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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개신교인과 비판자 모두에게 ...긴글알러지 있는 사람은 패스

이강순 |2007.08.27 08:56
조회 2,085 |추천 53

들어가며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청준은 소설 속에서 말한다. 그 낙원은 ‘당신들의 낙원’이고 ‘당신들의 낙원’은 우리들의 지옥이라고. 그 말은 통곡이나 절규와도 같은 것이겠지만, 이청준은 울음조차도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우는 작가다. 그는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재봉틀의 국어방(김훈: <문학기행-소록도>(한국일보.1986. 8. 17)) .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평가다.

 소설 속에서 소록도는 천국이 되고자 많은 변화를 이룬다. 하지만 정작 소록도의 진정한 주민인 나환자들의 몸뚱이는 점차 없어져가고 그들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당신들의 천국은 말그대로 그들만의 천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환자들에겐 되려 끝없는 지옥이 되었을 뿐. 천국을 건설하려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의도가 전복되어 나타난 지옥만이 그들에게 할당되었다. 김훈은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청준의 소설은 대답한다. 진실로 인간이 너의 아픔과 나의 아픔을 일치시킬 수 있을 때, 자생적 운명의 뿌리를 함께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낙원 건설의 기초공사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은 모든 낙원은, 당신들의 천국이며, 동상(銅像)의 천국일 뿐이라고. <당신들의 천국>에서 그 3백여만 평의 비옥한 농경지는 나환자들의 차지가 될 수는 없었다. 명분만으로는 낙원은 건설되지 않는 것이다.]-출처, 김훈: <문학기행-소록도>(한국일보.1986. 8. 17)라는 평가를 내렸다.

 개신교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평가다.

 

 그들은 진정 자신의 종교에, 신앙에 열정적으로 임한다. 훌륭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여겨진다. 어떤 면에선 일견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의 그 열정이 때론 나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는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모습이 말이다. 또한 사회 곳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수많은 개신교인을 보면 정말이지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봉사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이 가진 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질 때도 있다. 물론 어린 시절 늘상 하던 불우이웃돕기, 구세군냄비에 내어졌던 어린 시절의 용돈 등은 나에게 거대한 보람으로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값지게 만들어줬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은 내게 들어온 일정부분의 금액을 청소년가장돕기나, 불우이웃돕기에 쓰고는 하지만 그때와 비교했을 때의 보람이 눈에 띄게 줄은 것은 아마도 내 자신이 몸으로 하는 봉사에 아직 활발하지 않은 것이 원인일 것이다.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활동이 나에게 아직은 많은 부분을 이루지 못함은 진정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그렇다. 그들은 훌륭하다. 휼륭한 믿음의 전도자들이다.

 

 그러나 항상 모든 집단이 올곧을 수만은 없다. 여기에서 개신교가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그들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처방전으로서 완전해지려고 한다. 개신교던 불교던 이슬람이던 그들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성으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비단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으며 누구나 겪고 있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오를 범한다. 과오에는 여러가지의 종류가 있다. 개인적인, 지극히 사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큰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반사회적인 것들도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반사회적인 문제가 개신교의 발등에 떨어졌다. 반사회적이라고 하면 비약일지 모른다. 그러니 말을 바꿔야한다. 그들의 '공존미숙' 에 할말이 생긴다. 그들은 공존논리를 계발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이 사회와 함께 있었지만 그들에게 이 세상은 마치 '그들만의 리그'같다. 그들은 바깥 세계와의 소통에 단절과 혐오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무자비한 '지옥행 열차 만원사례 만들기' 는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였다. 이것은 축적된 경험의 결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준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으로는 친일청산의 문제도 있다. 과연 얼마나 되는 인물이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지도자급의 인물로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행한자'에서 한국개신교는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자랑스러운 역사만을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역사가 자랑스러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제에 대한 우리나라 역사를 저항의 역사와 순응과 회절의 역사로 나누어 설명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만 치중해 순응과 회절의 역사는 가려져 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부끄러운 과거의 얘기도 역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과거의 부끄럽고 잘못된 역사를 밝히려는 것은 “역사라는 것은 고백”이라는 그의 생각 때문이다. 그는 특히 기독교인 입장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죄인 아니냐며 역사의 규명은 이것을 시인하고 나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죄인이라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하고 죄도 짓고 잘못도 하는 것인데 개인에 대한 죄는 기도나 교회 가서 고백하는 데 반해 역사에 대한 문제는 고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참회의 고백이 있어야 주님께 용서 받으며 더 발전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출처 방인성 목사 : 기독교 친일의 역사...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기독교, 정확히는 개신교의 정치참여 또한 위험하다. 대한민국은 신정국가가 아니다. 더구나 타 국가에 비해 종교의 다양성이 확실한 국가에서 하나의 종교집단이 정치에 무리하게 참여하려 한다면 이는 잦은 분쟁의 씨앗이 될 것이다. 자신들의 신앙이 종교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이명박 전 시장의 '서울시 공헌' 발언, 김수환 추기경의 '현 정권의 심판과 보수당 옹호' 발언들이 이어져.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들이 모두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에 강한 영향을 주는 오피니언리더들이기에 불붙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종교, 혹은 종교인의 모습은 국가가 종교에 영향력을 끼치려 했고, 그것이 정교분리 원칙에 위협이 되었던 과거의 경우와는 분명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출처: 한국 내 기독교의 정치참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최근의 그들의 행보는 너무나 위태롭다. 공존의 원리에 익숙치 않은 약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경제적으로는 이랜드사태와 같은 것이 개신교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 되고 있다. 여기에 성남시의 프로축구팀에 대한 몰이해...프로팀은 시민의 팀이지 개신교의 팀이 아니다.  도시가 자신들의 사유물이라고 여길 만큼 너무나 자만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각종 가정방문과 노상전도는 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큰 불편으로 다가온지 오래다. 거기에 최근에는 보다 격렬해지고 있다.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은 분명 다툼을 일으킨다. 분쟁의 씨앗이 된다. 지금처럼 법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학력이 높아진 사회일수록 개신교인들의 전도방법이 변했으면 좋겠다.

 

 -필자의 성향변화과정과 반성-

 

 나는 애초에 개신교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그저 성향의 차이만을 느끼고 있었을 뿐. 다만 노상전도와 가정방문에서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먹은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큰 관심이 있어서 역사적 관점에서도 바라보기 위해 애를 썼다. 또한 개인적으로 중간자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하기에 종교가 가진 교리를 전문적인 지식도 없는 내가 노크하고 비판 하기에는 불가능의 영역이라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들도 정확히 모르는 것을 문외한인 내가 건드린다는 것은 말그대로 철저한 배척정신으로 비춰질 것이라 여겼다.

 개인적으로 개신교의 폐단으로 느껴지는 부분을 몸으로 체험하였고 일부는 주변인으로 지켜보았다. 거기에 이번 아프간 사태를 보고 피부로 와닿았다. 그런 상황에서 비판적으로 개신교를 바라보되 비난은 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몇 가지의 댓글을 달았다. 물론 욕설은 없었다. 그들의 타종교 비방과 비난, 배타적인 전도활동과 성향, 타 세계에 대한 몰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적 열정을 이해 못하는 것을 탓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당신들의 종교적 열정이 아름답다면 타인들의 열정 또한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무엇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까. 그 점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내면에 체화되어있는 정신적부분이 다를 뿐이다. 세상에는 '다름이 있을뿐, 틀림은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 내면에서 절대적인 것을 누가 무어라 하는가? 다만 타인에게 그 절대적임을 강요하는 모습이 좋지 않다. 비판받아야 한다.

 개신교인들은 이러한 비판에 너무나 무섭게 대응해주었다. 각종 욕설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에 덧칠을 하였다. 그들은 모르는지 아는지... 그 덧칠이란 존중이 결여되어있었다. 나는 한번도 저질스런 욕설을 한 적이 없다. 어느 사이버세상에서도 네티즌의 익명성에 기대어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다. 맹세코 나는 당신들의 욕설에 욕설로 대응한 적도 없다.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정상적인 언어로 강한 어조의 비아냥을 시작했다.

 

 나는 애초에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개독'이란 말에 너무나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소 맹목적인 비판과 위험한 교리상의 논쟁이 야기되는 현실에 양자 모두에게 비판을 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순한 양같은 내 주변의 개신교인과는 달리 입에 걸레를 물었는지 양치를 수일간 하지 않아 치아를 방치했는지 모를 말들이 날아왔다. 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개신교를 개독이라 하던 사람들에게도 거친 말이 쏟아졌지만 그들에게 욕설은 없었다. 다만 거칠었을 뿐. 나는 그 정도의 단어들은 이해를 한다. 나도 그 정도의 거친 어조는 사용한다. 토론에는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연유로 온전한 비판자가 되었다. 중립자가 용납되지 않는 그들에게 나는 날선 비판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당신들과 같다. 너그럽지 못하다. 그럴수가 없었다. 너그러울 수록 달려들어 온갖 욕지거리를 늘어놓는 당신들에게 강해져야했다.

 

-반성-

 

 그러나 사과할 것은 하고 넘어가야겠다. 사실 개독이란 말 7번 사용했다. 당신들에게 욕을 먹은 이후에다. 하지만 그 점에는 진심으로 사과한다. '개독'이란 말은 정말이지 거부감 드는 말이다. 진심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 데에 사과를 표한다. 또한 앞으로 '개독'이란 말은 쓰지 않겠다.

 

 마지막

 

 당신들에게 개신교인의 문제는 늘상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당신들의 거대한 일부가 너무나 일상화 되어있다. 자신의 문

제는 스스로가 알기 어렵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분을 객

관적으로 평가하기란 '팔꿈치에 혀대기'만큼이나 불가능의

영역일 수도 있다. 부디 당신들의 거대한 일부가 이제는 인

정이 되어 자아비판을 통해 성장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지금의 무반성의 모습에서는 타 세계 사람의 누구도 개신교

로 변화하는 현실가능태를 선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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