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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지구인이면 ok- 4: 라파엘의 첫식사

박가애 |2007.02.13 03:45
조회 8 |추천 0

목까지 차오른 외계인이란 말을 꿀꺽 삼키고, 가은은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원래 이렇게 빨리 낫지 않는데…….”

“당신의 세포에게 말했어요.

가장 건강하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라구요.
당신의 세포들은 건강을 다시 회복할 힘과 권리가 있고
나는 당신이 가장 건강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러길 바란다구요.
그리고 당신의 몸이, 내 말을 이해한 거예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적처럼 멀쩡해진 손가락을 바라보며,
가은은 그의 말을 믿지 않을 도리 또한 없었다.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가은이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가은이에요. 이가은.”

“아, 가은…. 예쁜 이름이에요. 난….”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그가 웃어보였다.

“아…. 당신은 여기 오기 전의 일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죠?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가은은 상처를 입고 함부로 쓰러져 있던 어젯밤의 그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큰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거나…….’

“걱정하지 마세요. 쉬다보면 금방 기억이 날 거에요.
그보다,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가은은 다시 방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은의 작은 감정변화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이다.
더구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낯선 가은의 집에 와 있는 상황이다.
혼란스럽고 두려울 남자에게, 가은은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난 상관없어요. 가은씨가 불러서 즐거운 이름으로 해요.”

그는 또 천사처럼 웃으며 말한다.
이 남자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이렇게 햇살처럼 밝고 크리스털처럼 맑은 사람을.

“음……. 당신을 보았을 때, 나 라파엘의 그림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라파엘은 천사의 이름이기도 해요.
당신은 좀, 뭐랄까? 외국인 같으니까, 그 이름이 괜찮을 것 같아요.”

스스로도 남자와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가은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라파엘!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나는 라파엘이네요? 하하 ”

남자가, 아니 라파엘이 웃었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는,
기뻐하는 가은의 모습이 더 기쁜 듯 보이는 그였다.

‘외계인이 아니고, 어쩌면 정말 천사가 아닐까?
아니면, 천사들만 모여 사는 별에서 온 사람이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3년간은, 가은은 오로지 일에만 쫒기며 살았다.
그 때는 지금의 이 사람처럼 당장 오갈 곳도 없는 처지였다.
난생 처음 가은의 힘으로 돈을 벌고, 살 집을 구해야 했으며,
모든 걸 혼자 힘으로 결정해야 했다.
생각해보니, 3년간 영화 한편 본 적이 없다. 예전처럼 마음대로 쇼핑을 할 수도 없었다.
외계인이니 천사니 하는 공상 따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쩐지,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가은은 혼자 빙긋 웃었다.

“배고프죠? 손도 나았으니 얼른 죽을 끓여 줄게요.”

“죽?”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당신, 죽을 먹어 본 적이 없나 보군요. 여태까진 스프만 먹었을까?
걱정 말아요. 나, 3년간 요리 실력 꽤 늘었으니까.
방에 가서 앉아 있어요. 텔레비전을 계속 보던가요.
한 시간만 더 티브이 보면 나보다 우리말을 더 잘할 것 같아요.ㅎㅎ”

가은은 웃으며 그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텔레비전에선 아침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고

마침 가족이 모두 모여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저기 봐요.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고 있죠? 저걸 좀 더 묽게 끓인 걸 죽이라고 해요.”

그는 뚫어져라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마치, 단 한 번도 밥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런 그를 바라보고 가은은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이라고 해도 좁은 싱크대와 찬장 하나가 달랑 놓여있는,
현관문과 방문을 연결하는 좁은 공간일 뿐이었지만.

“자, 다 됐어요. 먹어봐요.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가은은 당근과 양파, 참치를 조금 넣은 죽을 그에게로 밀었다.

그는 죽이 담긴 그릇과, 가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맛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아이, 너무 하시네. 그럼 내가 먼저 먹을게요.”

가은은 밝게 웃으며 죽을 한 숟갈 떠먹었다.

“음, 맛만 있네. 어서 먹어봐요. 먹어야 힘이 나고 얼른 기억도 되찾죠.”

가은이 채근하자, 그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자세가 영 어색했다.

“ㅎㅎ 그게 뭐에요. 숟가락도 안 쓰는 데서 온 거에요?”

가은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은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죽을 입에 가져갔다.

“음….”

그는 눈을 감고 죽을 음미했다.

“와, 맛있어요! 맛있어요, 가은씨!”

죽을 맛본 그가,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다.

“ㅎㅎ 이 정도를 가지고 뭘 그래요. 저기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많이 드세요.
그런데 정말, 죽 처음 먹어보는 거예요?
그럼 예전엔 무슨 음식을 먹고 살았어요? 그것도 기억이 안나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네, 음식이라는 걸,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아요.
뭔가를 이렇게 씹어서 삼켜본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한 숟갈씩 먹을 때마다 기운이 솟네요. 가은씨는 이렇게 힘을 얻는군요? ^^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무척 재밌어요.”

죽을 먹던 그가 다시 천사처럼 웃었다.
가은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음식을 먹는 일조차 기억이 나지 않다니.
가은은 어쩐지, 그를 잘 보살펴 주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꼈다.

잠시 후, 상을 물린 가은이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오자,
그는 어느 새 잠이 들어있었다.
이불을 끌어 덮어주며 가은은 생각했다.

‘오갈 데도 없는 모양이고,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해야겠다.
보아하니 나쁜 짓을 할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고.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걸까, 이 사람.’

잠이 든 그를 바라보다가, 가은은 그에게 옷이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가은의 옷은 그에겐 너무 작았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잠그고 나오며, 가은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찬찬히 따스해져 옴을 느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기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내가 힘이 된다는 느낌,
약간의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가은은 이제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지난 3년간 혼자서도 잘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저 사람, 천사같은 라파엘이 있지 않은가.

“아~ 공기 좋다.”


가은은 가슴을 활짝 펴며 심호흡을 했다.
시장으로 향하는 가은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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