 손문 중심의 혁명운동이 점차 활발해지자 강유위, 양계초들은 그것에 대항하여 체제내의 입헌운동으로 노선을 다시 수정해 나갔으나, 1900년의 시점에서 자립군거사가 계획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자립군폭동계획이건 대진국 수립 폭동계획이건 간에 그것들이 의화단난으로 청 왕조의 약체성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한 청조 타도 운동의 시작이었다는 데는 같았으니 1900년은 분명 하나의 역사적 전기였던 것이다.8)

1901년부터는 지식인들을 대상으로하여 이론적으로 청조(만주족 왕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일본으로 망명한 개혁운동 지도자 양계초는 1898년 말에 발행하기 시작한잡지《淸議報》에서 현 집권세력(서태후 일파)을 僞政府라고 공격하였고,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했으나 독자들을 청조타도의 당위성, 공화정권의 이론적 정당성을 깨닫도록 유도하는 글을 1901년까지 연속 발표하였다.

1901년 5월 아직 그리 수가 많지 않던 일본유학생들에 의해《國民報》라는 잡지가 만들어졌고, 1902년에는 支那亡國二百四十二年紀念會를 여는 등 하였으나 이런 주장은 아직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과격한 혁명 주장이 뿌리내릴 토양은 준비되어 가고 있었으니 한 예로 1902년 8월에 상해의 南洋公學의 학생들이 조직한 演說部에서는 “오늘의 나라는 꼭 사랑해야 할 것이 아니고 장차의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혁명주장을 수용한 주장이 나오기에 이르고 있고, “공화야말로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고 공화는 道이다”라고 하는 황제체제를 부인하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진보적인 청소년들로 하여금 관념적인 전제 반대론이나 공화체제 동경을 구체적으로 눈앞에 있는 권력체제(청조)의 타도 즉 혁명주장으로 전환시키는 데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이 의화단난의 진압을 구실로 만주(東北) 일대에 병력을 주둔시켜 온 러시아에 대한 저항운동(拒俄)이었다. 1903년 4월 28일 일본의 한 신문인《東京時事新報》는 호외를 돌려 러시아가 만주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기로 했다고 보도하였다. 이에 대한 중국인의 반응은 민감하였다. 일본에 유학가 있는 500여명의 학생들이 4월 29일에 전유학생대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의용대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며칠 뒤 學生軍을 조직하였고, 5월에는 軍國民敎育會로 이름을 바꾸어 조직을 확대해 간 학생들은 그들의 조직을 겉으로는 청조 정부의 통제하에 두겠다고 하였지만 청조 정부는 이들 학생의 정치적 입장이 혁명 지향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기실 정확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러시아의 침략은 그것을 막아야할 책임이 있는 청 왕조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거나 굴종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았으니 러시아에 대한 저항의「현실적」이고「실천적인」방법은 곧 청 왕조에의 저항으로 귀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에 저항하기 위한 학생군의 일원이었던 陳天華가 혁명사상의 성전이라고 불린《警世鍾》을 일본에서 쓴 것도 1903년이었는데 그 안에서 러시아의 병력 철수 거부를 중국 분할의 현실화라고 경고한 뒤 “만약 청조가 정치를 혁신하여 열강과 한판 싸움을 할 결의를 한다면 혁명 주장을 포기하여 정부와 더불어 열강에 대항하겠다”고 까지 하고 있다.9)

진천화의 민주혁명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나라 정부의 新政은 인민을 기만하는 정치적 술책이라 하고 강유위와 양계초 등은 청나라 정부의 신정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 기대하지만 청 정부는 목전의 이권을 유지하자는 것이며 참된 변법은 결코 실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둘째, 중국인민에게 민주적 자치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논증하였다. 강유위와 양계초가 당시 民智가 未開한 까닭에 민주정치를 실행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陳은 반박하여 民智가 未開하다는 구실은 전제군주제도를 주장하는 자들의 구실이며, 이는 중국민족을 영원히 소, 말처럼 노예로 삼고자 하는 것이라고하여 반대하였다.

셋째, 혁명은 민주공화를 실현하는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하였다. “세계의 각국이…웅비하여 지금과 같이 된 까닭은 진화로써 된 것이며, 옛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다. 혁명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10)고 하고 “중국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오직 民權을 흥기하고 民主로 개혁할 뿐이다. …최초의 수단은 혁명이다”11)고하여 민주적 중국의 건설은 혁명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넷째, 유교의 忠君사상은 민주혁명실현에 가장 큰 장애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세계조류는 백성이 주인이며, 관리는 이에 복종하는 것이다. 봉건적인 三綱五倫은 이미 陳腐하여 감당하지 못하며 사회발전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다섯째, 혁명의 성공여부는 中等社會의 영도 여하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혁명이 성공한 까닭은 중등사회가 그 일을 주관한 데 있었고, 중국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까닭은 중등사회가 그 일을 주관하지 못한 데에 있다”12)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중등사회란 中産階層과 지식분자이다.13)


혁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여 이후의 혁명운동의 또다른 성전이 되었던 鄒容의《革命軍》이 간행되어 20여 쇄를 거듭하고, 章炳麟이〈강유위의 주장을 논박하며 혁명을 논함〉을 상해의 租界地區에서 발행되는《蘇報》에 발표하여 혁명사상 전파에 크게 공헌한 것도 1903년이었다.14)

《革命軍》은 청왕조의 부패와 러시아 東侵에 항거하는 국민운동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사실은 반청, 민족민주혁명으로서 자유, 평등, 독립을 요구,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계몽한 것이다.《革命軍》을 분석해보면, 첫째 자유, 평등, 박애와 교육의 목적이「중국인의 중국」을 알게 하는 것이라 하며, 평등과 자유의 중요성과 독립정신을 계몽하여, 民主革命을 주장하였다. 둘째, 혁명은 먼저 노예근성을 버리는 데 있다고 하였는데, 전통적 忠君觀, 孝觀은 봉건적 노예도적이며, 유순․安分․은퇴․복종․벼슬하는 것․부자가 되는 것은 “중국을 노예로 만드는 교과서이다”고 하였다. 셋째, 미국의 혁명독립주의를 배우고 25조의 강령에 의하여 중화공화국의 독립, 자유를 건립하고자 하였다.

25조 강령중, 주요한 것은 만세에 다시 없는 전제군주를 추방하고 민주정권을 확립할 것이며, 전국민은 남녀가 평등하므로 신분의 귀천을 폐지하며, 언론․사상․출판의 자유권리를 확보하며, 납세와 병역의무로써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킬 것이며, 중국혁명을 반대하는 외국침략자와 국내의 반민주세력과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신정부를 세우고, 선거를 통해서 각급 의원을 뽑으며, 反淸愛國思想의 기초위에서 民主革命을 수행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15)


뒤에 혁명운동이 활발하게 된 고장인 江蘇省, 湖北省 출신의 일본유학생이 낸 잡지《江蘇》,《湖北學生界》가 혁명으로 현저히 기울기 시작한 것도 1903년이었다. 이들 잡지는 일본에서의 혁명론자들이 간행한 다른 많은 잡지와 마찬가지로 국내에 다수가 반입되어 혁명론의 확산에 공헌하였다.

국내에서의 본격적인 혁명단체로서 1904년 2월 11월에 湖南省 출신과 浙江省 출신들이 각기 조직한 華興會, 光復會가 비밀리에 혁명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그 조직의 싹은 모두 그 전년의 러시아에 저항하는 운동에서 튼 것이었다. 이 두 단체는 손문 영도하의 흥중회와 더불어 혁명운동의 총집결체로서 1905년 8월에 조직된 중국동맹회의 주요 구성요소가 된다.16)


  2. 개혁파내의 혁명사상

체제내의 제도적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내에서도 개혁보다는 혁명적 이념에 더 가까운 내용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사람이 梁啓超이다. 1898년 개혁운동을 실패로 몰아넣은 원인의 하나가 양계초 등이 湖南의 時務學堂에서 주창한 民權論, 平等論이었다 함은 양계초 스스로의 述懷에서나 近人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 있다.17)

양계초는 戊戌維新前 新聞을 통해 變法自强을 고취시켜 왔으며, 망명 이후에는 오직「革命과 君憲」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찍부터 革命黨과 관계를 가지고 “孫文과 康有爲 사이를 배회하며” 革命黨과 保皇黨의 연합운동에 힘썼으나, 실패로 끝나자 강유위를 옹호하고 손문을 적대시하게 되어, 이후의 그의 정치사상은 극단적인 보수경향으로 기울어져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정변이후 10여년간의 정치사상은 자주 變向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1903년 이후까지 그의 政論은 革命과 君憲의 兩端性을 보이고 있었으나,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주로 군헌사상을 고취하여, 자연히 革命과 君憲의 격렬한 爭論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18)

梁의 정치사상 요인은 種族․政治․社會 등으로 집약 표현할 수 있으며, 이들 사상요인은 혁명당의 民族․民權․民生主義와 합치될 수 있는 점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은 혁명당의 사상이론보다 連貫性과 實行方針․計劃에 있어서의 精密性의 결여를 보이고 있다.

시무학당시기의 그의 종족혁명사상의 성격은 비교적 급진적이었던 요소를 보이고 있고, 그 혁명 방식도 철저한 民智의 개혁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담사동 등과 실제로 반청활동을 전개하면서 諸思想에 우선해서 民權論에 바탕을 두고 淸朝의 失政을 들어 혁명을 주창하였으며, 이같은 반청혁명사상을 고취하여, 한․만민족감정을 자극시킴으로써, 은근히 민족의식을 주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民權共和說을 唱導하여 漢族의 기본권을 회복해 감으로 滿族에 대한 성공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특히 민권공화설은 곧 청조의 전복을 의미하는 종족혁명설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양계초와 담사동은 滿淸을 뒤엎고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성사후에는 담사동을 president로 추대하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양계초는 戊戌新政 참가시기부터 정변으로 유신운동이 실패한 후 2년까지 光緖帝가 훌륭한 황제라는 생각을 잃지 않고 滿洲族과의 융합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0년 자립군 폭동계획이 실패한 후, 청조가 의화단을 縱容하여 국가를 욕되게 하는 참화가 발생되어도 개혁하여 강해지겠다는 결심이 없자, 그는 청조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였다. 이에따라 그는 破壞․革命․排滿을 구호로 부르짖고 淸廷의 專制를 뒤엎고 따로 민주정부를 건립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19)

양계초는《청의보》에서 혁명을 주장하는 논설을 쓰고, 1902년 봄에 강유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내었다.

…민족주의 정신이 없으면 결코 나라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정신을 고취해야 되는데 그러자면 부득불 만주족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주족의 정부에게 희망을 걸 수가 없게 된 지 오래입니다. 서태후가 광서황제에게 정권을 돌려줄 것을 기대한다든지, 광서황제가 실권을 되찾게 된다든지 하는 保皇會의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애타게 기다려봐야 그것들이 실현되겠습니까? …그러니 비록 우리 보황회파가 등용된다 하여도 우리들의 개혁의 뜻을 펼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20)


梁의 정치사상은 곧 民權革命思想이며, 이는 그의 정치이론의 핵심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光緖帝를 추대하여 總統으로 세우려는 建議에서, 滿淸을 전복하고 민권에 바탕을 둔 民政을 수립하는 것이 곧 公義라고 하여 민정을 일으키는 것이 당면한 時勢로 보아 가장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그가 《淸議報》의 논설에서도 “淸議報之特色有數端 ; 一曰倡民權”이라고 한 점만 보더라도 그가 민권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民權興則國立, 民權滅則國亡”이라 하여, 민권이 바로 국가의 존망을 결정짖는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광서29년(1903), 그가 歐洲에서 돌아온 후, 그의 정치사상은 크게 변하여 전에 굳게 믿었던 파괴주의와 排滿革命 즉 종족혁명 주장을 포기하였으나 己亥年에 있었던 황제의 계승자 문제에 있어 西太后가 祖宗之法을 임의로 改修하는 점을 공격하고 淸廷을 합법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따라서 만청정부를「僞政府」라 칭하고〈僞政府立嗣記聞彙記〉․〈僞政府三大政策〉등의 글을 써서 청조를 공격하였다.21)

양계초는《청의보》에서 공화제도, 민권신장 등 혁명주장에 가까운 급진적 주장을 하였으나 그것을 이어 1902년 1월에 간행되어 1905년까지 지속된《新民叢報》에서는 비록《청의보》에서 보인 과격성은 약화되어 근대국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국민으로서의 의식과 자질을 기르는 일이 혁명보다 앞서야 한다는 온건한 체제내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국내에서의 파급영향은 여전히 급진적인 것이었다. 특히, 루소, 벤담 등의 사상을 소개하면서 고취한 민권, 자유, 자치, 진보 등에 대한 선전이 그러하였다.《청의보》보다《신민총보》가 더 영향력이 컸던 것은《청의보》가 간행된 시기와《신민총보》가 간행되던 시기 사이에 상황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신민총보》는 1903년의 러시아에 저항하는 운동 이래 현실비판에 눈 뜨기 시작한 많은 독자 특히 신식학당의 학생 독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신민총보》제3호에 실린〈정부와 인민의 권한을 논함〉에서는 여지껏 폭군과 賊臣이 民을 괴롭힌 것은 民에게 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인민의 평등한 권리야 말로 建國의 근본이며 태평성세의 근본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권리획득에 있어 물론 혁명을 통해 민권을 획득한다고 하지는 않고, 民이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깨달아 自治, 自養할 줄 아는 새로운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만 하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같이 강력한 권리의식이 출판물을 통해 강조될 때 독자는 저절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니 설사 그들이 능동적으로 현실 타파에 나서지는 못한다 할 지라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혁명을 성공시키는 주된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22)

한편 개혁의 시대와 혁명의 시대라고 하는 두 시대에 걸쳐 활동을 했던 章炳麟은 유신개혁에 동의하여 같이 참여하다가 결국 혁명론으로 傾倒하게 된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그는 변법파의 일련의 개혁시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康․梁 등이 조직한 學會에 가입했고 또한 이들이 창건한 잡지에 개혁의 政論을 발표하는 등을 통해 참여함으로써 정변후 대만․일본에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개혁론자들의 孔子敎運動과 君主立憲運動에 대해 1900년 의화단난 시기까지는 思考의 脈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강의 침공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의 굴욕외교를 목도한 章으로서는 이전의 개혁을 통한 富國自强運動에서 列强帝國主義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排滿革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章은 만주족이 지배하는 淸國의 개혁에 더 이상의 기대를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898년의 정변 이후 1905년 同盟會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개혁논의와 혁명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개혁파에 몸을 담았던 장병린은 차츰 혁명으로의 전환을 보였고〈강유위의 주장을 반박하여 혁명을 논함〉을 지어 추용의《혁명군》과 함께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종족혁명론과 함께 Anarchism에 동조하여 혁명이론을 굳히게 되었다.

章은 유신개혁에 동의하여 같이 참여하면서도 孔敎를 부정하고 保皇의 이론을 부정하게 되고 급기야는 개혁론자들까지도 부정하며 혁명에 가담하고 있다. 章이 革命으로 전변한 원인은 그가 康․梁의 개혁론이 시대적 환경의 변화속에서 보수화되어 감을 포착하여 이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康․梁의 개혁론은 무술변법 이전까지는 ‘改革’을 하기 위한 ‘孔敎’의 주장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정변이후에는 ‘改革’을 위한 ‘保皇’의 논리가 그 핵심으로 자리바꿈되었다. 또한 唐才常의 자립군기의 실패 이후에는 ‘保皇’의 논리에 ‘孔敎’의 忠의 논리가 합세하여 혁명에 반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孔敎’를 부정하고 ‘保皇’을 부정하면서 章은 排滿革命論에 귀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康有爲一派의 ‘孔子紀年’에 대립되는 명칭으로 章은 ‘共和紀年’ 또는 ‘支那亡國紀年’을 사용했던 것으로, 그들과의 대항의식은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23)


  3. 혁명사상의 정립 -改革派와 革命派의 思想論戰-

신해혁명 준비시기에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중국혁명민주파(혁명파)와 강유위, 양계초를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개량파(개혁파)는 첨예한 투쟁을 진행하였다. 더욱이 1905년 동맹회 성립후, 일본 동경에서 그들의 기관간행물《民報》가 동년 11월에 출판되어《民報》와《新民叢報》간의 사상논전이 출현하였는데 이는 중국근대사상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이와같은 논전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구민주주의 시기 자산계급혁명파와 개혁파간의 상이한 정치노선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1902년 봄 양계초는 일본 橫濱에서《新民叢報》를 창간하였다. 그것이 비록 ‘공평한 논조로 하나의 당파에 치우치지 않음’을 표방하였으나, 사실상 그것은 개량을 선전하고 혁명을 반대하는 간행물이었다. 같은 해 6월 강유위는〈與南北美洲諸華商書〉를 발표하여 保皇을 극력히 고취하고 혁명을 반대하였다. 강유위의 영향 아래 保皇黨員들은〈革命駁議〉를 제출하여, “오늘날 중국은 반드시 혁명을 말할 수 없다. 한 번 혁명을 말하면 반드시 내란이 일어난다. 한 번 내란이 일어나면 외국세력이 기회를 틈타서 침입한다. …따라서 중국땅은 멸망하게 된다”라고 성토하여 사람들이 혁명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혁명파의 선전가들은 개혁파의 도전에 회답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03년 장병린은〈駁康有爲論革命書〉를 작성하여 강유위의 誤論들을 반박하고 민주혁명의 필연성, 필요성과 가능성을 진술하여, 중국은 반드시 혁명이 진행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 혁명간행물도 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예를 들면《浙江湖》에 발표된 문장은 양계초의 “新民說”을 비평하였으며,《蘇報》에〈駁革命駁議〉를 발표하여 무술변법이 “좋은 거울이며” 군주입헌은 실행할 수 없고 혁명만이 구국의 유일한 길이라고 지적하였다. 즉 그들은 혁명구국론으로 개혁파의 혁명구망론을 반대하였던 것이다.24)

《民報》는 혁명파와 개혁파 논전의 주요진지였다. 동맹회의 기관지로서《민보》가 창간되면서 혁명을 해야 한다는 선전뿐 아니라 청 왕조를 타도하고 나서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제기하는 등 이론적 깊이를 더해 갔다. 동맹회의 총리 손문은 발간사와 동경유학생 환영회상의 연설중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뒷날 三民主義로 불리는 혁명 강령의 골자인 民族, 民權, 民生의 三大主義를 제시하였다.25)《민보》제1호 첫머리의 도판에는 세계 제일의 민족주의 큰 위인이라하여 黃帝, 루소, 워싱턴, 墨子 네 사람의 초상을 실었는데 이는 만주족 타도를 표방한 민족주의적 혁명(黃帝), 민권 신장(루소), 공화정체(워싱턴)를 표방하는 민권주의적 혁명을, 그리고 평등사회를 지향(묵자)하는 민생주의를 나타낸 것이다.26)

양계초가 주편한《新民叢報》는 개혁파의 주요 대변지였다.《民報》가 간행된 후, 계속해서 혁명을 반대하고 개량을 고취하는 문장이 발표되었고, 아울러〈中國存亡一大問題〉가 합간되어《民報》의 혁명선전을 집중공격하였다. 1906년 4월《民報》는「《민보》와《신민총보》변박의 강령」을 발표하여《신민총보》와의 논전을 고조시켰다.27)

《민보》는 혁명이론의 확산을 위해, 그리고 해외지지 기반의 확충을 위해 체제내 개혁론(입헌군주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방법을 썼다. 《민보》제1호의〈민족의 국가〉,〈중국은 민주정체로 고쳐야 한다〉,〈중국혁명사론〉등에서, 당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던《신민총보》의 주장 즉 양계초의 개혁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양계초는 1906년 1월에서 3월에 걸쳐《신민총보》(제73-75, 77호)에〈開明專制論〉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하여 반격에 나섬으로써 혁명의 가부뿐만 아니라 열강의 간섭 위험, 장차의 경제체제문제에 걸친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일대 논전이 전개되었다.《민보》는 汪精衛, 胡漢民, 朱執信 등 여러 사람이 합세하여 제18호에 이르기까지(제26호로 종간), 거의 매호마다《신민총보》를 공격하는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