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월달인가? 부대 도서관에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책 두권을 찾아냈다. 그리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기억에 오래 남는 책은, 그 첫만남서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법이다.(나는 그렇다.)
주인공 오현우가 감옥에서 몇십년만에 출소하는 장면을 읽으면서부터 나는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꾹꾹 막혀오기 시작했다. 17여년만의 바깥 나들이. 달라진 세상, 달라진 나. 그리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혁명의 부재. 회환조로 이어지는 소설의 문장은 읽는 내내 나를 하루종일 두 주인공의 기나긴 삶의 이야기에 가두어 두었다.
다 읽고나니, 해가 지고 있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표지를 참참히 손으로 쓸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오랫만에 흘려보는 눈물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따뜻한 가을의 저녁 석양이 왜인지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하는 현우가 보고 있는 해와 같아보였다.
그렇게 재밌게 책을 읽고, 영화도 정말 기대가 많이 됐다. 임상수 감독은 '바람난 가족' 이후부터 그의 꾸준한 작가 정신과 예술적 능력을 믿고 있었다. 이 시니컬하고 공격적인 사람이, 이 오래된 진부하고 통속적이고, 낡은 사랑 이야기를 어떻게 재탄생 시킬 것인지 참 기대가 많이 됐다.
황석영이 진부하고 낡은 주제로 전혀 낮지않고 뛰어난 소설을 써낸 힘은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내러티브 구성 - 연출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 한국과 독일을 넘나들며 복잡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너무나 쉽고 재밌게 읽혔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힘이 컸다.
하지만 두권 분량의 장편 소설이 가지는 크고 복잡한 내러티브 구조를 두시간 남짓한 영화에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자칫 잘못하면 염정아와 지진희(두 배우는 이 영화에서 연기도 훌륭했지만 원작 속 두 주인공과 아주 닮았다!)라는 두 스타 배우를 사용한 지지부진한 멜로영화로 끝나지 않을까?
많은 걱정과 기대를 했고, 오늘 개봉 첫날에 안승학 군을 끌고 영화관을 가서 보았다. 그리고 조금 실망했다.
우선, 복잡하게 애기하지 못 할 원작 속의 '아릿함'이 살아나지 못했다. 그저 그랬고, 감동적이지 않았다. 어디서 실패했을까? 배우들의 캐스팅이나 연기는 나무랄 곳이 없었고... 역시 감독의 연출이 잘못되었을까?
언제나 쿨하고 깔끔한 임상수 감독은 이 영화 역시 쿨하고 깔끔하게 그려냈다. 윤희가 죽어가는 장면도 집어넣지 않았고, 극중에서 분신 자살하는 여후배 까만콩의 분신자살 장면도 적당한 선에서 냉정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현우가 그의 딸 은결이와 만나는 장면도 아주! 쿨하게 처리했다. 생각해보면 진부한 감정의 전달 과정을 싫어한 임상수는 그러한 장면들을 아주 '깔끔하게'다 정리해낸 것 같다.
그래 좋다. 쿨하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쿨해서. 그 쿨함이 고전적인 이 사랑 이야기와 맞지 않더라. 이거다. 원작은 윤희와 현우가 헤어진 17년의 세월을 충분히 독자에게 전달시켰지만, 이 영화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쿨하고 깔끔한 영화의 내러티브가 결국은 이 영화를 재미없고 지루하게, 그리고 그 이야기가 가진 힘도 살리지 못했다.
영화로 다시 만들어 내기 어려운 명작 소설을 꽤 노력해서 자신만의 꿋꿋한 스타일로 다시 만들어 낸 것은 인정하겠지만, 글쎄. 아무리 점수를 좋게 줘도 B 이상은 못주겠다. 평작이다.
소설을 안보셨다면, 이 영화도 좋지만 소설을 꼭 한번 보시는게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