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강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한다.
나 밖에 따로 주인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를 다루어야 하나니-
말을 다루는 장숫군처럼
몸도 고요하고 말도 또 고요하고
마음도 고요하게 그윽함을 지키어,
이미 세상일을 버린 사람은
(고요하고 복된 사람)이라 불리운다.
몸을 단속해 스스로 경계하고
안으로는 마음을 깊이 파고 들어가,
항상 혼자서 진리를 생각하면
그 사람은 즐겁고 편할 것이다.
--- 태허 스님
법어 --- 무진장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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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보면 없을 무(無)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없다는 소리가 아니지요.
아니라는 소리도 있다는 겁니다. 의 무(無)는 전부가 비판입니다. ---
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란 말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색(色)이란 것은 현상적 세계를 말하고, 공(空)이라 정신세계를 뜻합니다.
이 현상적 세계와 이상적 세계를 합친것이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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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사람들이 하루종일 반야를 외워도 자성반야를 모르면,
밥을 말하고 있되 배고픈 것과 같다고 했어요. 입으로만 말하는 밥은 배부를 수가 없지요.
입으로만 진리를 말하면 만겁의 세월이 흘러도 견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도록 우리 불자들로부터 열심히 수행정진해야 합니다.
“마음이 어리석은즉 사바세계요, 마음을 깨달은즉 이상세계다.
마음이 삿된즉 사바세계요, 마음을 바로하니 이상세계다.” 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나는 것이지만,
스스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심성이 천박해 질 수도 있고 고귀해 질 수도 있습니다.
지혜롭게도 되고 마냥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우리의 심성에서 나옵니다. 천당 지옥이 우리들의 심성가운데 있어요.
극락이니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이 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면
늘 행복하고 안락할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가장 으뜸가는 태도는 물처럼 사는 거라고 말합니다.
물이라는 것은 대단히 유연합니다. 내가 서 있는 발바닥 밑 지하를 흐르고 있지만
그 물은 만물을 길러냅니다. 모든 생명은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가장 낮은 곳을 흐르지만 만물을 길러내는 물처럼 유연하면서
또 겸손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물은 생명을 길러내지만 내가 기른다 공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나는 불자 여러분들이 물처럼 겸손하며 포용력있게, 그리고 고요를 즐기는 사람으로,
마음을 잘 쓰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고요한 시간을 갖기 어려워요.
고요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불법도 알기 어렵습니다.
물이 고요할 때는 하늘의 달 그림자가 선명히 나타나지만
물이 흔들리면 달 그림자는 이그러져 보입니다. 마찬가지예요.
마음이 흔들리면 객관적인 것을 판단하는 지혜가 나올 수 없습니다.
마음이 고요할 때만 판단이 바로 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6월 28일 [오늘]
1577년 독일에서 태어난 스페인의 화가 루벤스 태어남
[Peter Paul Rubens, 1577.6.28-1640.5.30.]
1712년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룻소(1712-1778) 태어남
"인간은 나면서부터 온갖 곳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연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이다."
"Man is born free, and everywhere he is in chains.
Nature never deceives us; it is always we who deceive ourselves."
1904년 덴마크의 노르게호, 스코틀랜드 록콜섬 근해서 조난, 620명 사망
1933년 海岡(해강) 金圭鎭(김규진) 입적
'다만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알뿐 인간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한다.'
岩竹倒添永水碧 바위틈에 늘어진 대나무가 물빛을 더욱 푸르게 하고
渚蘭樂揚夕陽紅 물가에 핀 난 꽃은 붉은 석양에 한들거리네
1947년 파키스탄, 인도와 분리 독립을 결정
1950년 북한인민군, 서울 점령,,, 한강인도교 폭파
1958년 제6회 스웨덴월드컵서 브라질 우승, 펠레 일약 스타로 부상
1967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병합
1970년 대한불교 관음종, 서울 숭인동 妙覺寺(묘각사)에 교정원 건립
1970년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어방송국 개국
1974년 현대조선, 울산조선소에서 -26만톤급 유조선 완공
1974년 국방부, 해경 초계정(승무원 29명) 동해 휴전선근방서 피격 침몰 발표
1976년 세이셸이 영국의 통치로부터 독립
1976년 실론 독립. 국가명을 스리랑카로 명명
1977년 울릉도에서 처음으로 교통사고 발생
울릉도에 자동차가 상륙한 지 6개월 만인 1977. 6.28에
처음으로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1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1980년 체신부, 컬러 TV방송의 방영방식을 NTSC로 확정
1985년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 국내 첫 발생
1995년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박용길 이사장 방북
1997년 대구 파계사, 국내 최초의 계율전문도서관 毘尼藏(비니장) 낙성 현판식 거행.
38평 규모에 5천여 권의 계율관련 도서 비치
2001년 미국 항소법원,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명령은 무효라고 판결
2003년 서기7세기 추정의 마애불상 발견
....... 모든 종교가 다 선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이 스스로 사람들에게 고하며,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벌하는 유일한 종교가 있다는 것인가?
만약 후자일 경우, 하느님은 그 단 하나의 진정한 종교를 인정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는 어른이나 아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도,
유럽 사람이나 인도 사람도, 또는 아프리카 사람이나 야만인들도, 다 알 수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만약 그것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는 어떤 종교가 있는데,
어딘가에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어,
그 종교가 분명히 진실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면,
그런 종교의 신은 가장 냉혹하고 사악한 폭군임이 틀림없다.
내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는 것은
저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이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말의 진실성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증명은 본질적으로는 내 이성의 증명에 지나지 않으며,
하느님이 나에게 진리를 인식하라고 준 자연적인 방법에
무슨 별다른 것을 보탠 것은 결코 아니다. 진리의 사도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어떤 사항을 나에게 말하려 하는가?
“하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계시를 믿도록 하라.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위대한 말이지만, 하느님은 도대체 누구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혀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데.
“하느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말을 너에게 전하도록 위임하셨다.”
좋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나에게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해줄 거라는 얘기로군.
그보다는 하느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해주시는 게 더 좋을 텐데.
하느님으로서는 그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고, 나도 속을 염려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자신의 사도들에게 위임하여 자신의 말의 진실성을 증명하고 계신 것이다.”
그게 어떤 위임장인데?
“기적에 의한 위임장이다.”
그 기적은 어디에?
“책 속에 있다.”
누가 그 책을 만들었지?
“인간들이다.”
누가 그 기적을 보았지?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결국 또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나에게 말하는 것도 모두 사람이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어쩌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인지!
그건 그렇다 치고 어쨌든 점검하고 비교해보자.
아아, 하느님이 이렇게 귀찮은 일을 시키지 않아도 나는 열심히 봉사할 작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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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도대체 하느님은 무엇 때문에 마치 일부러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또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일부러 피한 것처럼,
자신의 말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데 다시 사람의 증명이 필요한 방법을 쓴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사 하느님은 그 위대함으로 인해, 한 인간을 골라 자신의 거룩한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삼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선택된 사람의 사명이 아직 확실치도 않은데 전 인류가 그에게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정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몇몇의 수상쩍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들이 사명을 받았다는 증거로 혀 모양을 한 불이라는
이상한 요술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소문을 통해 그 얘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일일까?
만약 일반 민중이나 일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보았다는 기적을 모두 옳다고 인정한다면,
세상에는 자연스러운 사건보다 기적이 더 많이 일어난다는 얘기와 다름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예지가 거기에 드러나는 사물의 불변하는 질서가
그처럼 많은 예외를 허용하는 것이라면 그런 질서를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며, 게다가 나는 굳게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토록 많은 기적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원래 자신들의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기적에 다시금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런 증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증명이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또 한가지, 만약 하느님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와 동시에 악마도 자주 그와 비슷한 짓을 한다고 말한다면,
아무리 증명이 잘 된 기적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파라오의 마법사들이 모세가 보는 앞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한 것과
똑같은 기적을 해보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모세가 없는 곳에서 자신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따라서 기적을 통해 가르침의 진실성을 증명할 경우,
악마가 한 것과 하느님이 한 것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가르침을 통해 기적의 진실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가르침은 성스러운 가르침, 신성을 갖춘 가르침이어야 한다.
그것은 신성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관념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가 신성으로 돌리는 특질에 걸맞은 도의상의 가르침과 법칙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무의미한 명제만을 제시해 보여준다면,
또 우리의 가슴에 이웃에 대한 혐오감만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화를 잘 내고 질투심이 많고,
복수심이 강하고 편애적이며, 인간을 미워하는 전쟁과 유혈의 하느님,
항상 사람들을 섬멸하고 분쇄하려고 벼르고 있는 하느님,
항상 고뇌와 형벌로 사람들을 위협하려고 준비하며,
죄 없는 자를 벌주겠다고 으르릉거리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라면,
나는 그런 하느님에게 마음이 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느닷없이 어떤 한 민족을 선민으로 결정하고 그 밖의 민족을 외면하는 신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아버지일 수 없고,
자신이 창조한 존재의 대다수를 영겁의 고통에 몰아넣는 자는,
나의 이성이 나에게 계시해준 자비롭고 선량한 하느님이 아니다.
신앙은 이해를 통해 더욱 확고해진다. 가장 좋은 종교는 가장 명료한 종교이다.
그 하느님을 예배하는 방식에 비밀이나 모순이 가득 차 있는 종교는
그것만으로도 나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은 나에게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이성을 부여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너의 이성이 날뛰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자신의 창조자를 모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루소 /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 중
제라늄-그대가 있기에 행복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