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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이라는 이름의 신분증

김연주 |2007.08.30 15:42
조회 68 |추천 0
예전에 지하철을 탔을 때의 이야기이다. 열차가 정차하고 노인 한 명이 올라탔다. 노약자석에는 젊은 여성 한 명이 앉아서 졸고 있었다. 금방 승차한 할아버지는 그 여성을 무릎으로 툭툭 치더니 ‘일어나!’ 했다. 깜짝 놀라서 깬 여성이 무안해 하며 일어섰다. 노인은 일어서서 걸어가는 여자의 등에 대고 ‘젊은 것이 싸가지 없이...’ 했다. 여자는 얼굴이 벌개져서 무척 속이 상한 표정이었다.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오다가 분한 마음이 들었던지 ‘나이 먹어 힘들면 집구석에 있지 왜 싸돌아다녀.’ 하고 쏘아 붙였다. 여자의 태도도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나는 노인의 행동이 더 아름답지 않아 보였다. 자신이 누리던 미덕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화를 내는 것은 존경받을 태도가 아니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안하고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속으로 탓을 할 수는 있지만, 드러내 놓고 비난할 수 없으며 처벌할 수도 없다. 그것이 현대 사회이다. 도시가 커지고 사람들의 이동 거리도 멀어졌다. 젊은이들도 생존의 경쟁으로 인해 피곤하고 바쁘다. 자리에 앉아서 잠도 자고 싶고, 책도 읽고 싶다. ‘지금 탄 노인이 제발 내 앞으로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인 것이다. 그런 심적 불편함이 싫어서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 젊은이들은 지하철에서는 아예 앉기를 포기해 버린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칭찬하는 것이, 노인과 장애인, 임산부와 어린이 등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의 문화이다. 그런데 그들이 위와 같은 상황을 보고 듣게 될 때도 그런 칭찬을 할지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미풍양속을 불편해한 결과, 경로석을 따로 만들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젊은이들의 탓이라고만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아홉 번의 고마움을 잊고 한 번의 서운함을 나무라는 나이든 어른들의 무례함과 고마운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뻔뻔함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문화는 단지 ‘나이’ 때문이 아니라, 몸이 힘든 사람을 위한 사회의 배려이다. 나이가 많더라도 건강하고 젊은 외모를 갖고 있다면 사람들은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려’라는 본질은 없어지고 오직 ‘양보’라는 껍데기만 남았다. 우리 모두가 나이 많은 것을 마치 ‘특권’으로 오해한 결과이다. 특권을 강조하다 보니 ‘이익’만 남고, 존중과 배려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상명하복의 인간관계가 강하게 요구되는 집단에서는 언제나 ‘나이’가 중요한 서열 요소로 작용한다. 그래서 사관학교나 경찰대학 같은 서열학교는 신입생을 모집할 때부터 나이 제한을 둔다. 군대나 검찰 조직 같은 경우 자기 아래 기수(基數)가 자기보다 상급자가 되면 상위 기수들은 무조건 모두 물러나야 한다. 왜 이런 비생산적인 일이 벌어졌을까. 공적 영역에서조차도 ‘연령 고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다. 심지어 일반 회사들도 나이 제한을 두는데, 그것도 너무나 지나치게 나이 제한을 둔다. 졸업이 보통 2년 정도만 늦어도 들어갈 수 있는 회사가 거의 없다. 나이 제한이 단순히 업무 능력이나 신체적 건강 상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명하복의 문화에 걸림돌이 되는 ‘나이와 지위의 역전(逆轉)’ 문제를 사전에 막기 위함이다. 겉으로는 21세기적 사고와 실력 있는 인재 등용을 외치면서도, 사실 기업들 스스로가 고답적인 서열 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회사만큼 엄격하게는 아니더라도 정부 기관과 산하 단체들 조차도 채용 시 연령제한을 둔 경우가 많다.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중, 장년층의 재취업 욕구도 커져만 간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들의 채용을 극히 꺼려한다. 물론 나이가 들면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데 시간이 걸리고 업무 효율이 조금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중, 장년층에 대한 채용 기피의 가장 큰 이유는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을 직장 동료나 하급자로 대하는 것을 껄끄러워 하기 때문이다. 중, 장년 구직자들은 자신들도 젊은이 못지않은 능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나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고하(高下)’ 의식을 버리지 않는 이상, 직장에서의 중, 장년 채용은 먼 이야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중, 장년의 대표적 재취업 분야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파트 경비원’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경비원’이라는 말 자체와 ‘노인’이라는 단어가 조합 가능한 사회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지 의문이다.

경비 업무란 자기가 맡은 구역을 외부의 침입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야근을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위험 발생 시에는 상당한 순발력과 근력을 요한다. 주거 단지의 경우 각종 고된 잡무도 해야 한다. 주민들은 ‘경비원이 도둑은 안 지키고 매일 잠만 잔다.’며 투덜대고, 경비원들은 ‘돈도 쥐꼬리만큼 주면서 원하는 것만 많다.’고 투덜댄다. 결국 주민들은 돈 몇 푼 아끼기 위해 자기 지역의 안전을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는 샘이다. 그런데 이런 ‘박봉의 직업’에만 노인들이 내몰리는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봐야 한다. 노인들이 돈을 벌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명령을 내리는 일이 한국 사회에서는 결코 쉽지가 않다. 결국 나이든 사람을 대접하고 우대하기 위해 만든 ‘연령 특혜’가 오히려 나이든 사람을 가난하고 소외받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렸다.

대한민국에서는 ‘나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이’ 이상의 의미를 가질 때가 많다. ‘나이’가 하나의 신분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대한민국이라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고 값진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이런 중요한 일에서 나만 소외된다면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전 국민이 해가 바뀌면 다 똑같이 나이를 먹어야 한다. 생일이 되어서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고 남들 나이 먹을 때 같이 나이를 먹어야 손해가 없고 친구가 계속 친구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연령 계산법보다 한 살이 더해지는 우리의 나이 역시 '나이 먹는 일'을 중요시하는 문화적 문법과 관련이 있다. 또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말이 틀려지게 되고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하게 되는 ‘신분 제도’는 사실 ‘나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몇 살?'이라고 물어야 한다. 나이를 따져야 하는 상황은 일정 부분 한국인의 ‘언어 구조’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대하는 말이 분화되어 있고,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나누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이 나보다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부터 따져 보아야 하고, 공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나이’에 따라 상하 관계가 정해진다.

상하 관계가 정해져야 그 사람을 대하는 말이 정해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나이’를 따지는 것이 급선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이런 습관은 좀 지나치고 시대에 뒤쳐진 면이 있다. 일본어 역시 존대 표현이 발달한 언어이지만,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처럼 편집증적으로 나이를 따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공적인 관계에서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인들은 존대를 사용한다. 우리의 생활이 복잡해지고 분업화 되다 보니, 일상에서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을 더 많이 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성인이라면 나이를 불문하고 똑같은 인격체, 똑같은 사회인으로 대하는 것이 옳다. 나보다 열 살, 스무 살이 어리더라도 성인이라면 존대(尊待)를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다보니 토론을 하다가도 '뭐 당신? 당신 몇 살이야?'하고 싸우는 광고가 등장하는 대한민국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무에게나 하대(下待)를 하고, 아무 곳에서나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합리성만을 따지면 세상이 너무 각박해지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실 나이에 따른 존대와 하대야 말로 한국 사회를 더 딱딱하고 팍팍하게 만드는 주범인 듯싶다. 언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공기’와 같다. 언어가 인간관계의 분위기와 온기를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사적 관계에 있는 사람이지만 경어를 써야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알 수 없는 벽이 생긴다. 경어가 오히려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도록 만드는 장애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개인적으로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말을 놓는 사람이 있다면 좀 건방지고 무례한 사람이라 느끼게 된다. 나이의 많고 적음만으로 상대에 대한 높임과 낮춤을 선택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의 오랜 언어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기준으로 상하관계를 결정짓고, 공적인 영역에서조차 ‘나이’를 신경 써야 하는 습관은 이제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것은 하나의 인격체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사족입니다. 저의 글들이 다른 분들의 글보다 조금 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 글이 너무 길다고 불평하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호흡이 짧은 인터넷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편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글이 갖추어야 할 것이 핵심과 주제와 제목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각 대학들이 논술 분량을 원고지 1500 자에서 3000 자로 늘리는 이유를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너무 짧은 글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좋은 글로 제 주장을 말씀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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