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뭐라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98년. 미국 HBO는 이름부터 발칙한 어떤 드라마 한 편을 내놓았다. 이후 샬롯 역의 크리스틴 데이비스가 “처음엔 누군가 제목을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꺼려졌다”고 털어놓았던 이 시리즈의 이름은 바로 ‘섹스’ 그리고 ‘시티’다.
‘토종 캐리들’의 험난한 길
6년을 히트 속에 장수한 는 여성들의 성과 사랑에 대한 전세계적인 인식변화를 불러왔다. 그리고 21세기의 시작, 혹은 케이블 시대의 도래와 함께 한국에까지 밀어닥친 열풍은 종영 후 지금까지도 수많은 ‘한국계 이복자매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김삼순, 최미자, 고병희, 오달자 혹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토종 캐리들’은 혼기 넘은 처자로서의 결혼과 사랑, 섹스에 대한 고민에 한국 사회라는 무거운 보따리까지 떠안은 채 서른 혹은 그 이상의 험한 산길을 헤쳐나가고 있다. 한국의 캐리들은 마놀로 블라닉 대신에 카메라를 들고 특종을 향해 돌진하거나, 촌스러운 이름을 가슴팍에 달고 빵을 굽는다. 삼류 성인잡지 기자라는 굴욕에 찬 삶도 모자라 한참 어린 친구 동생과 엮여버리는 얄궂은 상황에 처하고, ‘삘’과 ‘운명’을 찾느라 20대를 허비하고 서른둘에 스물네 평짜리 전세 아파트와 결혼해 “믿을 건 돈뿐!”이라며 계약직 애인을 고용한다.
캔디와 실장님의 시대는 가고물론 한국드라마가 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은 이전에도 있어왔다. 김희애, 김혜수 등이 출연한 1989년 작 나 이미숙, 고현정이 등장한 1993년 작 등은 한국 사회에서, 도시에서, 여자로서,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좀더 내밀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적 ‘낮은 목소리’였다. 여전히 90년대 드라마는 ‘캔디’와 ‘실장님’들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김희선 드라마’로 대표되는 트렌디 드라마들은 도시 남녀들의 연애사를 감각적인 영상 속에 풀어내느라 정작 그들의 진짜 관계나 고민들까지 들어줄 여력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98년, 와 같은 해에 방영된 이영애, 추상미, 김민의 나 이미숙, 김원희, 이나영, 윤해영의 등은 비로소 결혼과 사랑, 동거나 이혼 혹은 섹스에 대해 예전보다는 ‘높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른셋의 건강한 싱글 여자를 TV에서 만난다는 것그리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지난 2000년 온미디어와 손잡은 HBO가 한국 상륙의 메이저 군함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였다. 국가를 초월해 가장 격렬한 공감과 동경을 얻어낸 이 웰메이드 드라마는 이후 일련의 한국 드라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온스타일’ 이라는 라이프스타일 채널의 성공에도 큰 구심점이 되었다.
이후 2004년 작 가 의 캐릭터 배치나 구성 등에 빚을 지고 있다면, 이듬해 은 가 전세계적으로 변화시켜놓은 여성 캐릭터에 대한 가장 한국적인 대답이었다. “서른셋이고 싱글이고 건강한 여자.” 그 이름도 토속적인 김삼순은 거의 처음으로 정신적, 육체적 한국 표준여성을 드라마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여기에 미국 드라마에서 흔적을 찾기 힘든 가족이라는 존재를 더하며 좀더 윤기 있는 드라마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또한 영화로도 리메이크되었던 는 ‘남녀 주인공과 스토리 중심’의 미니시리즈가 빠지곤 했던 함정을 일일시트콤이라는 경쾌하고 여유 있는 틀 속에 모든 캐릭터들에게 공평한 살을 붙이며 피해나갔다.
우리들의 섹스와 정면으로 마주하기
최근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방영 중인 tvN의 의 성취라면 이런 지난 언니들이 알아도 못했던 것들을 과감하게 보여줄 수 있는 ‘케이블’이라는 채널의 선택이다. 그간 공중파 드라마에서 등장한 베드 신은 관계의 시작을 알리거나, 아름다운 로맨스의 보조수단으로 사용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가 선택한 케이블이라는 공간은 그간 많은 국내 로맨스 드라마에서 거세 혹은 은근히 억압되어왔던 ‘섹스’ 라는 남녀 관계의 정수와 두 눈으로 똑똑히 마주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물론 삼순이나 달자가 내뱉는 “너무 많이 굶었다”거나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남자가 고픈 거야” 등의 대사들은 그 친근한 질퍽함으로 구체적인 섹스 신을 대체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여자들이 침대 위에서 솔직하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과연 제대로 발기나 할 수 있을까?” 같은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고 가는 의 카메라는 더 이상 포개진 4개의 발들로 시선을 내리지 않는다. 침대 위의 연인들을 정면으로 훑는 이 구체적인 행위의 전시는, 이제 섹스로 접어들었겠지, 라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 장면을 목격한 후 시청자들은 섹스 후에 곧잘 튀어나오는 감정의 극단, 즉 집착이나 실망 혹은 충만감이나 행복감에 대한 강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배가시킨다. 결국 과거의 공중파 로맨스 드라마가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짜내야 했던 수많은 관계의 헛소동을 비로소 피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는 손쉽게 ‘왕자님’ 혹은 ‘폭탄’ 등으로 이분화되었던 남자 캐릭터의 종합전시장으로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 드라마는 매회 매회 “걸쭉해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진국’들의 다채로운 퍼레이드를 선보인다. 여관비 같은 데 왜 돈을 쓰냐며 ‘가정식 섹스’를 강요하고, 월급 탄 기념으로 애인 선물 대신 자신을 위한 새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하며, 직업 없이 부인에게 기대어 살면서도 뻔뻔하게 큰 소리를 지르는 “지 에미 애비도 못 바꾼 인간들”이거나, 자나깨나 몸만 달라고 조르거나, 첫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혀 현재를 망치는 그런 남자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이 진짜 한국남자들의 실체!”라고 르포 프로그램 기자처럼 보도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간 ‘왕자님’ 이란 동경 속에 오해되어왔던 그들의 실체를 바라보는 순간 분노보다는 연민을 느끼는 기이한 감정으로 인도한다. 아, 이 찌질한 것들, 너희도 우리만큼이나 한심하고 불쌍한 존재들이었구나.
따라잡기, 뛰어넘기
물론 성공한 언니나 부모는 언제나 자매와 자식들에게 가장 좋은 표본인 동시에 가장 높은 허들이 된다. 이후의 한국 여성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이 천편일률적으로 읊조리는 내레이션 기법은 그들의 근원이 캐리였음을 드러내는 명징한 꼬리뼈다.
이런 직접화법은 작가의 의도를 시청자들에게 가장 오해 없이 전달하는 빠른 장치기도 하지만 사건과 캐릭터의 느슨한 연결고리를 교묘히 덮어버리면서 게으른 창작을 낳기도 했다.
또한 캐리, 사만다, 미란다, 샬롯이라는 캐릭터의 원형은 꽤나 안전한 틀이기도 하고 동시에 발목을 잡는 덫이기도 하다. 의 승리(변정수)나 의 윤아(오윤아), 의 수연(고다미)처럼 어딜 봐도 사만다의 후예임이 분명한 캐릭터는 오히려 어딘가 발전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치거나 아예 박제되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선주(이혜영), 달자(채림), 영주(최정윤)처럼 ‘미란다형 사만다’나 ‘사만다형 캐리’ 혹은 ‘미란다형 캐리’처럼 하이브리드한 캐릭터들의 등장은 반가운 진화다.
늦은 밤, 의 재방송을 또 다시 넋을 잃고 보는 이유
패션은 가도 변하지 않는 것들‘운명의 남자’도 ‘곤경에 처한 나를 구해주기 위해 달려와 주는 왕자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체념하게 되는 나이,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쭈글쭈글해져만 가는 육신을 이제 ‘어디에 뉘와 함께 누일까’를 고민하는 그녀들은 어느 시대나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 그 이후의 드라마들을 맞이한 21세기 한국 여자들은 삶의 결론이 ‘결혼’만은 아니라는 쉬운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세상이 화성에서 온 여자와 금성에서 온 남자들의 전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은 아버지의 입을 빌어, 어린 애인의 입을 통해 “무엇보다 니 자신의 행복을 찾으라”는 위로를 듣게 되었다.
늦은 밤, 당신이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몇 번은 봤음직한 의 재방송을 또 다시 넋을 잃고 보는 이유는 더 이상 이국 도시에 대한 환상이나 네 여자의 화려한 패션쇼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어느덧 한국 도시 여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뉴욕의 그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고, 화면 속 명품구두들은 철 지난 트렌드가 되었다. 그렇게 공들인 메이크업과 아찔하고 독한 향수의 향이 증발되고 오롯이 남는 것은 성인의 여자들이 세상을 살며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관계와 삶의 고민이다. 그것은 종영 후 4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서 펄떡이며 여전히 ‘한국계 이복자매’들의 출산을 자극시키고 있다. 미자도, 삼순이도, 달자도, 영주도 그리고 나도 너도 우리가 아는 모든 여자들도 기다리고 있다. 더 진짜 같은 나를 그려주기를, 더 나 같은 그녀들이 태어나주기를.
(글) 백은하 una@t-fac.com ( 편집장)
(매거진t 블로그) 서교동 t 팩토리 바로가기 (http://blog.naver.com/magaz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