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읽게?
이 글, 서서 읽게?
괜찮은 생각이네. 한 페이지를 읽을 시간, 서점 직원의 눈총도 받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딱 좋은 시간이야. 그래도 좀 앉지그래? 왜 그래, 어이, 집중해. 제발 부탁이야. 당신 잘난 거 알아. 당신이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의 힘만 풀면 책장이 넘어가겠지. 내가 소유한 수백 개의 단어, 수천 개의 음소가 공(空)의 무저갱으로 쏟아져 버릴 거야. 그러니까, 잠시만 참아. 옳지. 그래. 한숨 쉬지 마. 나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으니. 자 등을 곧게 펴고 책을 눈높이로 올려봐.
내가 여기 있어.
다시, 다시 말해봐. 지금 책이 아니라 모니터를 보고 있단 말이지. 난처한 부류인걸. 노 프라블럼!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 자, 이대로는 늦어. 본론으로 들어가자.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들을 그대로 떠올려. 어떤 선입견도 없이 그저 낱말이 지시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거야. 나쁘지 않을 거야. 이건 내 집에 떠도는 냄새에 익숙해지기 위한, 일종의 마취 같은 거야.
1. 회색 구름이 부유하고 있는, 먼지 덮인 저택의 여름 풀장.
2. 2006년 월드컵에 관한 스포츠 뉴스.
3. 무너지는 책장.
4. 어느 후미진 PC방. 심야에 인터넷을 하는 자신의 모습.
5. 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 비에 젖은 나무 냄새.
6. 두꺼운 내복을 입은 아가의 냄새. 젖 냄새.
7. 당신 눈에서 나는 모든 종류의 소리.
8. 다시, 회색 구름이 부유하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의 아이들 웃음소리.
자, 어때? 어떤 것은 추억이겠고 어떤 것은 겪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 되도록 보편적인 것들로 채우고자 했는데 내가 점쟁이가 아니잖아.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토록 무의미한 시간과 단어의 소모를 촉진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기뻐. 여기까지 당신이 떠나지 않았다는 게 기뻐. 난 당신 손가락을 관장하고 있는 뇌에 달려가 엎드려 입맞추고 싶어. 내겐 관계의 부재(不在)가 부채(負債)로서 자리 잡고 있어. 그것이 나를 외롭게 해. 우울증을 동반할 정도는 아냐.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고독의 다른 모습일지도 몰라.
당신, 남루한 생에 어떤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지? 나 역시 그걸 간절히 바라고 있어. 자, 독자와 작자라는 허울은 벗어버리자. 시간이 얼마 없어. 나의 진실은 무한해. 항상 글 쓰는 쪽은 비열한 좌뇌를 굴리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 마. 지금의 나는 가족보다, 신보다 당신에게 진실해.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도대체 그 많은 예술가는 자신의 진실을 왜 그렇게 교묘하고 위대하게 숨겨 놓는 걸까. 만약 카뮈가 디스 플러스를 꼬나 물고 소주와 안줏거리가 가득 든 비닐봉지를 든 채 우리 집 현관 문을 연다면, 퇴색한 삶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으로 변할는지!
그래. 괜찮은 생각이 또 났어. 지금 내 등 뒤에 있는 현관문을 여는 거야. 누군가 서 있을 거야. 날 버린 사람일 수도 있고, 내가 버린 사람일 수도 있어. 어쩌면 문밖에 멀더와 스컬리가 FBI뱃지와 글록23을 들고 신원이 명확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혹시 알아? 저 문을 열면 지금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서 있을지.
맞아. 옳거니! 당신이었군! 아까부터 기척이 있었어. 당신이 그렇게 소심할 줄은 몰랐는걸?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어. 기다려, 내 지금 문 열러 가니…………
(중략)
……정말 놀랐어. 하마터면 놀라서 죽을 뻔 했어. 내가 활자라는 존재로 탈바꿈한 걸 잊고 있었어.
고작 몇 방울의 잉크로 이루어진 존재에 비해 인간이란 건 너무도 광활해. 문 앞에 불타고 있던 당신의 그 홍채라는 건 마치 태양과 같아. 날 믿고 당신은 그렇게 끝까지 나의 시작과 멸망을 지켜보고 있었어. 아직도 눈꺼풀 안쪽에 뜨거운 불그스름이 번지는 느낌이야. 이것이 눈물이라는 거구ㄴㄴㅏ는 ㅇㅣ렇게 노ㄱ아버리는 것인……. 고……………………맙……………………인간 ㅊㅣㄴㄱㅜ…….
06. 5. 16 / 不在하는 그녀에게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제한 시간 내에 단편 소설을 완성해야 하는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다. 삼십 분 남짓 살다가, 결국 내 소설은 이렇게 녹아버렸다. 묵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