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구대성은 선동열과 같은 급이었다.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 팀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구대성이 마운드에 오르기 전에 경기를 뒤집지 못하면 끝이겠구나’하는
조바심 때문에 벤치가 부산해졌다.
마무리투수는 묵직하고 빠른 공으로 승부해야 한다.
힘이 떨어져 이제 한물갈 때도 됐는데 요즘은 0.05초 정도의
미세한 템포 변화로 타자들을 잡아낸다.”
- 롯데 자이언츠 이철성 코치

대전고의 슈퍼 에이스 ``구대성``
1987년 6월 13일 제42회 청룡기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경남고-대전고의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울 동대문야구장. 우승을 자주 하는 경남고와 달리 대전고는 전국규모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우승에 대한 열의가 강렬했다.
대전고는 1986년 이 대회 결승전에 올랐지만 덕수상고(현 덕수정보고)의 강타선을 막지 못하고 2-4로 역전패했었다. 하지만 1987년, 대전고의 마운드에는 당시 2학년생으로 1회전 경기고전부터 시작해 결승전까지 5경기 내리 등판한 구대성이 서있었다.
구대성은 4회와 5회 각각 2점씩 내주며 흔들렸다. 그러나 구대성을 대신할 마땅한 투수가 대전고에는 없었다. 대전고도 타선이 터지며 9회까지 5-5 접전이 이어졌다.
연장 11회초 1점을 내주며 4-5로 역전됐다. 에이스 구대성이 5실점하긴 했지만 대회 기간 내내 혼자 마운드를 짊어진 2학년생 투수를 비난하는 동료는 없었다.
그러나 11회말이 끝나고 우승컵을 안은 팀은 대전고였다. 11회말 공격에서 경남고가 흔들린 틈을 타 끝내기안타로 거짓말처럼 6-5 역전에 성공했다.
당연히 우수 투수상은 구대성의 차지였다.

< 한양대 시절의 구대성, 오른쪽은 구대성의 대학 선배였던 정민태 >
대성불패, 신화의 시작
1993년 한양대를 졸업하고 한화에 입단했다. 당시 빙그레에는 송진우, 한용덕, 한희민 등 쟁쟁한 투수들이 있었다. 세간에서는 당시의 한화 투수진을 최고라고 했다.
프로 첫해 이렇다 할 성적은 올리지 못했지만, 1994년부터 서서히 제 기량을 찾다가 1996년 다승과 구원, 방어율, 승률 4관왕에 오르며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특히 페넌트레이스 MVP를 차지한 1996년에는 초유의 방어율·다승·구원 3관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구대성은 1999년까지 7시즌을 치르며 55승50패 129세이브 방어율 2.80을 기록했다.
1996년에는 다승, 방어율, 세이브, 승률 등 4관왕에 오르며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이때까지 구대성은 위력적인 강속구를 바탕으로 타자를 압도하는 투수였다.
“대단한 스피드였다. 10년 전 우직한 직구가 지금도 기억난다. 정말 일품이었다.” 이숭용(현대)은 구대성의 강속구를 아직 잊지 않고 있다.
구대성의 통산 9이닝당 탈삼진은 9.95개다. 1천 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2위 선동열은 9.28개로 구대성보다 0.67개가 적다. 구대성은 한 시즌(100이닝 기준) 9이닝당 탈삼진에서도 역대 1,2위 기록을 갖고 있다.
1996년 세운 9이닝당 탈삼진 11.85개는 좀처럼 깨기 힘든 기록으로 불린다.
“당시 구대성이 구원투수로 139이닝을 던져 탈삼진 189개를 기록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난해 오승환(삼성)이 9이닝당 탈삼진 12.4개를 기록했지만 구대성에 훨씬 못 미치는 79⅓이닝만 투구하지 않았나.” SBS스포츠 이광권 해설위원의 분석이다.

“구대성은 아마추어 때부터 스피드와 공 끝이 좋았다. 게다가 공을 릴리스 포인트까지 감추고 옆에서 끌고 나오는 독특한 투구폼 때문에 왼손타자들이 상대하기 매우 어려운 투수였다.” - 양준혁 (삼성)
양준혁은 아마추어 시절 구대성과 상대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프로에 와서도 달라진 건 없었다.
물론 이와 같이 구대성 공략에 어려움을 겪은 타자는 양준혁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구대성이 마운드에 오르면 어느 타자이던 모두 곤혹스러워 했다.

한화 구대성은 한때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도 가장 두려웠던 상대다.
일본으로 진출하기 전 이승엽은 왼손투수 구대성에게 유독 맥을 못 췄다.
이승엽은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를 꼽으라면 (구)대성이 형과 두산의 이혜천”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더 큰 무대로의 도전
1999년 창단 14년 만에 한화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구대성은 2000년 일본 퍼시픽리그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한다. 이적료 3억 5천만 엔(약 38억 원)에 계약금과 옵션을 포함한
연봉이 각각 1억 엔과 1억 5천만 엔으로 좋은 조건이었다.
일본 진출 첫해에 7승9패 10세이브 방어율 4.06을 기록하며 수준급 활약을 펼친 구대성은 이듬해인 2002년에는 22경기에 선발투수로 출전해 5승7패 방어율 2.52의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당시 오릭스 타선이 뒷받침됐다면 10승 이상을 거둘 수 있었다는것이 퍼시픽 리그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2004년까지 오릭스에서 뛴 구대성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평생의 꿈이었던 메이저리그행을 선택했다. 2005년 우여곡절 끝에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로 옮긴 구대성은 33경기에 구원투수로 출전해 승패 없이 방어율 3.91을 남기며 제 몫을 다했다.

< 구대성과 유난히 잘 어울렸던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 >
* 현재까지 국내프로야구 출신 가운데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는 구대성과 이상훈뿐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지난해 한화로 돌아온 구대성은 5년간의 공백을 메우기 힘들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개인 시즌 최다세이브인 37세이브를 올리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국내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꼽혔지만 20대의 한창 때도 시즌 30세이브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는 구대성이었다. 게다가 터프 세이브를 14개나 기록할 정도로 팀 공헌도가 높았다.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올 시즌 구대성은 8월 21일 현재 1승6패 20세이브에 방어율 3.72를 기록하며 다소 부진하다. 여기저기서 40살에 가까운 구대성을 가리켜 ‘한물갔다’고, ‘대성필패’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전준호(현대)는 “전성기에 비해 공 끝이 확실히 달라졌다. 그때는 구속이나 공 끝이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예전에 받았던 위력적인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롯데 이철성 작전코치는 “전에는 구대성이 한가운데로 직구를 뿌려도 타자들이 잘 대응하지 못했다.
맞힌다고 해도 파울볼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안타로 이어지고 있다”며 “무릎 부상으로 공의 위력이 많이 떨어진 듯하다”고 말했다.
(후반기 구대성은 왼쪽 무릎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가운데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한화 김인식 감독은 구대성이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팀을 위해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전체적인 컨디션이 70%에 불과한 상황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구대성은 말한다. “팀과 팬을 위해 공을 던져야 한다면 언제라도 마운드에 올라갈 준비가 돼 있다”고.
9회, 한화의 마운드에는 여전히 구대성이 필요하다.
- 저에게는 지금의 구대성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지만,
그가 서있는 마운드에서는 이유모를 든든함이 느껴집니다.
구대성 선수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