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대통령 꿈꾸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그는 가냘픈 이미지로 ‘鐵의 여인’을 꿈꾼다. 국정운영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이라며 아버지가 그린 현대사에 사과하면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뀌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박근혜 전 대표의 달라진 모습. ■ 삶이 곧 한국 현대사… 아픔 안고 정치에 입문
■ 집과 사무실 전화로 소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워런 버핏의 후계자론에 부족함이 없는 지도력 갖췄다
■ 인기에 연연하는 정치인은 leader 아니라 follower!
■ ‘신뢰받는 모범적인 딸’… 유연성 갖추는 게 과제
과거 체제의 수혜자들이 등을 돌리고, 동생들은
각기 충격 속에 방황했다. 특히 맏이로서 동생들의
방황을 지켜보는 심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쉰다섯 해의 인생 역정이 그대로 한국 현대사라고 불 리는 한 여인이 있다. 그는 6·25직후인 1952년, 군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인 19 61년, 소장으로 진급했던 부친은 혁명을 일으켜 정권 을 잡았고, 그 후 두 해 만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청와대로 거처를 옮긴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개헌을 거듭하며, 18년 동안 이 어지는 장기집권을 했고, 그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청와대 안에서 부러울 것 없는 ‘영애’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청와대 생활은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1974년 어머니가 제일교포 테러리스트의 총탄에 세상을 떴다. 유학 중이던 프랑스에서 어머니 유고 라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당시 그의 나이 22세. 빈 영부인의 자리를 메우기에 는 어린 나이였지만, 맏이로서 어머니를 동경하면서 자란 그는 평소 보아왔던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 영부 인 대리 역할을 수행해냈다. 영부인 대행 5년을 넘기 던 해인 1979년, 아버지마저 부하의 총탄에 절명했 다. 아버지 서거 이후 정권은 수양오빠와 같았던 합 수부 사령관에게 돌아갔다.
27세의 나이에 청와대를 떠나 사저로 돌아온 후 펼쳐 진 세상은 오랜 세월 그가 철석같이 믿고 살아온 그 세상이 아니었다. 정권의 종식과 함께 시작된 과거 청산의 열풍 속에서 ‘아버지의 역사’는 만신창이가 돼갔다. 과거 체제의 수혜자들이 등을 돌리고, 동생 들은 각기 충격 속에 방황했다. 특히 맏이로서 동생 들의 방황을 지켜보는 그의 심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이 시기 그는 어머니가 만든 육영재단 이사장직에 앉아 홀로 시류를 역주행하는 ‘투쟁의 행군’을 했다(이 행군의 정당성을 논하기 전에,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월 동안 개인적으로 겪었을 심리적 상처와 갈등을 기억해야 한다). 이 18년 동안 그는 아버지 후배 군인들에 이어 정적이었던 양 김씨가 차례대로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정치현장에 뛰어들었다.
청와대 생활 18년, 그리고 청와대 밖 생활 18년을 보낸 후인 1998년, 그는 그해 4월2일 치러진 15대 국회의원보궐선거(대구 달성)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넉넉하게 당선됐다. 이후 연이어 3선의 기록을 세우며 야당 대표가 됐고, 이제 2007년에 치러질 대권에 도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 박근혜. 이제는 자신이 대통령 자리를 향해 뛰는 대권주자가 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삶은 이렇게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일면 화려한 듯 보이지만, 이 세월 속에서 그는 스스로 “미치지 않고 산 게 버틴 것”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정도로 어려움 또한 겪어왔다.
역사적 판단은 일단 접어두고,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 가냘픈 몸매를 지닌 그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이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심정이 생기는 것은 이런 삶의 곡절을 알고 있기 때문일 듯하다.
‘그동안 잘했다’는 응답 상승 추세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묶인 그의 삶은 이미 오랜 세월 대중에게 노출돼왔다. 다른 대선 후보들과 달리 그의 성장사는 더 이상 궁금증의 대상이 아니다. 특별한 날을 잡지 않으면 자택을 공개하지 않을 만큼 사생활을 철저하게 지키는 정치인으로 알려진 박 전 대표지만, 어쩌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간의 과도한 노출에 대한 보상심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번 취재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는 아직도 휴대전화를 갖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수행비서의 휴대전화가 있다지만, 정치인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는 정계 진출 이후에도 “집에서는 집 전화, 사무실에서는 사무실 전화면 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대권 주자라는 대중성과 개인생활의 폐쇄성, 극단의 양면을 지닌 그는 사회적 통념을 깨는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채 오늘 이 시대와 호흡하며 살아간다. 2002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나라당 대권 주자 자리에 도전하는 그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맞대결을 벌이며 상위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갤럽에서 지난해 말 내놓은 ‘정치의식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밝힌 지지 사유는 ‘그동안 잘해서(10.7%)-국민화합/안정 기대(8.4%)-리더십(8.4%)-경력 좋다/경험 많다(7.1%)’ 등이었다. 라이벌인 이 전 시장의 경우 ‘추진력(33.4%)-경제성장 기대(12.9%)’ 두 항목이 56%가 넘는 절대적인 지지 사유를 차지하는 것에 비하면, 박 전 대표에 대한 기대는 큰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셈이다.
이 가운데 ‘경력이 좋다/경험이 많다’는 항목은 박 전 대통령의 딸로서 지낸 영부인 대행의 세월을 포함해 과거의 정치적 경륜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항목은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절대적 1위(16.9%)를 차지했다. 당시 ‘그동안 잘해서’라고 응답한 사람은 4.5%에 지나지 않았다.
‘경력이 좋다/경험이 많다’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그동안 잘해서’라는 답변 비율이 늘어나는 것은 흥미있는 변화다. 그가 부친의 후광을 입고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당 대표로서 독자적 정치력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확실하게 인기있는 정치인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다. 대중 연예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인기다. 하지만 이런 인기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성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만한 믿음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감성에 바탕을 둔 인기와 투표장에서의 행위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볼 때 ‘그동안 잘해서’라는 응답자가 늘어나는 것은 박 전 대표로서는 고무적인 현상일 것이다.
소리 없이 강한 ‘아버지의 딸’
박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데 대한 연민과 거부는 정반대의 감정 같지만 실상 모두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그 역시 부친의 신체적 유전자인 ‘진(gene)’과 정신적 유전자인 ‘밈(meme)’을 동시에 계승한 유일한 사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바로 다른 정치인과 차별화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이라고 굳게 믿는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wakins)는 저서 에서 문화의 전달은 유전자의 전달처럼 복제 역할을 하는 중간 매개물이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정보의 단위·양식·문화·요소를 밈이라고 했다.
밈은 생물학적 유전자처럼 모방을 통해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전달되며, 이 과정에서 밈은 변이 또는 결합·배척 등을 통해 내부구조를 변형시킨다고 했다. 생물학적 유전이 진을 통해 이뤄진다면, 밈을 통해서는 정신적 계승이 이뤄진다는 말이다.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이에 세 자녀가 있지만, 밈까지 계승한 사람은 그밖에 없다.
이런 그가 과연 격변의 한국을 이끌어갈 대통령감으로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세계적 투자가인 워런 버핏(Warren Edward Buffett)이 밝힌 후계자의 조건에 맞춰 ‘정치인 박근혜’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이 방법이 ‘박 전 대통령의 맏딸’ 이미지에 갇힌 그를 객관화시켜 보기에 적절할 것 같다.
버핏이 제시한 후계자의 조건은 ▷독립적 사고방식 ▷위험을 인식하고 피해갈 수 있는 능력 ▷감정적 안정 ▷인간과 기관의 행동에 대한 예리한 통찰 등이다. 이들 항목은 투자가로서 갖춰야 할 조건이기 때문에 국가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경제력으로 재편되는 국제정세를 감안한다면 미래의 지도자감을 골라내는 데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측면들임은 분명하다.
▶ 박근혜 전 대표가 조카 세현이를 안고 기뻐하고 있다.
이 작업을 위해 일단 박 전 대표를 지난 4월10일 사무실에서 직접 인터뷰했다. 또 그가 쓴 저서 (1998, 도서출판 부일) (1998, 도서출판 부일)과 인터뷰 모음집 (1990, 재단법인 육영재단)을 읽었다. 동생 박지만 EG 회장을 비롯해 많은 주변 인물도 만나봤다.특히 1974년부터 1998년까지 자신의 일기장에 쓴 글을 모아 놓은 책 는 그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한 사람이, 더구나 그처럼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기를 공개하는 데 담긴 함의는 클 것 아닌가? 이 일기는 그 자신이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관’을 알 수 있게 해줬다.
우선, 버핏이 꼽은 독립적 사고방식은 정치인의 주체성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포퓰리즘에 영합하지 않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문제다.
박 전 대표는 좀처럼 흔들림 없는 정신력을 가진 사람으로 ‘소리없이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중심에는 ‘아버지의 딸’이어야 한다는 정신적 가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아버지가 밤잠 설치면서 나라 살림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국정수업 철저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정신적 계승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흔들림이 없다.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것처럼 이미 가치관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1998년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권에 입성한 뒤 밝힌 당선소감은 “아버님이 못다 이룬 뜻을 이루기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말이었다. 정치적 계승자의 위치에 서겠다는 의중을 밝힌 것이다.
“인기만 좇으면 leader 아니라 follower”
이 말이 왜 나왔는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기가 있다. 저서 에 실린 1989년 11월 5일자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 그것도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고,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중략)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그 책임감이 나로 하여금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팔방미인 노릇을 하면 당장은 편할 수 있겠으나 사명 완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기에 나는 굳이 험한 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험한 세파가 나로 하여금 결국 내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선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기독교는 종교 박해 때문에 오히려 사방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현실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자꾸 활동의 폭을 넓혀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런 마음에 어떤 작은 변화라도 생겼는지 알아보고 싶어 질문을 던져봤다. 부친의 정치적 과오가 역사적으로 규명되는 부분, 예를 들면 인혁당 사건 재판의 재심 결과 등에 대해 현역 정치인으로서 직접 사과하고 나설 의향은 없느냐고 했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 시절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분들에게는 딸로서 공개적으로 여러 번 사과했다. 하지만 이 정권이 역사를 정치에 끌어들여 이용하면 안 된다. 그러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적 사실이 뒤바뀌게 된다. 인혁당 사건은 법원에서 두 가지 상반된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훗날 역사적으로 판단 내릴 일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결론이 나지 않은 일이라는 결의에 찬 말이었다. 그의 중심은 조금의 기울어짐도 없이 여전히 확고했다.
박 전 대표는 일기를 통해 이미 청와대 생활을 통해 20대부터 리더의 주체적 역할에 대해 고민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1980년 1월28일의 일기로, 그가 청와대를 나온 직후인 28세 때 쓴 글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흔들림 없는 정신력을 가진 사람으로 ‘소리없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중심에‘아버지의 딸’이어야 한다는 정신적 가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남이 하자고 하는 것만 하고, 인기를 얻을 일만 하는 사람은 leader가 아니라 follower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국민은 불안해서 follower를 믿고는 살 수 없다. 선견지명을 갖고 미리 판단해서 국가를 잘 이끌어주기를 바라기에 권한도 주고 권위도 부여된 것이다. 1급 비밀까지 모두 보고되는 이유도 정보를 많이 잘 듣고 판단해서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달라는 뜻에서다. 속도 없이 자비한 척하다 많은 사람이 도리어 희생된다.”
이 글을 보면, 그는 아직은 어리다고 할 수밖에 없는 20대 초반부터 영부인 대리로서 아버지 곁을 수행하면서 일찍 국가관이나 리더십에 눈을 뜬 것 같다. 그가 주체성이 강한 정치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고집스럽다’고 표현할 뿐이다.
이 고집으로 그는 2년3개월간 한나라당 대표직을 무난하게 수행했다. 2004년 초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주도해 역풍을 맞았고, 당 지지율은 7%대로 떨어졌다. 얼마 전 당 분열 상태를 보인 열린우리당 지지율보다 낮은 수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최병렬 대표가 자리를 내놨다. 2002년 대선 불법선거자금 수수문제로 ‘차떼기당’이라는 오명까지 듣고 있던 터여서 한나라당은 재기불능 상태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3월에 치러진 전당대회를 통해 그는 막판까지 몰린 한나라당 대표가 됐다. 그는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해 대선자금수사 종결 대가로 600억 원이 넘는 천안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기로 결정하고 천막당사로 자리를 옮기는 특단의 조치로 지지율 만회에 나섰다.
취임 한 달 뒤 치러진 17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뒀지만, 1년 후 4·30 재·보선에서는 한나라당이 대세를 뒤집었다. 국회의원 6석 중 5석, 기초단체장 7석 중 5석, 광역의원 8석 중 5석을 차지한 대승이었다. 이어 지난해 5·31 지방선거는 말할 것 없는 압도적 승리를 끌어 낸 후 선거 한 달 만인 6월16일 멋지게 당 대표직을 떠났다. 그가 취임할 당시 121석이던 국회의원 의석수가 127석으로 늘었다. 현재 한나라당 지지율은 50% 선에 머무르고 있다.
“강한 주체의식 때문에 유연성 떨어진다” 비판도
이 성과를 놓고 그녀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영국경제를 살린 마거릿 대처 전 수상과 같은 ‘철의 여인’임이 입증된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박 전 대표가 취임한 지 1년 정도 경과했을 시절인 2005년 말,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박 대표의 리더십은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위기 돌파를 위한 전략 전술을 구사하는 데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고 비판했다. 지금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당 지지율이 상승한 것이 물론 박 전 대표만의 공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급강하한 데 따르는 상당한 반사이익을 본 것도 사실이다. 박 전 대표가 2년3개월간 대표직을 수행하는 동안 열린우리당은 창당 이래 당의장이 아홉 번이나 바뀌는 혼돈 속에 있었다.
그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기 불과 두 달 전인 2004년 1월, 열린우리당은 김원기 초대 의장 체제에서 첫 전당대회를 통해 정동영을 당의장에 선출했다. 하지만 정 의장은 노인 폄하 발언으로 4개월 만에 사퇴하고 그 뒤를 신기남 당의장이 맡았다. 신 의장은 취임 두 달 만에 부친의 친일 전력 시비로 자리를 내놓았으며, 후임으로 들어온 이부영 당의장 역시 국가보안법 등 4개 개혁입법의 책임을 지고 4개월 만에 자리를 떠났다.
2차 전당대회까지 임채정 당의장이 두 달간 관리를 맡은 뒤 문희상 당의장이 선출됐지만, 두 번의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6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 뒤를 이은 정세균 의장은 2개월 만에 당정개편으로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갔고, 3차 전당대회까지 관리역으로 유재건 당의장이 44일간 재임했다.
2006년 2월28일 전당대회에서는 통일부총리에서 물러난 정동영 당의장이 다시 당선됐다. 그러나 5·30 지방선거 대패에 책임을 지고 석 달 만에 자리를 내놓았고, 후임으로 6월9일 김근태 당의장이 등장했다. 그 1주일 만인 6월16일 박 전 대표는 2년3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화려하게 대권 주자의 길로 들어섰다. 김근태 당의장도 당이 분열되는 상황을 겪으며 8개월 만인 지난 2월 전당대회를 통해 정세균 당의장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렇게 당의 간판인 의장이 자주 교체되는 과정은 열린우리당의 혼돈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한마디로 열린우리당 당의장은 박 전 대표에게는 대화의 창구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혼돈 속에서 박 전 대표는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자신의 위치를 잡아가는 행운을 안기도 했다.
“검증의 참뜻 훼손돼 안타깝다”
박 전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저력을 보였다. 2004년 총선에서는 전문가를 영입해 정책정당을 만들겠다며 당 대표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다. 비례대표직을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당 조직에 위임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도 ‘수첩공주’답게(메모를 열심히 해서 붙은 별명) 한 번 결정하면 끝까지 마무리 짓는 꼼꼼함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그는 “야당은 노선이 정확해야 한다. 야당이 국민과 약속한 법안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며 법안 통과 현황까지 진두지휘했다. 아직 계류 중인 택시 LPG 특별소비세 면제법안이 대표적 예다.
주체성이 강하다 보니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그가 한나라당 부총재로서 2002년 2월 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당총재이던 이회창 진영의 불공정 경선을 문제 삼아 탈당한 것이 대표적 예다. 당시 그는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11월 복당했다.
이 경력은 그에게 ‘자력으로 정치세력을 규합할 힘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 부분에 대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당시 당 개혁을 위해 제왕적 총재직 폐지와 당권·대권 분리, 상향식 공천제도 도입, 당 재정 투명화 등 1인 지배체제 청산을 지도부에 요구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탈당했다. 나중에 이들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져 복당한 것이다. 내가 대표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 명도 탈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선거 때마다 의원 수가 늘어났다.” 완강한 항변이었다.
“검증의 참뜻이 훼손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나라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본선에서 경쟁력이 높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 저든, 누구든, 검증을 피할 수는 없다.”
버핏이 지적한 후계자론의 두 번째 항목은 위험을 인식하고 피해갈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정치적 판단력에 대한 부분으로 연결될 수 있겠다. 특히 위기 때 판단력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그가 대표로 재직하는 동안 최대의 위기는 재임 중 최대 위기였던 행정수도특별법으로 인한 당내 내분이었다. 가라앉히는 과정에서 그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처신했다.
충청도 지지기반을 의식한 한나라당은 이미 행정수도 이전에 관해 당론으로 찬성하는 입장임을 공표한 처지였다. 노 대통령이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2004년 1월16일 공포하고 4월17일 발효시키자 당은 수도권을 사수하려는 수도권지역 반대파 의원들과 충청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이전 찬성파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시작됐다. 급기야 2005년 3월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가 “행정도시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사법을 두 달만 연기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수락했다”는 빅딜 설을 거론함에 따라 당내 갈등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가장 의심을 받은 사람은 바로 ‘과거사’와 직결돼 있던 박 전 대표. 그는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보였지만 소장파들이 7월부터 당 혁신안을 들고 조기 전당대회를 소집하며 사실상 박 전 대표에게 퇴진하기를 압박했다. 이에 그는 “전당대회 날짜를 결정하면 물러나겠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박 전 대표가 일전불사의 각오를 드러내자 측근의원들이 강경하게 동조함으로써 내분은 수그러들었다.
2002년 그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 대표로 활동하던 시절,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제의를 받고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것도 정치적 판단력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듯하다.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한 상태에서 당을 제대로 꾸리지도 못하고 있던 박 전 대표는 사실상 대북특사의 자격으로 방북하면서 다시 뉴스의 초점에 섰다.
보수 정객인 그가 DJ의 제의를 받고 방북길에 오른 데 대해 보수진영의 비판이 만만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버지 시절 이뤄졌던 7·4 남북공동성명을 바탕으로 한 통일정책을 내세우는 그가 아버지의 상대였던 김일성 주석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것은 심정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통일문제는 차기 대권주자들이 내공을 쌓아야 할 필수 과제다. 박 전 대표의 방북과 김정일 면담은 냉전시대의 희생자이면서도 통일에 관해 유연할 수 있음을 내보인 정치적 파격 행보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박 전 대표의 정치적 판단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최근 논란이 되는 ‘대선 주자 검증론’이다. 당 밖에서 제기할 싸움을 내부에서 먼저 거론함으로써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목이기도 하다.
박 전 대표의 검증론 제기 후 당 안팎에서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한 폭로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 전 시장에 대한 지지율도 변함없으며 그 자신도 별 이익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그는 원칙론자답게 조금도 뒤로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검증의 참뜻이 훼손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나라당이 정권교체에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서는 본선에서 경쟁력이 높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 저든, 누구든, 검증을 피할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후보를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했다가 후보 개인의 문제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바른생활 소녀’로서 철학으로 정치 다시 보기
세 번째 항목은 감정적 안정이다. 지난해 지방선거 유세 열하루 전인 5월20일 피습사건 당시 그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으로 대처함으로써 유권자들의 지지와 동정을 응집해 한나라당의 대승을 끌어냈다. 감정적으로 안정돼 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이 한 사건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그가 얼마나 냉철한 사람인가를 설명해주는 또 한 가지 사건이 있다. 부친이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저격당한 1979년 10·26 직후 새벽, 관사로 달려온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첫 말이 “전방은 괜찮으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부인 대행이라는 주요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고 해도 20대의 딸이 아버지의 유고 소식을 듣고 이런 말부터 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 1 성심여중 시절 학교 체육대회(1966년)에서.
2 주한 외교관 행사 참석(1979년 10월11일).
3 오래전부터 테니스로 체력을 다져온 박 전 대표.
4 여름 휴가지에서…(1977년 8월6일).
인터뷰차 만난 김에 그에게 그 사유를 직접 물어봤다. 돌아온 답은 “당시 무장공비가 청와대 500m 앞까지 쳐들어오던 시절이었다”며 “국가안보가 DNA처럼 피 속에 박혀 나온 조건반사적 이야기”라고 했다. 그가 얼마만큼 정신적으로 강하게 훈련돼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아버지이며, 인생의 거인은 부모님이다. 자신이 품은 강철 같은 감성이 ‘역사적 계승자’의 사명감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가 이렇게 심리적으로 강한 상태가 되기까지 어떤 요인들이 작용했는가를 알려면 그의 두 가지 내면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부모로부터 신뢰받는 모범생 맏딸로 성장한 청와대에서의 20대 초반까지 시절과 아버지의 서거 이후 사저로 돌아와 주변 사람들의 배신을 경험하며 가슴에 응어리를 맺는 2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의 시절이다.
▶ 1 대한적십자사 수요봉사회 참석(1978년 2월8일).
2 새마음의 길> 출판기념회(1979년).
3 산업공단 시찰(1978년 6월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