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1 : 누구나 한번 쯤 생각해 봤을 만한 것. "내가 우리 부모님의 장점만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는 "내가 생각하는 장점만 가지고 우리 아기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디어 2 : 머리카락 한 올만 가지고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알아낼 수 있다면. 주민등록증이며 요즘 말이 많은 전자 주민카드 같은 것도 필요가 없을 텐데.
가타카(Gattaca)는 이 두 가지 아이디어라는 유전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그리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닌 듯 하다.
SF영화가 꾸준히 다루어온 문명 비판(또는 과학기술 비판)이라는 주제를 유전자 조작에 의한 생명체(특히 인간)복제라는 최신 유행 소재를 가지고 풀어낸 이 영화의 배경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유전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가타카>에서의 미래 사회도 프리츠 랑의 SF고전 <메트로 폴리스>이래 꾸준히 등장하는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않다. 과학적인 기준에 의해 인간들이 등급 매겨지고, 그것을 통해 인간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회. 인간은 한갓 그것의 톱니바퀴일 뿐인 사회. <가타카>의 주인공 제롬(Ethan Hawke분)은 이러한 전체주의 사회가 휘두르는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이에 반기를 든(그리고 들 수 밖에 없는)반항아다.
하지만 제롬은 기존 SF영화의 주인공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전체주의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의 신분 상승을 위해 싸운다. 부모의 '자연임신'에 의해서 태어난 제롬은 유전자 주문에 의해서 '생산'된 아이들(이름하여 '적격자')과는 섞일 수 없는 신분(이름하여 '부적격자')도 함께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왜 그렇게 거기에 집착하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우주 여행이 일생일대의 목표인 제롬은 우주 항공 회사인 <가타카>에 입사해서 우주 항해사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일은 고작해야 청소부 정도다. 하지만 적격자인 그의 동생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했던 제롬. 그는 꿈을 가로막고 있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적격자의 유전자를 구입해 신분을 위장하는 '유전자 구입'의 감행하게 된다.
영화가 여기까지 진행될 때까지는 주인공이 일사천리로 줄거리를 줄줄 읽어내리는 것 같긴 했어도 그래도 괜찮았는데, 그 다음부터 영화는 슬슬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한다. '유전자 구입'이라는 것에 뭔가 치밀하고 기발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예상은 오산이었다(그 뒤로도 많은 '오산'을 하게 된다). '유전자 구입'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적격자의 피, 소변, 머리카락 등을 사들이는 것. 사들인 '물건'들을 신분검사 할 때 슬쩍 바꿔치기 하는 것이 '유전자 조작'의 전부이다. 물론 신분을 판 사람-진짜 제롬(Jude Law분)-은 조용히 죽어지내줘야 한다.
유전자 조작 덕분에 승승장구하던 제롬은 우연한 살인사건으로 가타카 내부에 부적격자(물론 그는 제롬이다)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추격을 당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타카의 동료인 미모의 여성 아이린(Uma Thurman분)과 사랑에 빠지면서 우리의 주인공은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된다.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려하고 형사들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그의 뒤를 추적하는데, 이 대목에서 긴박한 서스펜스가 느껴져야 하겠지만 필자는 아쉽게도 '좀 심각한 <투씨>'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짜 제롬과 진짜 제롬은 좌충우돌하며 아슬아슬한 사기극을 위태롭게 끌고가고, 감독도 함께 좌충우돌한다. 성서의 한 귀절과 함께 장엄하게(?) 시작한 영화는 어느덧 어정쩡한 서스펜스로 변해버린다. 여기에 별로 설득력 없는 로맨스가 가세하면서 영화는 더욱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도대체 무슨얘기를 하고 싶은거지?).
어느덧 영화가 결말에 다다르면서 준비된 해피엔딩을 위한 반전이 툭 던져진다('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리고 주인공은 꿈을 이룬다. 비록 진짜 제롬은 가짜 제롬의 꿈을 위해 장렬하게 사라져갔지만. 마지막 10분 정도에서 영화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그동안 내내 잊고 있었던 엄숙함을 다시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관객은 엉뚱함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전체주의에 대한 반란도 아닌) 신분 상승을 위한 시끌벅적한 사기극을 축복할 수 있도록 마련된 신체검사관의 기구한 사연과 진짜 제롬의 희생도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 이 대목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알겠는데, 정작 무엇에 감동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난처함만을 안겨줄 뿐..
좀 심하게 말하면, <가타카>는 시작과 끝에 주제를 친절하게 요약정리를 해주고, 그 사이에서는 전혀 엉뚱한 얘기만을 하는 '주제 따로, 내용 따로' 영화의 전형과도 같았다. 영화라는 것이 우리가 초등학생 시절에 보던 '표준전과'같아서는 곤란할텐데.. 뤽 베쏭도 <제 5원소>에서 비슷한 실수(?)를 했었지요.
하지만 이 영화도 <제 5 원소>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감독은 CF감독 출신답게 감각적인 영상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키에슬롭스키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특히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을 촬영한) 촬영 감독은 멋진 그림들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특히 필자는 개인적으로 의상이 꽤 마음에 들었었는데(Uma Thurman의 제복 등) 의상을 맡은 사람은 팀 버튼 감독과 함께 작업해 온 사람이라고 한다 (<화성 침공>에서 기괴하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던 '머리 큰 외계인 여자'의 의상을 만들어냈던 솜씨.. 생각나시죠?)
그리고 두 주연 남녀 배우들도 좀 맹해보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두 배우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좋아하실지도 모르겠네요(팬 서비스의 차원인지 Ethan Hawke의 누드신(?)도 있다.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우리 영화에 소위 '소재주의'가 병폐로 지적되면서 말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병폐는 아직도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고, 우리 영화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독특한 소재와 근엄한 주제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발명품 전시회도 아니고, 목사님의 설교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