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 작 < 풀밭 위의 식사 > 우리나라의 서양화 도입시기의 일본유학파 작가 김관호가 '해질녘'이란 그림을 일본문전에 발표했을 때 큰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신문에서는 작품사진을 실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아닌 '여인이 벌거벗은 고로 게재치 못함'이었다. 세월은 흘러흘러 이제 전시회장에서 여성이건 남성이건 혹은 양성이 묘하게 섞여있는(?) 모습까지도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여성의 누드가 외설이냐, 예술이냐로 논란을 빚은 것은 당시의 시각에서 바라 본 평가에서이다. 즉 예술과 외설의 한계는 매우 심리적이자 사회적인 것에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다. 어떤사람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성적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외설'이라고 단정짓기도 하지만, 현대 미술에 와서는 이러한 것이 별로 통용이 되지 않는 듯 하다. 가령 미국작가 제프 쿤스 등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허슬러'나 '펜트하우스' 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성기의 직접적인 노출은 두말할것도 없고 성교장면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된 이러한 작품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는 동성얘의 만연에 비해 오히려 이성간의 건강한 성문화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고 하니, 더욱 외설과 예술의 한계는 모호해진다. 즉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에 따라 과거 외설로 치부되었던 것이 예술로 여겨지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이 비단 어제 오늘일이 아닌 것을 미술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조의 춘화는 당시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사료이자 훌륭한 미술자료이며, 100여년 전 당시 프랑스 귀족사회에서는 " 매우 역겨운 그림' 이라고 평가 받았던 마네의 도 근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점을 상기하자. 시각적인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가식, 그리고 구성원들의 인식변화를 못따라그는 사회적 규범은 언제나 절대적이고 영속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한계의 문제는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어쩌면 외설의 문제는 이미 미술에 있어서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