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르......
굳은 추림의 얼굴 근육이 잔 떨림을 일으켰다.
그것은 두터운 유리벽과 창살 너머에 마주선 시연도 다르지 않았다.
이시연... 눈물에 젖은 얼굴로 몸을 길게 떨며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는 모양새로
추림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시연... 어떻게?"
추림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허허로이 새어나오고 눈동자가 파랑을 일으켰다.
보고싶고 생각나는 여자였다.
절대라고 말 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이 온통 암흑 천지인 추림에게 시연, 그녀 조차도
커다란 언덕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추림... 추림아!"
추림을 목놓아 이름하며 다가온 시연이 유리벽을 손으로 쓸어 만지며 더 가까이
추림에게 다가오려는듯이 몸부림쳤다.
추림의 쓸쓸한 눈이 처연하게 변하고 시연과 그녀 뒤에 우뚝 서있는 장신의 멋진
남성 최진규를 바라보았다.
"맞군! 난 믿지 않았는데... 네놈은 날 항상 당황스럽고 곤혹스럽게 만드는구나!"
최진규가 굳은 얼굴을 하고 조금 다가오며 추림에게 입을 열어 말했다.
"오셨군요. 모르길 바랬건만......"
"추림아! 너 왜 이런거야? 흑... 싫어! 이런거 싫어!"
시연이 기운없는지 어깨를 유리벽에 기대며 비틀거렸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추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며 고르고 흰 치아를 드러냈다.
"에이! 그만해요. 왔으면 인사하고 덕담 주고 받아야지 이게 뭐예요?"
애써 환하려 밝으려 가장하며 추림이 시연을 달래려 했다.
그러자 시연이 얼른 눈물을 훔치며 추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르고 거칠게 변한 추림의 얼굴을 세세히 관찰하려는듯이 시연의 눈동자는 분주하고
집요하게 움직였다.
"......!"
"아......!"
시연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며 유리벽 너머에 있는 추림의 얼굴을 만지듯이 유리를
쓸었다.
"어때요? 오랜만에 보니 좋아요?"
윙크를 하며 추림이 묻자 시연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변...했어! 너 예전의 추림이 아니야! 당신 누구야?"
느닷없는 시연의 음성에 추림은 가슴이 뻥 둟리는 기분이었다.
푸른 죄수복과 왼쪽 가슴에 선명한 수감번호를 단 추림의 모습! 낮설고 다른 존재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현실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려는 시연의 말속에 든 의미가 그렇게 무거운 감정
으로 느껴졌다.
"변하긴...? 잘 지냈어요? 전 잘먹고 잘자고 잘싸고... 잘 놀고 있어요.
뭐 별로 다르지도 않네요. 어딜가나 사람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인가봐요.
거기 아저씨. 잘 지냈수?"
추림이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말하고 최진규를 향해 자연스럽게 안부를 건넸다.
한 발 다가와 시연의 옆에 선 최진규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뀐거 같은데? 안부는 내가 묻고 넌...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네놈은 이런 현실이 마치 놀이처럼 여겨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집어치워라! 솔직해
지던지. 힘들고 고통 스럽다고 말하면 누가 흉본단 말인가? 흥!"
여전히 오만하고 틀어진듯한 최진규였다.
하지만 예전의 최진규가 아닌것은 분명했다. 그는 감정이 서툴고 어색할 뿐이었다.
최진규가 내 쏜 말에 추림은 한쪽 입을 비틀어 웃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선주는... 갔어요?"
최진규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하고 눈빛에 따듯한 기운이 담겼다.
추림이 최진규에게 형이라 부른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악연으로 시작된 사이였다.
잊지못할 사건을 제공한 최진규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게 한 존재, 최선주!
그를 향해 말할때 추림은 주로 존대말을 했지만 하오체를 섞어 사용하기도 했었다.
과거의 일을 아직 잊지 않고 았다는 반증이었지만 이제 추림은 최진규를 사회에서
만난 한명의 선배로, 연장자로 대하고 있었다.
시연을 힐끔 바라본 진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갔군요... 저 이런모습 모르겠지요?"
마음이 쓰려왔다.
그 철없이 행동하고 막무가내로 살갑게 굴던 선주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하지 못한것이
무척이나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모르지. 나나 여기 시연씨도 이틀전에 알았으니까. 그녀석 널 많이 보고싶어했다.
연락이 안된다고 잠도 못잤다. 보게되면 전해 달라는 말이... 나중에 하지."
한숨을 내쉰 진규의 입이 다물어 지고 분위기를 시연에게 양보하려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휴우... 너 왜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니? 얼마나 놀라고 초조했는지 알아? 나쁜놈!"
"......!"
"어디 아픈데는... 잘 지내는거지? 네 일을 알고 도울일이 있을까해서
여기 최진규씨와 같이 왔어. 오해는 하지마."
시연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공감이 갔다.
시연은 기자고 최진규의 인맥은 그리 허술하지가 않다.
크게 대단한것은 아니지만 최진규, 그의 집안이 지닌 배경과 주위 환경은 최진규
그 자신이 범법을 저지르고도 무사히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게끔 가능하게 할 힘 정도는
지녔다.
자신의 억울한 일을 도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추림은 그런 그들의 마음만을 받기로했다.
"도움은... 이제 곧 나갈건데요 뭘. 걱정 마시고 나중에 근사한 밥이나 사줘요."
"말도안돼! 다 알아봤어! 널 이렇게 만든 놈들은 멀쩡히 자유로운데 넌... 바보니?"
"예. 저 바봅니다. 바보라서 이곳에 있는거고 바보라서 누나 손도 못잡아 주잖아요."
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나! 추림이 그녀에게 누나라고 호칭한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연을 호칭하던 추림의 태도는 매우 애매한 것이었다. 추림보다 나이 많아 애초부터
누나라고 그가 호칭했다면 새삼 시연의 태도가 저자세일리 없었다.
시연은 추림을 남자로 생각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다.
처음 만남 자체가 가벼운 인연이 아니라서 추림의 태도 또한 단순해 질수가 없었다.
이성을 구분짓는 이분법적인 행동으로 일관해오던 추림이었다.
사랑은 아니지만 언제든 남자와 여성이라는 이성관의 주체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사이임을 인정했었는데... 이제 그 이분법적인 이성관을 추림이 깨뜨리고 있었다.
"너어? 방금... 너 왜 그러니? 그러지마! 난 변하지 않아. 싫어!"
시연의 고개가 세차게 흔들리면서 추림을 원망어리게 바라보았다.
"훗! 변하지 않는다라...? 세상에 변하지 않는것은... 오로지 추림밖에 없어요.
애초에 누나라고 했어야 했는데요 뭐."
가슴을 치며 추림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랫 입술을 깨문 시연이 진규를 잠깐
바라보고 다시 추림을 원망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운 얼굴은 일그러져도 아름다운 법인가보다.
어떤 이에게 스스로의 가치는 매우 원대한 것이라서 시연이 추림을 생각하고 대하려
하는 주관이 그랬다.
시연에게 추림은 변하지 않고 늘 한자리에 머물 단단한 돌같은 남자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한번도 추림을 연하로 생각한 적 없었다.
지치지 않고 굴하지 않던 그 굴강한 추림의 모습에 감동받아 좋아하게 된 배경엔 시연이
오랜동안 동경하던 것이었다.
예전 추림의 혈투를 보고 단번에 '저 남자다'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의 무게는 단순 이름만의 무게가 아니다.
남자의 뜻은, 사내 남(男)을 보듯이 능히 열 사람의 입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고
열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시연에게 추림은 그런 남자였다.
늘 조용히 웃고 난데없는 농담으로 즐겁게 해주던 그런 바위같은 존재였다.
절대 추림에게 누나라거나 인척같은 관계로 받아들여 지고 싶지 않았다.
추림이 경계지어 버린 관계적 정의! 누나! 그것은 언젠가처럼 열정적이고 욕망의
찌꺼기를 모두 불살라 버릴 엄청난 에너지의 단절과 평범함을 의미했다.
기운없이 슬픈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기대는 것 조차도 멋지게 보였던 추림이었다.
이제 그가 시연을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시간없어요. 형! 저 아가씨 잘 해줘요. 솔직히 당신 저여자 좋아하잖아? 안그래?"
추림이 장난끼섞인 말투로 진규에게 말하고 눈을 찡긋 거렸다.
"둘이 아주 잘 어울려. 최진규 이시연! 뭔가 그림이 나오는데? 자주 만나 정 쌓고 마음
나누다 보면 그게 바로 사랑인거지. 어이 최진규씨! 저 아가씨는 말이야 황색 계열을
좋아하고 음식은 생선과 야채류를 즐겨먹는단 말이야. 존경하는 이는 마리아 수녀고
가보고 싶은곳은 스위스, 아프리카니까 잘 기억하라고. 나이 이십육세. 키 168센티,
발 치수 245, 즐겨듣는 음악 샹송, 가족관계... 언니와 그녀 둘, 아침잠이 많고 가끔
멍하게 하늘을 볼때가 있는데 그때는 그냥 건드리지 말고... 혈액형은 B형.
봄을 좋아하고 꽃은 아카시아를 좋아하며 감명깊게 본 영화가 벤허였던가?
닥터 지바고다! 신체 치수는... 직접 알아보셔!
펄 벅에 죄와 벌을 열 댓번쯤 읽었다니까 당신도 한번 읽어보고 성격은 쾌활하고
단순 명료로서 흑백이 뚜렷해! 볼링을 즐기고 테니스도... 생일 12월 6일! 즐겨 마시는
술은 맥주고 죽어도 아침은 먹어야 하니까 잘 챙겨 주라고. 아마 조금 귀찮을걸? 흐흐!"
추림이 시연에 대해 알고 있는것을 마구 기억나는데로 말하고 느물거리며 웃었다.
진규와 시연의 얼굴은 모두 심각하게 변해있었는데 의미는 달랐다.
시연은 추림이 자신에 대해 그토록이나 많은것을 알고 있는지 몰랐다. 만나면서
간혹가다 말해 주었던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남자 드물다.
애써 기억하려해도 금새 잊어먹는 법인데 추림은 모든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랜동안 같이 살아왔던 언니 조차도 알고 있지 못한 사실들을 기억해주는 남자!
그런 추림이 이제 자신을 밀어내려한다.
최진규는 추림이 말한 내용들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하나하나 세심하게 기억하려고
애썼다. 처음 관심을 가졌던 여자고 가슴을 울리게 만든 여자였다. 다른 여자들처럼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왔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최초의 여자였다.
이시연은 분명 다른 여자였다.
그녀가 추림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추림이 이렇게 나오고 자신에게 기회를 밀어주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추림을 위로하고 안부를 걱정해주어야 정상인 자리인데 전혀
엉뚱한 상황이 연출 되고 있었다.
추림은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겨우 십오분 남짓동안 할 말 다하고 행동 다 보일수는 없었다.
저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보인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제 저들이 자신을 찾아 오지 않기를 바랬다.
절망과 시련속에 더이상 강한척 하고 싶지 않았고 정상인것 처럼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기운이 없었다. 더이상 버텨낼 기운이 없었다.
멈추어 버린 시간을 애써 돌려가며 나아갈 힘이 없었다.
"어이! 거기 두명! 이제 시간 다 되었어. 나 곧 나갈거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좋은
자리나 만들어 두셔. 멋진 환영식을 열어 달란 말이야. 시연누나. 좀 웃어봐! 그게 뭐야?
나 예전의 추림 그대로야. 어디 가거나 죽는거 아니라고! 진규형! 갈때 영치금이나
두둑히 내주고 가슈. 형은 부자잖수. 아셨어? 여기 빌어먹을 놈들 투성이라고!
이제 돌아들 가봐!"
"너... 추림아! 너 왜 그러니? 나 진규씨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그렇지요? 진규씨?"
"예? 아 예... 뭐 그건... 이추림. 걱정하지 말아. 실컷 먹고 배터질 만큼 영치금
넣어주고 갈테니가."
시연이 추림의 행동을 오해해서 한 줄 착각하고 진규에게 확인받으려 말했지만 진규는
얼렁뚱땅 넘어가버렸다.
"진규형! 전에 나랑 약속한거 이길수 있겠어요? 남자는! 가슴입니다! 넓고 포근한 가슴!"
"넓고 포근한 가슴... 넌 늘 날 어렵게 만드는구나! 한번 해보지."
추림의 말을 되새기려는듯 중얼거린 진규가 추림에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시연누나. 난 누나에게 줄게 없어요. 옆에 있는 그남자 나보다 잘나고 멋지잖아요.
누나는 우는것 보다 웃는게 매력인데... 그만 울면 안되요?"
훌쩍거리며 시연이 추림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까? 지금 현실이 추림에게 얼마나 큰 장애이고 시련인지를 말이다.
어떤이의 현실보다 여자의 마음은 더욱 쓰라리고 아픈걸까?
면회 시간을 종치는 벨이 울렸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무거워진 추림은 약해져 오려는 마음을 다 잡고 배에 힘을 주었다.
숨을 내쉬고 가라앉으려는 느낌들을 추수리고 진규와 시연을 번갈아 보며 웃어 주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이제 오지 말아요. 저 곧 다른곳으로 가거나 아니면 바로 나갈수
있을지도 몰라요. 잘가요."
"잘 지내라고.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곳이군. 나오게 되면 멋진 곳에서
한잔해 보자. 그리고 밥 좀 많이 먹어라. 살이 많이 빠졌다. 그만 가겠어."
"다시 올거야. 너 나올때까지 올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다시는 날 그렇게 부르지마!"
또다시 원망어린 말을 늘어 놓은 시연이 진규의 손길에 떠밀려 억지로 면회실을 빠져
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추림은 멍하게 그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비틀거렸다.
울컥하고 치민 격정을 그대로 놓아두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 올랐다.
허무했다.
잠깐의 만남이 가져온 또 다른 쓸쓸함과 외로움이 남아 돌았다.
"난... 줄게... 없어요... 남은게 없단 말이예요!"
추림이 음성이 썰렁한 면회실에 부딪혀 울리고 뒤로 다음 면회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
팔월이 지루하면서도 느리게 흘러갔다.
추림이 검찰로 불려가 대질 심문과 조서를 받고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진것은
짐작한 결과가 아니었다. 깊고도 어두운 수렁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그때쯤,
함께 구속당한 박도형이 집행을 유예 받아 풀려났다.
그것이 더욱 큰 상처가 되었다.
같이 들어왔었다. 직장 동료의 안전을 위협받아 한 행동으로 구속된 몸이었다.
그런데 박도형 그만이 나가고 자신은 남겨지게 되자 이유모를 배신감과 괴리감에
전신이 떨려왔다.
이미 전범이 있었던 박도형은 법의 전례에 따라 집행을 유예 받은 것이지만 추림은
그것을 쉬이 받아 들이지 못했다. 스스로의 세상을 만들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추림은
몇가지의 행동으로 하루 하루를 지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은 창가에 기대 하늘을 바라보며 끝없는 망각의 강을
허우적거렸고 낮동안은 편지지에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써 나갔다.
유미라는 이름이 가득한 글자들은 빈 여백을 남기지 않고 채우고 또 채웠고 간혹 검은
얼룩은 그가 흘린 눈물 자국이었다.
구구구.
비둘기가 어디선가 처량하게 울고 있는 새벽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온통 별들로 가득했다.
조각난 달이 걸린것이 곧 큰 누런 구체가 완성될듯 했다.
안개가 자욱한 어둠속에서 유미가 살며시 나타났다.
또다시 찾아든 그것!
몽환적 그리움의 부산물! 환각과 착시! 가끔 이렇게 그녀는 어둠을 뚫고 나와 한동안
머무르다 사라진다.
추림은 이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았다.
"어제 뭐했어요? 오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렸어요.
어제 예배하러 갔다가 많은 기도를 드리고 왔어요. 잘 지내죠? 올 여름엔 당신과 어딘가 놀러라도 가고 싶었는데 미안하네요. 제가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가장먼저 당신을 보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가능하게 될지 모르겠네요."
어둠속에 희미하게 나타난 유미를 바라보며 추림의 중얼 거림은 끝없이 이어졌다.
"보고싶고 또 만나고 싶어요. 이상해요. 당신을 기억하려 떠올리려 하면 신기하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요. 왜 그렇죠? 유미씨는 절 기억하고 있나요? 제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배워둘걸 그랬나봐요. 제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날 기다리는 것인지 어떤게 정답일까요?
이곳은... 아주 춥고 이로운 곳이라서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전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저 기다려 주고 있는거죠? 유미씨. 사랑해요."
추림의 독백이 허공을 뚫고 밤 하늘에 살며시 울려 퍼졌다.
허공에 걸린 유미의 실루엣이 점점 흐릿해 져 오자 추림의 마음이 급해졌다.
"반드시 돌아갈 거예요. 기다려 줄거죠? 당신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요. 깊게 자리한
당신의 눈동자를 보고 싶어요. 온통 암흑 천지인데 오로지 당신만이 날 위로해주는거
아시죠?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어디 아픈데는 없는거죠?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사랑해요. 조금만 울고 아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우리 다시 만나는 거죠?
당신 괜찮은거죠? 걱정되요. 힘들고 어려울 때 곁에 있어준다 했는데... 미안해요.
그런데 저 너무 힘들군요. 지치고 피곤해요. 하지만 참을수 있어요.
당신...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이해서 이 시련을 견딜 거예요. 저... 변하지 않아요.
제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요. 사랑해요 유미씨!"
그렇게 추림의 독백이 끝난 며칠 뒤, 늦 장마가 시작된 날의 가장 심한 폭우가
몰아치던 날 추림은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할 준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던 8월의 중순 어느날 추림은 새로운 환경과 또다시 맞 부딪혀야
하는시간을 맞고 있었다.
타 구치소로의 이감!
겨우 어려운 환경과 싸워 익숙해 져 있는 이때에 그것은 정말 큰 시련이었다.
낮선 새로운 환경에 다시 맞서야 하는 절박함. 추림의 가슴은 온통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비속을 뚫고 추림을 실은 호송 버스가 도로를 질주해 나갈 때 추림은 아득하게
멀어지는 뒷길에 수없이 많은 사연을 남겨 두었다.
8월 중순, 어느날 비가 오는 길위로 추림의 흔적은 쓸쓸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