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페트(The forbidden pet) -
이 름 배진국
제 목 금단의페트 - promise -
힘들었던 일이 끝나고, 어느덧 거의 폐점 시간이 다 되어갈
때 즈음.
"잠깐 할 말이 있다."
기르디는 기척도 내지 않고, 어느새 내 등 근처까지 와서 그
렇게 말했다.
이런 녀석하고는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거절할 사이도
없이, 벌써 밖으로 나가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녀석을 따라 식당 밖으로 움직인
다.
시민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조그만 공원의 벤치에 앉은 체
기르디는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말했다.
"뭐 하냐, 어서 앉아."
내가 옆에 앉자, 기르디는 품에서 뭔가를 뒤적이더니, 구겨
진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을 꺼내고는 대충 던져서 건네주었다.
펼쳐 보자, 익숙한 필체의 글이 보인다. 아버지의 글씨다.
'네 녀석이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역시 내
아들놈답구나.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갑자기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이라면. 마음 단단히 먹고 집 생각
은 하지 말고, 열심히 지내주길 바란다.
ps. 그리고 네 녀석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과격한
행동을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거
라.'
하지만 '과격한 행동'이, 자식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갈
뻔한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겠지?
"휴, 그런 것이군요."
대충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조금 착잡하다고나 할까. 싱숭
생숭한 기분이다.
"내가 심하게 한 것은 인정한다. 사과하지."
이 녀석이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다 하다니…. 조금
은 의외의 일이다.
이미 지나갔던 일들은,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고, 나는 생
각해 두었던 말을 하기 위해, 진지한 표정으로 기르디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기르디는 내 진지한 모습을 보고, 조금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대답했다.
"뭐지?"
잠시 동안의 정적….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검술을 가르쳐주십시오."
기르디는 당황한 듯 잠시 동안 멍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곧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뭐랄까, 좋은 장난감을 얻은 어린아이의 미소라고 할까? 그
것도, 개구리 같은 살아 움직이는 것 말이다. 나는 그런 기르
디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다시 대답했다. "예."라고.
기르디는 조금 망설이는 듯,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
에 살짝 긴장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뭐…. 좋겠지."
갑작스레 눈을 빛내며,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기르디는
대답했다.
기르디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조금은 뜨끔한 것도 사실이었
다.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인데도 말이다.
"그럼 내가 너의 스승이겠지?"
"그, 그렇겠죠?" 능글맞은 사악한 질문에, 나는 그렇게 주춤
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르디는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듯이, 더욱더 짙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역시 이 녀
석은 남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변태 같은 녀석 같다.
하지만 그 실력만은 인정받을 만하니까. 장래를 위해서 고생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겠다. 준비해 두도록."
그 말을 끝으로 기르디는 어깨에 두른 팔을 빼고는, 식당 쪽
을 향해 느긋하게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한 짓을 한 건가? 아니,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냥 편하
게 마음먹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 해석 불능의 떨림은 무엇인
가.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본능이라는
건가? …휴, 잡생각은 관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는게 좋겠지.
내일부터는 더 괴로워질 테니 말이다.
* * *
조금 황당하다고 할까.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건가, 지금
상황은?
"으으. 5분만 더 잘게…. 5분만."
기르디 녀석은, 평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잔뜩
몸을 달팽이처럼 둘둘 말고는, 베개를 양손에 부여잡으며 그렇
게 꼴상스러운 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참으로 한심한 모습이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엉덩이를 발로 후려 차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자신
의 위치가 안타깝다.
스승의 엉덩이를 후려치는 제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어느덧 문을 열고 아이린 씨
가 들어왔다. 그런 아이린 씨는 잠시 기르디를 바라보더니, "
이럴 줄 알았지."하고 한숨 쉬며 말하고는, 옷소매를 걷어붙이
고 일기당천의 기운으로 침대에 돌진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역
동적인(..) 모습이란 생각이 퍼뜩 내 뇌리를 강타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빨리 일어나지 못해!!!!"
정말 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아이린씨의 목소리. 가
날퍼 보이는 체구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행동이다.
기르디의 고막은 괜찮을 것인지 새삼 걱정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귀 근처에서 저런 고함소리를 들은 다면, 그 충격
때문에 고막이 찢겨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으윽, 시끄럽다고! 일어나면 되잖아!"
짜증을 내고 어기적거리며 천천히 일어나는 기르디의 모습
은…. 정말,'황당하다,'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
다. 평소에 보이던 냉소적인 모습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기르디가 세수를 하러, 세면대 쪽으로 어기적거리며 움직이
자 - 도중에 아이린씨한테 엉덩이를 여러 번 채이면서. - 나
도 슬슬 식당의 뒤쪽 공터 쪽으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
식당의 뒷문으로 나가면 조그만 공터가 있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
"음, 오늘부터 하는 거야?"
나의 뒤를 총총 따라오며, 아이린씨가 물어왔다. 기르디에게
대충 사정을 들은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린씨는 조금 망설이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오빠는 저렇게 보여도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저런 사람이지
만 실력이 뛰어난 것은 확실한 것 같으니까 말이다.
"열심히 하라고."
새삼스럽게 응원해 주는 아이린씨에게, 그래도 조금은 감사
하는 마음을 가지기로 생각했다. 그래도 이 식당에서 제대로
된 사람, 아니 엘프는 그녀밖에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나
나 시아 녀석이나 왠지 나사 한 두개는 빠진 것 같았고, 기르
디 녀석은 뭐,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상한 녀석이었으니 말이
다.
공터에 도착하고 - 도중에 아이린 씨는 영업개시를 준비한
다고 말하며 사라졌다. -, 기르디를 기다렸지만….
"안 오는군."
심심한 나머지 목검도 휘둘러보고, 이리저리 뛰어도 보기도
하고, 장난도 쳐보기도 하며 시간을 때워 보았지만.
기르디 녀석은 뭐하고 있는 건인지, 도저히 오지를 않는 것
이었다.
'망할 녀석.'
뭐 이렇게 속으로라도 욕해야지 마음이 편하지. 내가 뭐 천
사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녀석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게 '젠장, 무의미한 아침이다', '녀석에게 가르침을 받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즈음, 등뒤에서 기르디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어기적거
리며 내게 다가왔다.
"하아-품, 기다렸냐? …음, 그럼 시작하지."
이렇게 늦은 이유나 알고 시작하자.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죠?"
기르디는 내 질문에 헛기침을 하며 대충 넘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그냥 '네, 알겠습니다.'하고 넘어
갈 것 같은가? 더 냉정한 눈빛으로 바라 봐주자.
"음, 세면대에서 졸아서."
"……"
정말 할 말이 없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대단한 녀석 같
으니라고.
기르디는 썰렁한 분위기를 만회해 보이려는 듯, 안색을 굳히
며 외쳤다.
"자자. 일단 자세부터 잡자."
왠지, 이제 그런 말해봤자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어서…. 그렇게! 조금 몸을 낮추고! 손에 힘을 더 주라고!"
눈곱이나 떼고 그런 말하라고! 이 무책임에, 무신경한 남자
같으니!
으으, 내 팔자야. 첫날부터 이 모양이니, 안 봐도 훤하다 훤
해. 괜히 가르쳐달라고 그런 거 아냐?
"궁시렁거리지 말고! 어서!"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갑작스레 어젯밤의 내가 때려죽일 만큼 밉다는 생각이 들어
왔다. 그래도 녀석의 말에 순순히 따라주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첫날은 대충 기본적인 자세라든지 찌르고, 베고. 대충 그런
것들을 알려주었다.
"음, 일단 손에 익숙해질 때까지 휘둘러봐. 검이란 것은 하
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하도 힘을 써서 녹초가 된 나를 바라보며, 기르디는 그렇게
말했다.
더 휘두르고 싶어도, 이제는 무리다, 무리. 목검을 들 힘도
없다고.
"음, 그럼 오늘은 이 정도만 하지. 그리고 혼자 있을 때도,
틈틈이 열심히 연습해두라고."
그 말을 끝으로 기르디는, 문을 열고 식당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땀은 온몸을 적시
고, 심장은 미칠 듯이 뛰며 날 괴로워하게 만들고 있었다.
체력이 그렇게 약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막상 이렇
게 검술 연습을 시작하자 내가 얼마나 부족한 녀석이었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은 체력 먼저 기르는 게 급
선무일 것 같다. 이렇게 꼴상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서라도 말이다.
일단 싸우다가, 체력이 딸려서 진다는 것은. 정말 한심스러
운 일이 될 테니 말이다.
나른한 오후다. 간만에 손님들도 없고, 할 일도 없었기에 테
이블에 몸을 묻고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빈둥
거리고 있을 때에, 딸랑거리는 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손
님이 왔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두 사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
어왔다.
나이는 내 또래 같아 보였지만, 입고 있는 옷을 보니까, 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보석과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
는 옷. 무거워서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생각되는 옷차림이
다. 아무리 뽐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더위에 저렇게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싶을까?
소녀는 또래의 여자 아이에 비해 키도 크고, 굉장히 단정하
게 생겼지만. 눈썹이 올라가 있는 게, 한 성깔 하는 듯 싶었다.
그에 대비해서 소년은 키도 작고, 어깨도 좁은 게 한 소심하게
생긴 듯했다. 솔직히 전체적으로 보아서 굉장히 안 어울리는
커플 같다.
아마도 귀족들의 자식들인가보다. 이 날씨에 저런 옷을 입
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돌아다니는 것을 보아도 말이다.
그중에 한 소녀가 식당을 둘러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
다.
"흠, 여기가 그 식당이란 말이지. 역시 평민들이 다니는 곳
답게, 불결하고 좁아 터졌군."
굉장히 신경질적인 소리다. 절로 나까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
다. 갑자기 '짜증나게 하는 인간 심사 대회'라는 것을 연다면
분명히 순위 안에 들 여자아이다, 라는 실없는 생각이 들어왔
다.
하지만 아무리 싸가지 없더라도 일단은 손님이다. 내 식당이
었다면, 엉덩이를 두들겨 주고 쫓아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힘없는 종업원에 불과하니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봐, 어서 자리로 안내하지 못하겠어!"
성깔 소녀가 날 바라보며 그렇게 외쳤다. 널린 게 빈자리인
데, 자기는 발도 없는 병신인가? 왜 안내를 받아야 하는 건가,
도대체…. 짜증 지수가 절로 올라간다.
그래도 일단은 자리에 일어나서 대충대충 전망이 좋아 보이
는 창가 쪽 자리로, 그 둘은 안내해 주었다.
"여기가 특등석이겠지?"
특등석이라…. 이 식당에 그런 게 있기는 한 건가? 내가 오
히려 반문하고 싶었지만. 저런 여자랑 말하는 것조차 짜증이
났기 때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다고 해주었다.
메뉴판 두개를 건네주자, 고귀해 보이려는 몸짓으로 받아들
고는 - 보는 나는 괴로웠다. - 음식들의 이름을 훑어보기 시
작했다.
"이봐, 종업원 소년. 오늘의 추천 메뉴는 무엇이지?"
뭐냐, 그 '오늘의 추천 메뉴'는. 이 식당에 그런 게 어디 있
을 것 같은가.
그리고 나이도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종업원 소년'이라니.
진짜 기분이 더러워진다.
"방금 생선이 들어왔습니다. 생선 요리 쪽을 추천하고 싶군
요."
하지만, 나는 임기웅변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거 없는
데요.'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그래, 그럼 적당히 2인분 가져오도록. 그리고 포도주는 아
트로퐁산으로 부탁한다."
아트로퐁? 그건 또 뭐냐? 정말 갈수록 가관이군.
내가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가만히 마주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쳇, 어린것이 벌써부터 돈맛이 들은 거냐."
무슨 소리하는 거야, 대체? 내가 당혹스러워하자, 그녀는 품
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자, 여기 팁이다."
"……."
마치, 기르는 개한테 음식을 던져 주는 것 같은 뉘앙스다.
정말 짜증이 폭팔할 듯이 솟구쳐 오른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해주고는, 나는 주방 쪽을 향해서 발걸음을
움직였다.
정말 재수없는 오후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르디는 대충 내 말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트로퐁산이라고? 젠장, 그런 거 마실 년놈들이 왜 이런
식당에 온 거야."
내 말이 그 말이오. 당신도 가끔씩은 제대로 된 말을 하는구
려. 근데 대체 아트로퐁산 포도주가 뭐요? 포도주에 금이라도
넣은 건가?
"최저 30년 이상 숙성된 포도주다. 물론 처음으로 수확하는
극소량의 포도로만 숙성시켜 만든 거지. 최고급이라면, 네 녀
석 몸값보다는 훨씬 비쌀 꺼야."
음 그러니까, 아트로퐁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수확하는 극
소량의 포도를 숙성시켜서 만드는 포도주의 이름이라는 거지?
근데 말을 해도 저렇게 싸가지 없게 하는 건가. 인간을 어떻게
값어치로 환산할 수 있다는 거야.
"하여튼, 기다려봐."
음, 그런 최고급 포도주도 있기는 한가보지? 기르디는 주방
의 안쪽으로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르디가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다. 예의상 당황해 주자고 생각했다.
퐁-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자 코를 근처에 대고 냄새
를 맡기 시작한다.
오래 숙성해서, 썩은 거라도 있었나보지? 저렇게 개처럼 킁
킁거리며 냄새를 맡다니, 일단 보기에는 좀 추해 보이는군.
"음, 좋아. 최고급이군. 마음에 들었어."
"……."
그녀는 만족했다는 듯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내게
질문했다.
"이봐, 소년. 이름이 뭐지?"
이름, 무슨 이름? 저 포도주에 이름말인가?
"아트로퐁 50년 산.. 포도.."
"아니, 소년의 이름이 뭐냐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다시 질문하는 그녀였다.
".. 베리 입니다."
"쿠쿡, 웃기는 이름이군.. 안 그래요, 치터린 오라버님?"
갑작스레 그녀가 질문하자, 조금은 당황하는 옆의 남자였다.
생긴 대로 소심하게 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렇구나. 루비아스."
치터린? 루비아스? 너희들 이름도 구리긴 마찬가지다. 내 이
름이 구린 건 나도 인정하지만 말이다. - 뭐 묻은 개가 뭐 묻
은 개 욕한다고 - 새삼스레 다시 기분이 더러워지는 순간이었
다.
"소년, 손님 앞에서 그렇게 인상쓰면 안되지."
젠장 대변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주방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괴로웠던 시간은 끝나고, 그 잘난 두 사람은 음식값을 치르
기 위해 - 교양 떠느라고 되게 오래 시간 끌었다.- 내 이름을
불렀다.
"베리야, 얼마지?"
정말 진짜 기분 더러워진다. '베리야'라니. 내가 네 종이냐.
젠장, 빨리 계산하고 꺼져버려.
"10골드입니다."
소녀는, 뻣뻣한 자세로 가만히 있었고, 소년은 창밖에 시선
을 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빨리 계산하세요."
꽤 오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런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독촉하며 말했다. 그 둘은 의아한 듯, 서로를 바
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어서 계산하세요!"
"무슨 소리야, 네가 억지로 끌고 오는 바람에 돈은 가져올
생각도 못 했다고."
뭐야, 이건. 이 사람들 돈도 없이 식당에 온 거란 말인가.
"레이디에게 계산을 하라뇨! 그리고 저도 돈을 별로 가지고
오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왜 나오자고 한 거야, 도대체."
으으! 짜증나, 짜증. 이 녀석들 도대체 뭐야! 돈도 없이 거저
먹으려고 한 거냐!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한다는 소리가 맞는
말이라니까.
그 둘이 막 말싸움에 심취하고 난 어쩔 줄 몰라 할 때에, 타
이밍 좋게 기르디가 다가왔다. 난 모르겠다. 기르디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죽이든, 잡아먹든 알아서 말이야.
무엇이랄까, '강하다'라는 느낌이라고 할까. 기르디에게는 그
런 분위기가 풍겼다. 단순히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느
낌이 아니라, 마치 '저 남자는 이길 수 없다.'라는 이상한 분위
기 말이다. 나도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르면 저렇게 될 수 있
을까? 지금은 이렇게 어설픈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런 기르디의 분위기를, 그 귀족 아이들도 느낀 것
인지 조금 안색을 굳히고 긴장하는 듯한 눈치였다. 기르디는
바로 나의 옆까지 다가와서는, 살짝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
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돈이 없다는데요."
"돈이 없다는데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르디의 웃음은 더
짙게 번지기 시작했다. 기쁜 듯이 웃는 웃음이 아니라, 악마처
럼 사악해 보이는 그런 웃음 말이다. 그런 모습에 귀족 아이들
은 겁을 먹은 건지, 더욱 안색이 창백해졌다.
기르디는 시선을 다시 그 두 사람에게 돌리고, 천천히 또박
또박 말했다.
"이름 있는 귀족 자제 분들이. 이런 협소한 식당에서 돈도
내지 않고, 공짜로 얻어먹는다는 것은, 그 가문에 명예에 먹칠
을 하는 것이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정말 가시 돋친 말투다. 나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니까 말이
다.
"누, 누가 공짜로 얻어먹는다고 했어!"
귀족소녀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그렇게 외쳤다.
"자, 그럼 어서 여기에 사인하십시오."
기르디는 어느새 종이와, 펜을 그 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궁금한 나머지 종이에 무엇이라고 써있는지 살짝 홈쳐보았다.
'A씨는 B가게에서 돈을 내지 않고, 식사를 했기 때문에 X
월 X일까지 그 값을 치러야만 한다. 만약 어길 시에는 국법에
따라 죄를 묻는다.'
- 상인길드 조합.
그리고 대충, 사인할 수 있는 공간이 두어 개 있었다.
종이와 펜을 받아들고는 귀족 소녀는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휘적휘적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프라이드에 상처를 받
은 모양이다. 기르디는 웃는 얼굴로, 종이와 펜을 돌려 받고는
다시 말했다.
"자, 그럼 일주일 안에 계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가
십시오."
빠드득- 이를 갈고는, 그 치터린이라 불리던 귀족 소년의 손
을 부여잡고, 귀족 소녀는 빠른 발걸음으로 식당 밖으로 사라
졌다.
힘들었던, 종업원 일도 그렇게 끝나 버리자 나는 목검 한 자
루 들고, 뒷마당을 향해 걸음을 움직였다.
침대에 쓰러져 잠이나 자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체력 단련을 위해서는 이렇게 스스로 노력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슬쩍 빛(light)주문을 시전했다. 그 빛
으로 뒷마당은 육안으로 사물을 구별할 정도로 환해져 왔다.
어둡기 때문에 연습하기 힘들다는 것은 마법을 쓸 수 있는 나
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던 것이다.
한번 심호흡해 보고는, 연습했던 찌르기와 베기를 하기 위해
전신에 힘을 주며 자세를 잡았다.
팔을 휘두르자, 휙휙-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목검이 밤하늘
의 공기를 가른다.
그렇게 열 번, 스무 번, 백 번…. 수도 세기 귀찮을 때쯤, 나
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대로 땅바닥에 몸을 묻고는,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해
본다.
심장은 터질 정도로 뛰고, 땀은 온몸을 적신다. 하지만 그렇
게 괴롭다는 생각만 들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팔과 다리는 중풍
걸린 노인네처럼 떨려오고, 숨도 고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
쾌한 기분이다.
운동이라는 것도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전에는 제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정기적으로 운동을 해야겠다. 학교에서 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체력을 기르는 건 필수일 테니 말
이다.
"내일인가?"
기르디는 내 목검을 든 자세를 교정해 주며, 그렇게 말했다.
내일…. 내일이 뜻하는 의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에, 나는 잠시 목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일이 바로, 제 27회 공립 성 카이리온 기사 양성 학교의
입학식인 것이다.
"그렇군, 뭐 잘해보거라."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거의 한 달이 다 지나갈 때였다.
내가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 기르디가 구박하는 것
이 듣기 싫어서 죽을 각오로 연습하기도 했다. - 기초적인 자
세는 대충 잡힌 상태였다.
체력도 뭐, 조금은 늘은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너 검은 가지고 있는 거냐?"
검이라니? 검이 따로 필요한 건가? 내가 궁금하다는 듯이
기르디를 바라보자, 그는 한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입
을 열었다.
"그럼 공짜로 학교에서 제공할 줄 알았냐? 이 한심한 녀석
아."
누구는 모르고 싶어서 모른 건가, 왜 괜한 신경질인 건데.
뭐 알았는데 깜빡 잊어먹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한심
한 녀석이라니. 말 좀 곱게 쓸 수는 없는 건가.
"따라와봐."
그는 문을 열고 식당 안쪽으로 들어가서는, 창고 쪽으로 걸
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속으로 녀석을 저주하
는 말을 생각하며 말이다.
기르디는 창고의 큰 크기의 상자를 뒤적거리다니, 길다란 보
따리를 찾아내고는 내게 던져주었다.
"이게 뭐죠?"
기르디는 귀찮다는 듯이,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창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절로 욕이 나온다. 하여튼 보따리
를 풀어보면 뭐가 나올지 알겠지, 하고 생각하며 보따리로 시
선을 돌렸다.
조금은 꽉 매인 매듭을 풀려고 하니 울컥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여튼 진정하고 대충 풀어 헤쳐 보니, 안에는 적당
한 크기의 검 한 자루가 있었다.
크기로 보아서는 롱소드보다는 조금 더 길었다. 하지만 그렇
다고 바스타드 소드라고 보기엔 손잡이가 짧고, 크기도 모자란
편이다. 한마디로 정체가 애매한 검이다.
검집과, 손잡이 부위는 검은색을 바탕으로, 황금색 실과, 붉
은색 보석 같은 것으로 치장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눈에
뛰게 세련되고, 귀해 보이는 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집에서 검을 뽑아도, '스릉'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냥
아주 살짝 스륵-하는 소리가 났을 뿐이다.
부드럽게 뽑히는 검을 보고, 난 의외로 이 검의 가치가 내
생각보다 훨씬 높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전설에서 나오는 검처럼 번쩍번쩍 빛나지는 않았지만 - 말
이야 바른 말이지, 검이 빛난다고 더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 여기 있소, 나 죽이쇼.'하는 짓이지. - 그래도
척 보기에도 굉장히 날카롭고, 아무거나 잘 베일 것 같은 느낌
이 드는 검이었다.
아니, 왜 이런 귀해 보이는 검을 나에게 준 것인가? 평소에
는 원수처럼 대하더니, 뭐가 예쁘다고 이런 짓을?
'그래도 준 것이니까 고맙게 받아야지. 앞으로는 그 녀석이
구박해도 속으로 조금 덜 욕해야겠어. '
그렇게 생각을 하며 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후, 창고 밖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