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날 - '자꾸 작아지는' ㅇ 아저씨 | 양지마을 이야기
2006/12/08 01:03
http://wnetwork.hani.co.kr/anonymo/4163여섯 번째날
아침 일찍 옆의 옆집을 찾았습니다. 주변의 모든 집 항이 항상 인기척이 없는 것에 비해, 활기가 있는 집입니다. 노부부가 벌써부터 바빠 보입니다. 오늘이 김장날이랍니다. 이런저런 말씀을 붙이니까, 마을 얘기라면 반장님한테 먼저 얘기를 듣는 게 좋을 거랍니다. 바쁘신 듯 합니다. 골목 초입에 있는 구멍가게로 갔습니다. 반장님이 계신 곳. 이웃 할아버지께서 약간 미안하셨는지, 구멍가게까지 와서 저를 반장님한테 소개합니다. “쩌기 옆의 옆집에 새로온 총각”이라고요. 어리둥절해하는 반장 아주머니한테 이실직고합니다. 기자라고. “글쎄, 내가 해줄 얘기가 있을까?” 양승희(60)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많았습니다.
40년전 이 동네에 온 아주머니는 이 동네의 산 역사였습니다. 물론 아주머니는 철거민으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약간 예외적인 케이스였죠. “있다보니” 40년을 계셨답니다. 많은 철거민들이 등떠밀려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버려져서 이 땅으로 왔을 때, 아주머니께서는 자발적으로 이 땅을 찾은 흔치 않은 분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바깥 양반”은 이 곳에서 오래 부동산을 하셨고, 구청 직원들과 ‘분필작업’도 함께 하셨답니다. 분필 작업이란, 떠밀려서 이 땅에 온 철거민들에게 8평씩 살 땅의 구획을 지어주는 일입니다.
아주머니가 처음 왔을 때는 이 터를 한창 다듬을 때였습니다. 원래 이 쪽 터는 공동묘지였다고 합니다. 아주머니가 오실 때만 해도 묘지들을 밀어내고, 철거민들을 위한 터를 닦는 작업이 마을 한켠에서 진행중이었답니다. 그래서 어떤 철거민들은 그 이후에도 땅을 파다보면 실제로 사람 해골이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 아주머니는 이 쪽 터가 ‘바람이 세다’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기업은행 뒤쪽으로는 한 때 ‘은퇴’한 내시들이 모여살던 터였다고 합니다. 양지마을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60년대에 도착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랍니다. 햇볕이 잘 들어서랍니다. 69년 경에는 양지마을 한쪽 끝 수락산 밑자락에 약 100명의 나병환자들도 모여들었답니다. 당시 산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에 빨래를 하던 사람들도 그동안은 (나병 환자들이 병을 옮길 거라고 짐작하고) 그 물을 쓰지 않았답니다. 나병환자들은 70년대 초중반에 모두 소록도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66년 이후로 전국 각지의 철거민들도 몰려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사동에서, 어떤 이들은 연희동에서, 또 동대문에서, 청계천 일대에서 차례차례 왔습니다. 그렇게 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땅을 파서 그 위에 거적을 깔고 살고, 낮에는 정부가 도로 뚫는 일을 하는 것을 돕고, 밀가루 한포대씩 받아와서 끼니를 때웠답니다. 밀가루에 익숙해진 이들은 어쩌다 쌀을 먹을 일이 생기면 “왜 그런지 모르게” 속이 탈이 났답니다. 그리고 조금씩 번 돈으로 사람들이 ‘브로끄’를 사고 ‘세멘’을 사서 조금씩 집의 모양이 생겼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터에도, 40년 전 누군가가 눈물을 뿌리면서 맨 바닥에서 집을 쌓아올렸겠죠.
처음에 삶이 팍팍할 때는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주먹다짐도 많이 했답니다. 삶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함 속에서 사람들은 극도로 예민해졌겠죠. 그러다 삶의 초석이 조금씩 깔리면서, 마을은 점차 평화를 찾았답니다. 누군가 펌프를 써서 우물을 뚫으면, 아낙과 아이들이 모여들어서 공동 우물이 되고, 곧 누군가 굶주리면 찬밥이라도, 고구마라도 나눠먹었답니다. “꼭 시골같은” 정경이 다시 펼쳐졌답니다.
또 남자들은 수락산에서 나무를 해서 땔감을 했답니다. 물론 산림계에서 걸리면 혹독한 벌금을 물었지만, 새벽에 야밤에 사람들은 꾸역꾸역 산으로 올라갔답니다. 조금 살만해지면서, 사람들은 옆의 조그만 빈터라고 있으면 벽돌이어서 집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지 없이 구청에서 사람들이 와서 ‘철거’를 했답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다가, 이네 마을 사람 중에 몇몇이 누군가 집을 넓히면 구청에 신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답니다. 그 ‘밀고자’ 몇몇은 실제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야산으로 끌려가서 ‘매운 맛’을 보기도 했답니다. 그 사람들이 왜 ‘밀고’를 했는지는, 아주머니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아주머니 댁에 기름 보일러를 놓은 것은 91년도의 일이랍니다. 마을에서도 거의 첫 번째로 놓았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한둘, 기름 보일러를 놓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슬프고도 재밌는 건, 지난달에 아주머니는 연탄 보일러를 다시 놨답니다. 기름값이 너무 비싸서죠. 무려 설치비까지 모두 합해서 45만원이 들었답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그 비용이 엄두가 안나서 ‘비싼’ 기름 보일러를 여전히 쓰고 있답니다. 그러니, 어지간히 춥지 않으면 보일러를 안 쓰는 거죠.
아주머니는 2남 1녀를 모두 시집 장가 보냈습니다. 결혼한 아이들에게 손 벌리지 않을 요량으로 10여년전부터 구멍가게를 하십니다. 그럭저럭 용돈벌이는 된답니다. 솔직히, 없는 게 많긴 합니다. 그래도, 있는 것도 많은 가게입니다. 있는 게 무엇인지 굳이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양아주머니를 따라서 다시 옆의 옆집으로 갑니다. 김장을 돕는다고 마을 아주머니 두 분도 와 계십니다. 집주인인 아주머니(이 아주머니, 끝까지 존함 안 가르쳐주십니다)가 박카스 한 알과 진홍색의 캡슐형 알약을 주십니다. 뭐냐고 여쭤봤다니, “콩”이라고 짧게 답하십니다. 영양제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김장 준비를 하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옛날 얘기가 나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휘경동 철거촌에서 살다가, 중계동으로, 그리고 이 곳으로 살다오셨습니다. 짧게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재구성합니다.
“휘경동에서 야산 살다가, 수락산 보니까 너무 좋더라”
“그 와중에 산 좋은 게 보였어?”
“그러게, 그 때 도랑물이 너무 더러웠어”
“이 곳 (상계동)에 오니까, 물은 그래도 깨끗했어”
“중계동에 있을 때는 벌판에 심어놓은 배추와 무를 먹었어. 배추를 국 끓이고, 무를 가져다가 두껍게 썰고, 꾸덕꾸덕 말린 다음에 청국장에 풀어 먹었어”
“처음 온 사람들 (철거민) 들은 길 뚫는 거 도와주고, 밀가루 반포씩 탔지”
“그 때 여기는 경기도 노회면이었는데, 철거민들 관할은 성북구청에서 와서 했어”
“그 때 석유가 없으면, 애들을 업고 고개를 넘어서 석유를 사러 갔지”
“밤에다 산을 깎는다고 소리가 아주 컸어”
“그 때는 진흙 바닥이라고, 모두가 장화를 신고 다녔지. 당고개 넘는데도 장화를 신고 다녔고”
“국회의원들이 한번씩 오면 그래도 길이 하나씩 닦였지”
“비만 오면 지금 상계중학교 쪽 개울에 다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서로를 잡고 건넜어”
“한번은 한 사람이 처제를 잡고 건너다가 놓쳐서 그만 그 처제가 휩쓸려가서 죽고 말았어”
“비만 오면 여자들을 업어주고, 돈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어”
“이 동네를 처음 오면서 울면서 들어왔지”
“그 때는 시영차라는 게 있었는데, 시청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는데, 사람들도 미어터졌지. 그 때는 기운 센 사람만 탄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꽉 차면 버스가 그냥 지나치니까. 사람들이 버스 앞에 벌렁 눕기도 했어. 버스가 서면 거기에 매달렸지. 그럴 때는 아가씨고 뭐고도 없이 부끄러운 줄도 매달렸지”
얘기를 주고 받는 아주머니들의 톤은 참 다양했습니다. 앙금진 한과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자부심, 그리고 그 속에 깃들인 강인함이 일상적이고 가벼운 일상적인 수다의 형식에 묘하게 묻어났습니다. 그 말에 듣는 동안, 묘한 감동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나눔의 집에 가서, 저녁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혜화역에서 잡힌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에 다시 상계로 올라왔습니다.
저녁 9시에 잡힌, 중학생들과의 만남은, 이 놈들이 다 ‘땡땡이’ 치는 바람에 무산되었습니다. 오늘 이리 저리 맛있는 거 먹는 자리가 많은 모양이라고 나눔의 집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9시까지 기다려서, ㅇ씨(44)와 만났습니다. 중산층에 머물다가 빈곤의 나락에 떨어진 소위 ‘신빈곤층’의 한 사례로 추천받은 분이었습니다. 9시에 당고개역에서 뵜습니다. 근처 조용한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검은색 파카 속에 회색 반팔티, 검은색 면바지를 입고 온 ㅇ 씨는 약간 창백한 얼굴에 인상이 점잖았습니다. 말소리도 조곤조곤 낮게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63년 생인 ㅇ 씨는 고향인 양평에서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다가, 10대 후반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고졸이라고 하시더군요. 약 83년부터 92년까지 10년 동안 수유리의 싱크대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89년에는 결혼도 했습니다. 딸도 그해에 낳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밑에 직원도 8명 꾸리면서, 싱크대의 생산과 설치를 도맡아 했습니다. 수입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한달에 수입이 적게는 90만원 많게는 130만원 정도였습니다. 적금도 꼬박꼬박 부었습니다. 92년에는 1200만원 자본금으로 삼양동에 싱크대 가게를 열었습니다. 밑지지는 않던 장사는 93년도 부동산 실명제가 발표되면서, 건설경기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자,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결정타는 구제금융이었습니다. 본전까지 고스란히 다 까먹었습니다. 아이들 둘을 남겨둔 채 부인도 집을 떠났습니다. 그 다음부터 싱크대 공장을 전전하면서 일을 했습니다만, 번번이 일이 어그러졌습니다. 2000년도에는 급기야 이곳 양지마을로 들어왔습니다. 5평짜리 방 하나를 구해서 아이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래도 재기를 하겠다고,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2002년 12월에 직원 세명인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 전신화상을 입었습니다. 몇도인지는 기억을 못합니다만, 4개월간 병원에서 입원했습니다. 영세업체라서 산재혜택도 변변히 못받았습니다. 소주만 먹고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얼마전부터 그나마 정신 차리고 일을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노가다’ 일을 해준 임금 250만원을 지난 추석에 받아서, 그나마 한숨 돌렸다고 합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작아지는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고2인 딸과 초등하교 6학년짜리 아들과 사진 한번 못 찍어본 것이 아쉽습니다.
살아온 얘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정확한 기억력을 상실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결혼한 해 마저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는 얘기의 앞뒤가 안 맞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사업 실패와 부인과의 결별, 그리고 술이 쩌든 폐인 생활 때문인 듯 했습니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은 과거를 무의식적으로 제거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2시반이 넘어서 술집에서 함께 나오던 그는 “서울에는 사람들이 너무 약았다. 시골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