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런 소리도 없이, 누구도 모르게, 물 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게 사알짝 물 속으로 스며든다. 가만히 입수하여 물 안으로 들어갈 때 순간 녹아들어 물과 하나되어 흐르면 나는 희열을 맛본다. 대자연의 일부임을 되새기며 우주의 품 속에 안기는 평화로운 기쁨이다. 진정 물결에 흔들림이 없었다면, 햇빛이 잔잔한 수면을 통과하여 풀장 바닥에 그려내는 물그림자는 영락없이 정교한 비늘 무늬이다. 바람이 수면을 스치고 지날 때면, 마치 여름 실크 organza의 고실고실한 질감이 만져질 듯한 자잘한 구김의 그물들이 영롱하게 간지럼을 태운다.
그러다가 바람이 거세지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수많은 불꽃들이 정신없이 흔들리며 내 마음도 흔들리게 되고, 이내 도랑에 바삐 떨어지는 빗방울의 모양새가 된다. 바람결에 꽃잎과 나뭇잎들이 물위로 날라들기라도 하면, 나는 그만 산속의 호수에 잠겨있는 듯한 착각에 벙긋 행복한 웃음을 띈다. 만일 이때 럭키하게도 오렌지 물안경을 끼고 있었고, 게다가 햇빛이 낮아지는 오후 4시경이었다면, 향기로운 연두빛 호수에서 황금 빛줄기를 몸에 휘감고 헤엄치는 황홀한 인어가 되어 버린다.
운 없이, 웬 방해꾼이 나타나 풀 전체를 일렁이며 수영을 시작했다면, 하늘거리던 organza고, 밤하늘의 은하수고 뭐고, 물그림자는 곧 해파리들로 살아나 넘실거리며 위협해오고, 급기야 나는 내 상상의 날개를 양보하고야 만다. 이런 경우에 나의 plan B는 팜트리 타기이다. 풀장 바닥에 lap 수영을 위해 그어있는 까만 타일의 선이 풀장 밖에 서있는 키 큰 팜트리의 몸통과 연결되듯 일직선 상에 있기 때문에 나는 lap 수영을 팜트리 타기와 혼동하는 작업을 즐긴다. 하와이에서 구경했던 원주민들의 코코넛트리 타기 못지않게 스무스한 오름새이다. 나는 불청객이 있을 때에만 온전한 육체적 운동에 접어든다...
햇빛이 없어지고 나면, 나의 왕성한 상상력도 힘을 잃게 되지만, 그래도 한가지 마지막 소망은 저녁 6시이다! 빌딩 매니져가 퇴근하면서 풀 속의 등을 켜주는 시간이 되면, 나의 환상은 다시 날개를 되찾게 된다. 물빛은 문득 깊은 터코이즈색이 되고, 약해진 햇빛줄기는 군데군데 짙은 핑크로 숨어있게 되고, 물 속에 켜진 노란 불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잠수해 내려가는 나는 갑자기 한마리 나방이 되어 버린다. 잠수해 있으면서 수면을 올려다보면, 살아 움직이는 은빛 거울이 이 세상을 등지고 저 세상으로 건너가버린 나를 향해 손짓해온다. 언젠가 한 영화에서 주인공이 거대한 물결의 watergate를 통해 미지의 4차원 세계로 여행을 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 한없이 넘실거리는 은빛 거울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물안경 위로 주름져 있을 내 이마 생각이 번득 나서 치켜떴던 눈길을 얼른 내리고 만다.
이때 쯤에 나는 드디어 물안경을 벗어버리고 마지막으로 느림보 악어를 연기한다. 눈높이를 수면에 맞추고 스르륵 미끄러지듯 악어처럼 유유히 물울 밀며 들어가면, 나는 어느덧 할머니를 따라 갔었던 어린시절 추억 속의 종로에 있던 한 주단집 아줌마가 풀풀 풀어내리던 비단의 기름진 넘실거림에 도착해 있다. 비단보다도 더 윤기나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넘실거리는 저녁빛 아래의 물결 속에는 수많은 초생달들이 생끗생끗 웃고 있다. 악어처럼 수면에 눈을 맞추고 수영을 하다보면 마주치는 물결이 끊임없이 콧잔등을 간지럽게 하는데, 나는 진짜 악어들은 코가 저만치 있고 입이 저만치 있겠지? 자신이 무엇을 잡아먹거나 말을 할때, 이만한 거리감을 갖고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게 된다면, 악어들은 우리 사람들에 비해 굉장한 객관성을 갖고 본인의 행위를 의식하며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거짓된 말을 하거나, 쓸데없는 말, 사악한 말을 하다가도 절로 수치스러워져서 그만두게 되지 않을까? 나도 입이 저만치 쯤에 달려있어서 그런 객관성을 갖고 스스로를 관찰, 비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밀고 들어가는 무게에 탄력을 받은 물결의 저쪽은 또 다른 풍경이다. 물결의 주름이 탄력을 받아 타이트해지면서 연상되는 장면은 이미 종로의 주단집에서 멀리 떨어져, 한 부페 테이블 디져트 코너의 젤로 접시이다. 쓸어내려간 칼 자국이 은근히 남아있는 잘려진 젤로의 탱글한 단면은 언제나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데, 탄력받은 수면의 모습은 딱 aqua mint 맛 젤로의 단면처럼 보인다. (그런 맛의 젤로는 있지도 않지만!) 누군가의 결혼식 피로연의 어수선함 속에,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은 채 부페 테이블 초록빛 젤로에 발이 붙어버려 사투를 하고있는 파리 한 마리처럼, 아쿠아 블루색의 거대한 젤로 표면에서 하염없이 헤엄치며 상상을 하고있는 조그마한 '나'라는 생물을 멀리서부터 지극한 관심으로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나'는 마치 google earth로 지구의 미국의 LA의 내 로프트 주차장에 세워진 내 차의 오른쪽 면의 scratch 까지도 다가들어 보듯, 우주의 저쪽으로부터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관찰하고 있는 '나'가 관찰 대상이 되고있는 '나'의 엄마요, 창조자요, 근원인 것처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살갗은 prune처럼 쪼글해지고, 드디어 고개를 들어 찬 공기를 마셔볼 때면, 수면에서 사알살 올라오는 수증기가 달콤한 피로감을 상기시켜준다. 다시 고요해진 내 독탕의 푹신한 물결을 보료삼아 가벼이 드러누워 팜트리 사이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별 하나 별 둘을 헤어볼 때, 문득, 이쯤 되면 아까 바람결에 날라와 물 위에서 뱅그르르 노닐던 꽃잎과 내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해진다. 그러다가 별 사이로 비행기라도 수욱 지나가면, 그것으로 이젠 물에서 나갈 시간이라는 신호인양, 아쉬움을 뚜욱뚝 떨어뜨리며 나는 부드러운 타올을 집어든다. 아, 야래향 꽃 내음이 내 머리카락을 흩어놓는다...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