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호
나는 기다립니다 / 다비드 칼리 / 문학동네
끝이 아닌 끈을 드립니다 [[[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불과 몇 달까지만 해도 그림책을 그다지 좋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책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림책에 대해 이상한 선입견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책을 보는 친구들을 보면 묘한 열등감을
느끼곤 했다. 우리 집에는 그림책은 커녕 제대로 된 책이 한 권도 없
었다. 우리 가족에게 책은 사치였다. 60년대나 70년대에 산 것도 아
닌데,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가난이라는 말만 들어도 생목이 올
라올 정도였다. 책을 살 돈이 있었다면 라면을 사거나 엄마의 텅 빈
지갑에 몰래 돈을 넣어두었을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읽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배고픔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자면 되나, 읽고 싶은 욕
구는 잠재울 수가 없었다. 글을 알기 전에는 전봇대나 담벼락에 붙
어 있는 전단지를 보고 글자를 하나씩 깨우치며 읽음의 욕구를 해결
했다. 하지만 책이라는 걸 발견한 후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사고 싶었다. 누구의 손때도 묻지 않은, 나만의 책을 갖
고 싶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해 돈을 모았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면 그토록 사고 싶었던 책 대신 가족 얼굴이 먼
저 떠올랐다. 도저히 모른 척하고 책을 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건
가족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엄마가 잘 발견할 수 있도록 밥통에 월
급을 넣어둘 때, 왜 그리 하늘이 높고 파래보였는지. 우리 집 천장은
왜 그리 낮아보였는지.
책을 읽고 싶을 때는 근처 친구 집에 갔다. 친구 집에는 커다란 책
꽂이에 반들반들한 그림책이 가득 꽂혀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열등감과 부러움으로 방망이질 쳤다. 주머니에 넣을 만큼 작
은 책이었다면 나는 분명 도둑질이라도 해왔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림책은 훔치기엔 너무 컸고 나같이 가난하고 볼품없는 아이는 손끝
하나 대어서도 안 되는 보석처럼 보였다.
그때 보았던 그림책은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했다. 글이 별로 없었
지만 그림만으로도 훨씬 깊고 넓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상상만으
로도 이야기를 마음껏 불러낼 수 있다는 것! 그건 정말이지 멋진 세
계였다. 그 많은 책들 중에는 한 번도 손을 타지 않는 책들이 꽤 있
었다. 책이 무슨 장식품도 아니고, 꽂아만 둘걸 뭐 하러 샀냐고 비아
냥거리며 돌아섰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그 날의 기억이 반짝,
반짝, 반짝…… 빛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책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시절 내 또래 친구들
보다 더 많은 책을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있는 책은
다 읽어버릴 거라고 미친 듯이 동네도서관에 파묻혀 지낸 것도, 그
래서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내게 책
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우리 집에 커다란 책꽂이가 있고 그
책꽂이 가득 그림책이 들어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책이란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었
을지도 모른다. 그림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열등감이
느껴지거나, 가슴 한편이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그런 열망에 사로잡
히지도 않을 것이다.
「동화 읽어주는 여자」 연재를 맡은 이후로 월간 『Booksetong』
의 박나현 기자님이 책을 보내주시곤 한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들
을 많이 보내주시는데, 그 중에는 멋진 그림책들도 많다. 나는 그동
안 일부러 그림책을 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림책만 보면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열등감과 열망의 아우라가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
이다. 그러나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라는 책을 읽으며
내가 그토록 사고 싶어 했던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의 열등감에서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고
나 할까.
이 책에는 빨간 털실 하나가 시종일관 등장한다. 한 아이가 어른이
되고,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아이를 낳고, 소중한 아내가 죽고,
자식들이 결혼을 해 새로운 아이가 탄생할 때까지, 빨간 털실은 사
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주는 끈이 되어준다. 어서 키가 크기를
나는 기다립니다. 사랑을
나는 기다립니다. 전쟁이 끝나기를
나는 기다립니다. 곧 태어날 아기와의 만남을
나는 기다립니다. “미안해”라는 한 마디를
나는 기다립니다. 이 사람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나는 기다립니다. 다시 봄이 오기를
책의 맨 마지막 장에는 한 뭉치 털실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 끝이
라는 글자 대신 끈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다. 끝이라는 글자대신 끈
이라는 글자를 마주했을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앞이 뿌옇게 되는
건 어쩐 일일까? 한 없이 나약하고 볼품없어 보이던 어린 시절의 내
가,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 보이기 시작하는 건 왜 그런 것일까? 인
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에 이 책을 보게 된다면, 우리 인
생에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만 같다.
언젠가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기다림보다 더 두려운
것은 기다림을 멈추는 일이다, 라고.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까. 만남? 사랑? 성공? 기적? 무엇을 기다리던지, 기다림을 간
직한 사람에게는 마침표가 없다. 그들의 삶에는 언제나 삶을 이어주
는 끈이 있을 뿐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어둠이 그치면 햇
살이 쏟아지듯이. 아픔이 끝나면 사랑이 시작되듯이.
글쓴이 오진원
1981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2006
년 장편동화 『꼰끌라베』로 대산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으며 등단했
고, 『플로라의 비밀』로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진흥기
금을 지원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플로라의 비밀』이 있다. 현재,
고도문예창작원 지도 작가로 활동 중.