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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트럭, 피자의 사탑, 날아다니는 냉장고, 리바운드하는 산... 이 많은 별명들은 모두 한 선수에게 해당하는 별명들이다. 그리고 이 선수에게는 'Sir Charles' 라는 칭호도 붙어있다. 냉장고와 Sir.. 웬만해서는 함께 소화하기 어려운 별명들인데, 이 선수를 이처럼 잘 표현한 별명도 없는 것 같다. 바로 찰스 바클리에 대한 이야기다. 바클리에겐 항상 불운한 2인자라는 말도 따라붙곤 한다. 물론 그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198cm의 키로 그만큼 다이나믹한 플레이를 펼친 선수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홀했던 자기 관리와 과장된 그의 가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뚱보 바클리의 성장기
바클리의 유년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바클리는 앨러바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여자와 재혼했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게된다. 불우한 환경이었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교육 앞에 바클리는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났고, 자신의 불행을 해소시켜줄 농구와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농구와의 첫 만남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바클리는 어렸을 때부터 대식가로 유명했다. 앨러바마의 버밍험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바클리는 1학년때 농구부의 문을 두르렸지만, 리저브 팀에도 끼지 못했다. 바로 그의 과체중 때문이었는데, 180cm도 안되는 바클리는 이 때 이미 100kg의 몸무게를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해 여름 바클리의 키는 192cm로 훌쩍 컸고 (물론 몸무게도 110kg으로 늘어났다) 바클리는 고등학교에서 주전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근데 바클리는 여느 다른 과체중 선수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바클리는 어떤 가드들보다도 빠르게 달릴 수 있었고, 어떤 포워드들보다도 높이 뛸 수 있었으며, 어떤 센터들보다는 파워 넘치는 골 밑 플레이를 펼쳤다. 그야말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던 것이다. 바클리는 고등학교에서 평균 19.1득점, 17.9리바운드를 잡으며 팀을 26승 3패로 이끌며 주 준결승까지 올려놨다. 하지만 바클리가 아무리 상식을 파괴하는 플레이를 보여줬지만, 대학 팀들은 바클리가 주 준결승전에 나타날때까지 전혀 바클리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다행히 준결승전에는 오번 대학의 소니 스미스 감독이 이었고, 스미스는 바클리의 플레이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뚱보... 바람 처럼 달리는데?"
뚱보가 됐건 어쨌건 간에 바클리는 스미스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오번 대학으로 리쿠르트됐다.
하지만 오번 대학으로의 진학이 바클리에게 꿈같은 NCAA 생활을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스미스 감독은 바클리를 대할때 비인격적, 강압적으로 농구를 시키려 들었고, 성격하면 둘째가라하면 서러운 바클리 역시 스미스 감독의 이런 처사에 감정으로 대처했다. 스미스 감독이 바클리를 상습적으로 구타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은 정확히 아는 내용이 아니니 일단 패스~! 어쨌든 바클리는 이런 생활 속에서 농구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해 팀을 무단으로 이탈했다. 바클리의 농구 인생이 끝나려는 순간 그의 어머니인 챠시는 아들을 설득해 다시 학교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바클리는 스미스 감독과 면담을 통해 서로의 오해를 풀고, 인간적인 대우를 해줄 것을 허락받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농구를 하게된 바클리는 금새 팀의 인기스타로 발돋음 했다. 과체중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그를 따라다녔지만, 그의 리바운드 능력이나 화려한 덩크는 최고의 화제거리였다. 'The Round Mound of Rebound" - 번역하자면 리바운드하는 작은 산 정도가 되겠지만, 그냥 리바운드 머신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괜찮을듯... / 라는 별명도 대학때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의 먹성에 대한 명성은 지금도 자자하다. 대학시절 근처 피자집에 '나 바클리다' 라고 하면 피자집에서는 다른 설명이 없어도 바클리의 방으로 라지 사이즈 피지가 3-4판씩 배달했다고 하고, 원정을 위해 버스로 이동할때는 페인트 통만한 아이스크림을 혼자 다 먹어치웠다고도 한다. 지금도 그의 먹성은 알아주는데, 최근 올스타전에서 바데트 주심과의 달리기 시합에서 소개됐던 바클리의 이름은 찰스 '크리스피 크림' 바클리였다.
어쨌든 바클리는 오번 대학에서 보낸 3년동안 평균 14.1득점, 9.6리바운드, 1.6어시스트, 1.7블록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고, NCAA 토너먼트에도 팀을 올려놓았다. 이런 활약 덕택에 바클리의 이름은 1984년 SEC 올해의 선수, 올-어메리칸 서드팀에 올랐고, 1984년 올림픽 예비 멤버에도 뽑히는 영광을 누린다. 하지만 바클리는 1984년 올림픽에서 뛰지 못한다. 이번에도 감독과 마찰을 빗은 바클리는 자기발로 대표팀을 나왔고, 감독 역시 바클리를 다시 대표팀으로 부르지 않았다. 1992년과 1996년 올림픽에 드림팀의 일원으로 뽑혀 금메달을 따내긴 했지만, 1984년에는 그냥 집에서 올림픽을 구경해야 했다.
명문 필라델피아에 드래프트 되다.. 그러나...
바클리가 드래프트된 1984년은 NBA 드래프트 역사 중 세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위대한 드래프트였다. 하킴 올라주원과 마이클 조던, 샘 퍼킨스, 케빈 윌리스, 존 스탁턴, 앨빈 로버트슨 등 유능한 선수들이 대거 배출된 해였고, 바클리는 전체 5순위로 당당하게 필라델피아에 지명된다. 필라델피아는 당시 줄리어스 어빙, 모지스 말론, 모리스 칙스 등 NBA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베테랑들이 있던 팀이었다. 그리고 1983년 우승을 차지한 멤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전성기가 지나간 선수들이기도 했다. 게다가 필라델피아가 성급한 트레이드로 팀 구성을 깨뜨리는 바람에 필라델피아는 한 순간에 우승 후보에서 그저그런 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도 첫 시즌 바클리는 신인으로써 좋은 활약을 펼친다. 136kg에 육박하는 몸무게를 줄이라는 팀의 명령에 따라 '하루에 6끼를 먹던 것을 3끼로 줄이고' 116kg으로 줄였다는 무용담도 있긴하지만, 바클리는 82경기에 모두 출전해 평균 14득점, 8.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바클리의 가세와 기존에 있던 말론, 어빙, 칙스가 함께 활약한 필라델피아는 84-85시즌 54승을 따냈고, 플레이오프 1,2라운드에서 워싱턴과 밀워키를 격파하면서 동부지구 결승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동부 지구 결승에서 필라델피아를 기다린건 '왕조' 보스턴 셀틱스였다. 이 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는 세대 교체라는 숙제만을 얻은채 1승 4패로 완벽하게 패배한다. 시리즈 내내 로버트 패리쉬의 빠른 움직임에 농락당한 말론은 더이상 최고의 센터가 아니었고, 바클리도 버드와 맥헤일을 감당하기엔 아직 어렸다. 어빙 역시 플레이오프 기간동안 평균 득점이 17점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체력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85-86시즌에는 밀워키 벅스에게 발목히 잡힌 필라델피아는 이후 모지스 말론을 방출했고, 86-87시즌이 끝난 뒤에는 줄리어스 어빙마저도 은퇴를 선언한다. 3년만에 필라델피아는 찰스 바클리의 팀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팀은 바클리를 보좌할만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트레이드에서 연이어 실패했고, 필라델피아의 전력은 80년대를 풍미했던 예전의 전력이 아니었다. 바클리는 필라델피아에 있던 7년 동안 20-10을 매년 기록했지만, 팀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넘기도 힘겨웠다. 88-89시즌에는 뉴욕 닉스에게 탈락했고, 89-90시즌에는 우여곡절 끝에 1라운드를 돌파했지만,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1승 3패로 탈락한다. 플레이오프에서 조던과 바클리의 첫 만남이었다.
90-91시즌에도 시카고 불스에게 일격을 맞은 바클리는 91-92시즌 자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이 PO에도 오르지 못하자 트레이드를 요구한다. 이미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척 지진 상태였던 것이다. 바클리는 이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바로 우승을 위해 열정을 바칠수 있는 팀을 구하고자 한다. 결국 팀도 바클리의 요구를 받아들여 1:3트레이드를 통해 제프 호너섹, 팀 페리, 앤드류 랭을 받고 바클리를 피닉스 선즈로 보낸다. 그리고 피닉스 선즈에서 바클리는 제 2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절친한 친구이자 라이벌 조던과 바클리
최고의 시즌.. 그리고 하락기
피닉스 선즈는 바클리를 위한 팀인 것 같았다. 케빈 존슨, 댄 멀리, 대니 에인지, 리차드 듀마스, 세드릭 세발로스 등 강한 공격력을 갖춘 선수들이 즐비한 피닉스에서 바클리는 자신 농구 스타일을 잘 접목 시켰다. 이해 피닉스는 무려 7명의 선수가 시즌 평균 득점이 10점을 넘었고, 피닉스는 62승 따내면서 리그 최고 승률 팀에 등극한다. 바클리의 이런 압도적인 활약에 팬들은 2연패를 차지한 조던을 저지할 라이벌로 바클리를 띄우기 시작했고, 리그에서도 피닉스를 최고 승률 팀으로 이끈 바클리의 공로를 인정해 리그 MVP를 수여한다.
그렇다고 92-93시즌 피닉스의 플레이오프 행보가 정규시즌처럼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1라운드에서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가 모두 은퇴한 LA 레이커스에게 첫 두경기를 뺐기면서 업셋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당시 바클리는 "아직 시리즈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라고 각오를 다졌지만, 어느 누구도 시리즈가 다시 뒤집어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홈에서 뺐긴 1,2차전의 무게는 다시 만회하기엔 너무 무거워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클리는 LA에서 벌어진 3,4차전을 모두 승리로 따냈고, 연장 접전으로 펼쳐진 5차전도 극적인 승리를 견인하면서 1라운드를 돌파한다.
2라운드에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상대는 제독 데이비드 로빈슨이 이끄는 샌안토니오 스퍼스. 홈에서 치룬 1,2차전을 승리로 이끈 피닉스는 원정 3,4차전을 패배했다. 5차전을 109-97로 승리한 바클리는 6차전 100-100인 상황에서 마지막 공격권을 갖는다. 매치업 상대는 로빈슨... 남은 시간을 확인하던 바클리는 로빈슨을 속인 뒤 점프슛을 시도했고, 이 슛은 로빈슨에게 비수를 꽂는 결승 득점으로 연결된다. 서부지구 결승에서 시애틀을 4승 3패로 힘겹게 물리친 바클리는 NBA 결승에서 마이클 조던과 재회한다.
NBA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92-93 NBA FINAL은 조던과 바클리라는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 파이널은 바클리를 조던의 라이벌로 올려놓을만큼 정말 수준높은 경기들이었다. 특히 6차전에 터진 존 팩슨의 결정적인 3점슛, 그리고 바클리의 절규는 NBA 팬들의 뇌리에 아주 강하게 남는 영상들이었다. 바클리는 7차전을 홈에서 가져갈수 있었던 만큼, 6차전 경기 종료 49초전까지 4점차로 앞섰던 것이 정말 아쉬웠을 것이다. 댄 멀리의 3점슛이 에어볼이 되고 조던의 점프슛과 팩슨의 3점슛... 정말 드라마처럼 아름다운 승부였다.
그리고 바클리는 이 시리즈가 끝난 후 "정말 잔인한 승부" 라는 말을 남긴채 다음 시즌을 기약한다.
하지만 이후의 바클리에 행보는 아쉬움만 남는다. 바클리의 20-10시즌은 이후에도 3년간 계속되지만,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던 과체중이 드디어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매년 바클리는 자신의 체중 조절에 실패하면서 발목과 등, 무릎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출전 경기 숫자도 점점 줄어든다. 피닉스도 바클리가 더이상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 95-96시즌을 끝으로 바클리와 작별을 고한다. 언론은 여전히 92-93 FINAL에서 조던과 멋진 승부를 펼친 바클리의 모습을 회상시키며, 바클리를 추켜세웠지만, 분명한건 더이상 바클리는 리그를 압도하는 선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바클리는 피닉스와 작별한 뒤 또한번 우승을 위한 선택을 한다. 하킴 올라주원,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있는 휴스턴 로케츠와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미래 명예의 전당 3인방이 모인 휴스턴에게 사람들의 기대는 증폭됐고, 첫번째 컴백을 선언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와 함께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바클리가 휴스턴으로 이적한 96-97시즌 파이널의 주인공은 시카고 불스와 유타 재즈였다. 휴스턴은 서부지구 결승전에서 존 스탁턴의 결승 3점포를 맞고 무너졌고, 바클리는 스탁턴의 3점슛을 막기 위해 양팔을 들며 필사적으로 수비했지만, 마치 운명의 톱니바퀴처럼 스탁턴의 역사적인 3점슛은 바클리에게 우승의 꿈을 또한번 멀어지게 한다. 바클리는 이 경기가 끝난 후 락커룸으로 돌아가 주위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때려부수며 분노를 나타냈다.
98-99시즌 스카티 피펜이 휴스턴에 합류하면서 우승에 대한 희망을 다시 살리는듯 했지만, 피펜은 시카고에서의 활동량을 휴스턴에서 보여주지 못했다. 플레이 스타일이 전혀 다른 임무를 맡다보니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피펜은 "바클리는 팀의 승리보다는 자신의 리바운드 갯수를 채우기 위해 경기를 뛰는 것 같다" 라며 바클리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팀의 결속력은 바닥을 치고 만다. 여기에 올라주원마저 심장문제로 쓰러지면서 바클리는 허무하게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99-00시즌이 막 시작한 1999년 12월 8일, 바클리는 언제나처럼 코트에 들어섰다. 피펜이 떠나긴 했지만, 올라주원이 아직 건재했고, 스티브 프랜시스라는 재기 넘치는 가드가 합류하면서 희박하지만 우승에 대한 희망은 남아있는 상태였다. 비록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것이라 밝힌 상태이긴 했지만, 시즌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경기 도중 바클리는 리바운드를 잡는 도중 무릎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아웃 된다. 바클리는 99-00시즌 돌아오지 못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는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바로 자신이 NBA 경력을 시작했던 필라델피아 원정 경기 도중 생긴 일이었던 터라 정말 묘한 상황이었다.
바클리를 회상하다
바클리는 2만득점, 1만 리바운드, 4천 어시스트를 기록한 NBA 역사상 4명중 한 명이다. (압둘자바, 칼 말론, 윌트 체임버린) 경기력의 기복이 심하고, 말년에는 수비에서 구멍이었으며, 불같은 성격탓에 여러가지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198cm의 키로 바클리처럼 힘차고 다이나믹하게 뛰어다닌 선수는 없었다. 빌 윌튼은 그에 대해 "바클리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위력적인 리바운더이자 수비수였고, 3점슛과 드리블에도 능했다" 라며 바클리에 대해 잘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호탕한 성격은 많은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팬들에겐 바클리 최고의 매력거리였다. 1992년 올림픽에서 미국 드림팀은 아프리카의 앙골라팀을 만나게 됐다. 앙골라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바클리는 "앙골라가 어디 붙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앙골라는 큰 일 났다는 것" 이라며 거침없이 자신감을 표현했다. 아마 다른 외국 선수가 이랬다면 우리나라 네티즌들 기준에서는 개념이 안드로메다에 있는거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이치로 30년 발언과 비슷하지 않은가 ㅋㅋ)
야오밍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저런 선수가 20득점 이상을 기록하면 당나귀 엉덩이게 키스하겠다" 라고 혹평했다가, 바클리는 TV 방송 앞에서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를 하는 굴욕을 당한다. 그리고 올해 유타와 휴스턴간의 플레이오프 6차전에서 유타가 승리에 7차전까지 이어지자 "중요한 복싱경기를 봐야하는데 7차전 중계하게 생겼다" 라면서 삐진 티를 팍팍내기도 했다. ㅋㅋ
물론 말을 험하게 하긴하지만 그가 틀린 말을 한 적은 없으며, 자신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그런 선수라는 면에서는 높이 살만하다. 게다가 젊은 선수들이 최근 개인적인 영화에만 치중하는 것에 쓴소리를 내뱉을때는 멋있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조던과의 라이벌 구도 이후 나이키 등 여러 미디어 등을 통해 인기가 과정됐던 것은 사실이며, 92-93시즌 이후 자기 관리에 실패한 것도 사실이다. 늘 잔부상에 시달렸던 것도 바클리가 그렇게 우승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느냐에 대한 의문에 따라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클리가 은퇴한지도 이제 7년이 넘었다. 작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비록 허물도 많고 약점도 많은 선수지만, 그만큼 큰 매력과 실력을 가졌던 선수였기에 바클리의 이름은 아직도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제 TNT 해설위언으로 맹활약하는 바클리가 앞으로도 멋진 모습 계속 보여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